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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기가 있느냐? (요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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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있느냐? (요 21:1~6)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갈릴리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갈리리로 갔던 제자들은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두 사람, 이렇게 일곱명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겠습니까? 처음 주의 제자들을 부르신 그 장소에서 다시 부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낙심되고 침체되고 방향을 잃어버린 제자들을 재 소명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마4:18 ~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막 3:15~13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주님께서는 맨 처음 자기가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셔서 자기와 같이 있게 하시고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주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맨 처음처럼  그 곳에서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고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속에서는 여러번 하나님 백성들을 소집공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벧엘, 시네광야, 세겜, 미스바, 갈멜 등등 "그곳으로 모여라. 그곳에서 만나자" 하는 소집공고에는 신앙적인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갈릴리로 소집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의도 였을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갈릴리에 도착한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아직도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무엇을 해야 하나 중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때 늘 그랬던 것처럼 성질 급한 베드로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머지 여섯도 우르르 일어나 '나도, 나도 같이 가자'며 따라 나섰습니다.

크리스찬의 진정한 리더십은 "앞장서는 리더십"입니다. 뒷북치고 뒷말하고 꼬리되어 끌려가는 것은 크리스찬의 리더십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장서는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 크리스찬 리더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장서는 사람의 행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데스바네아서 12명의 정탐군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대회를 할 때 10명의 정탐꾼들이 어떻게 분위기와 여론을 끌어갔던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온 백성들로 하금은 절망하게 했고, 서로 원망하게 했고, 하나님까지 불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수습하고 희망을 재시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공동체를 해치는 리더십은 절대로 건강한 리더십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든지 귀를 기울여 들어보시고 이것은 우리의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맞장구를 치시고 함께 하십시오. 그러나 공동체에 작은 해악이라도 된다고 생각되면 귀를 막아야 합니다. 동조하는 순간 악한 영이 내 안에 쏙 들어와 버려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병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크리스찬 리더는 앞장 서지만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앞장서야 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앞장 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다 그리하자고 따라나섰습니다.  선도차가 길을 잘못 들어서면 모든 차들도 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만일 그때 베드로가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러 가야겠다.'고 나섰더라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일어섰고 다른 제자들도 다 물고기나 잡으러 나서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언제부터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고 했습니까?  밤입니다.  그리고 밤이 새도록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밤새도록 했으니까 고기를 많이 잡았겠지요?  얼마나 잡았다고 했습니까?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했습니다. 즉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타이타닉'이 침몰한 것은 빙산이나 빙각 때문이 아니라 리더십의 교만 때문이라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리더십은 "밤새도록 수고 했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못하는" 그런 실패의 리더십이었습니다. 
     
일곱제자들이 밥새도록 고기를 잡고 있었던 곳을 오늘 본문 말씀은 어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1절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하셨습니다. 여기에 디베랴 호수가 나오는데 디베랴 호수는 어떤 호수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디베랴 호수는 어느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갈릴리 호수라고 하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만 유독 디베랴 호수라고 하고 있습니다(요 6:1, 6:13, 21:1). 왜?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 저자만이 유독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했을까요? 

디베랴는 원래 로마를 다스리는 황제의 이름입니다. 로마시대에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서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저곳 로마 군인들이 정복한 곳에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다붙여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로마의 황제의 이름을 붙여 도시를 만들려고 하면 그만한 위엄을 갖추고 규모를 자랑할 만한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거대함"이란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작은 고을은 로마의 황제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은 자연스럽게 거대함의 가치를 숭배하고 거대함의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기자는 거대한 것을 추구하는 디베랴호수에서 거대한 고기, 많은 고기를 잡기를 원했을 법한 제자들의 심리상태를 잘 반영하고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디베라 호수에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미 3년 6개월 전에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에 버렷으리라고 생각했던 디베랴적인 사고, 가치관의 함정에 빠져버린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조건 크고 많은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런 것들에서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곳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보세요. 거대함을 상징하는 디베랴 호수에서 밤새도록 많은 고기, 큰 고기를 잡고자 한 제자들을 주님께서 부르시면서 '얘들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얘들아"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인 "파이디온"은 '아기'나 '어린이', '소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성인이 된 제자들을 부르심에 사용되기에는 전혀 적당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본문 이외에 이 단어가 성인에게 사용된 적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제까지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만은 제자들을 향하여 그렇게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체 허망한 바다를 향하여, 그것도 밤을 새워가며 열심으로 헛수고하는 제자들이 주님 눈에는 철없는 아이처럼 보였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큰 것 자랑하고 많은 것 자랑하며 사는 것은 예수님이 보실 때 "애들"인 것입니다. 

주님 눈에 철없는 아이처럼 비춰지는 일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고기잡이에만 열중하였던 제자들이 얻은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땀을 흘리고 애써 수도 없이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결과는 그 사람이 세상의 욕망과 그 흐름을 잘 타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얼마나 명예와 권력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명예와 자리를 차지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하더라도,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의 의미와 사명을 잊고 참 인간다운 삶, 하늘 뜻에 따르는 삶은 버려 둔 채, 자신의 욕구와 욕망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생을 열심히 뛰며 무엇인가를 이루며 살아온 것 같으나 결국 아무 것도 잡은 것이 없는, 곧 없어질 허무한 것들만을 쫓아 살아온 인생이 되고 말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고기 있느냐?"(5절)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때 주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순종했더니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명을 감당할 때 누구나 고기가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디베라 호수에서 잡은 고기와는 전혀 다른 가치의 고기이겠지만 말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오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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