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를 따라 오너라 (요 21:18~23)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 18-23 


오래 전, 텔레비전에서 농촌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프로그램 중, 낱말 알아맞히기 개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카드에 쓰인 낱말 뜻을 풀이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방식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마치 한 할아버지에게 무슨 낱말 카드가 주어졌는가 하면,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카드가 주어졌습니다. 

그 카드를 받아 드신 할아버지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단도직입적으로 할머니께 이렇게 말씀합니다. “할망구와 나 사이를 뭐라고 하지?” 할머니 역시 머뭇거림 없이 큰 소리를 즉답 하십니다. 󰡔웬수?󰡕(순간, 할아버지께서 당황스런 표정이 되시더라고요, 그렇다고 게서 말 수 있습니까?) 󰡔아니, 그거 말로 네 자로···󰡕 하시더라고요, 그러자 할머니도 이번에는 더 자신 있게 󰡔팽생웬수!󰡕 하시더라고요. 결국, 그 낱말 알아맞히기는 실패하고 넘어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얼굴이 쪼글쪼글해진 할머니와 주름 깊게 패인 할아버지가 한 평생 부부로 살아오시면서 喜怒哀樂 다 겪으시면서, 아들 딸 자식 키우고, 사신 것 아니겠습니까? 할머니께서 비록 󰡔웬수?󰡕, 󰡔평생웬수!󰡕라고 하셨지만, 그래서 당황은 하셨겠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입장을 바꾸어 󰡔웬수?󰡕, 󰡔평생웬수!󰡕라고 답하시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평생을 살아오실 수 있었을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부의 지나가는 짧은 대화이지만, 지나간 과거 시대를 살아오신 우리 어른들의 삶의 방식, 역설적인 사랑의 방식이 그 안에 녹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볼 때, 천생연분이란 낱말을 설명하시는 할아버지는 할머니께 너무 당당하고 자신만만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할망구, 미안한 맘 왜 없겠수, 그러나 나 당신 사랑해요” 그 맘 아니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 “예,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질까요? 미안한 마음이 들까요? 부끄러울까요? 아니 한 번도 진지하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하시겠습니까? 당황스럽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 없잖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이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 믿으십니까?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사람들이 왜 예수 믿는 것 같습니까?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 같습니까? 타종교를 비하하는 뜻은 아닙니다. 불교의 석가탄신일 초파일이 다가옵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 것 같습니까? 그렇잖으면, 다른 목적,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까? 
무속신앙, 샤머니즘, 우상 섬기는 사람들,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것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다른 목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돈도 바치기도 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기독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절대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 모이; akolouqei moi).”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주신 명령이요,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나를 따르라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가만 보면 예수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무속신앙, 샤머니즘을 믿는 사람들처럼, 예수님 사랑하지 않으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아닌 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도리어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주기를, 예수님께서 내 소원, 내 뜻, 내 욕심, 내 목표, 내 비전, 그냥 따라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저를 따라주시기만 하면 되요, 그런 式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만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따르미들’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이 내 뜻, 내 소원, 내 욕심, 나의 비전에 맞춰 주시고, 그저 나만 따라와 주세요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마치 ‘예수님 따름’이라고 착각합니다.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큰소리로 기도하면서, 떼씁니다. 하나님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작정기도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아무소리마시고, 그저 제가 하자는 대로만 해 주십시오. 제가 가자는 대로만 따라와 주십시오, 그러시면 됩니다. 이런 식의 믿음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을 마치 무슨 /대/단/한/ 믿음/인양 하는데, 이런 식의 믿음은 ‘예수따르미’가 아닙니다. 자기 式대로의 ‘예수믿으미’에 불과한 거지요. 

내가 누구를 따른다는 말은, 앞서 가시는 그 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대로 추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길이 없습니다, 내 방식이 없습니다. 앞서가시는 그 분이 가면 가고, 서면 서고, 그 분이 오른쪽으로 가면 나도 오른쪽으로 가고, 그 분이 돌아가시면 나도 돌아가고, 이것이 내가 누구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을 보면, 얼마나 내 중심적인지 모릅니다.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세속적입니다. 자기 방식대로의 ‘예수믿으미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를 이루고 있는 大勢이고, 主流입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일단, 어떤 방식이든 大勢만 이루면 그것을 眞理라고 받아들입니다. 大勢가 眞理가 아닙니다. 眞理가 眞理입니다. 이 시대의 대세를 따른다고 해서, 主流에 선다고 해서, 내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진리인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기독교 신앙에도, 언론이 진리가 되었습니다. 방송만 타면 진리가 됩니다. 자의적으로 방송을 타지요. 요즘 한국교회 는 매스컴우상, 大衆偶像을 섬기는데 혼이 다 빠져 있습니다. 매스컴우상, 大衆偶像,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방송이, 언론의 평가가 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기준이어야 합니다(오직성경으로, Sola Scriptura!). 

자기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은혜의 복음을, 그저 값싼 싸구려 복음으로 바꾸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의 신앙을 바라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긍정의 힘, 하면 된다, 잘 되는 나, 형통의 복음만 좋아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역동적인 위대한 복음을, 십자가를 외면한 채 세속적인 형통의 복음만을 추구하는 그릇된 ‘예수믿으미'의 신앙에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기꺼이 따르는 ‘예수따르미’로 다시 새 출발해야 합니다. 

신학자 Harvey Cox가 쓴, 󰡔예수 하버드에 오다, When Jesus Came to Havard󰡕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예수’와 ‘하버드’라는 두 개의 명사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잘 어울리는 듯 합니까? 뭔가 좀 어색한 것 같습니까? 잘 어울리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버드는 본래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1636년에 세워진 학교입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점점 종교적인 색체를 벗어버렸습니다. 특히 지나간 세기에 거의 백년 가까이 하버드는 연구 중심의 대학으로서, 풍부한 재정과 함께 세계적인 대학으로, 명문대학의 자리를 굳혔습니다. 명문대학의 자리를 잡아가면서 하버드에는 한 가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70년 동안, 학교 커리큘럼이나 카탈로그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설립한 대학들도 점점 세속화되어갔습니다. 학문의 전문화를 지향하면서 神學을 외면했습니다. 더 이상 종교의 문제, 신학의 문제를 대학에서 다루지 않고, 신학원(Seminary)이나 신학대학에서만 다루는 주제로 취급해버렸습니다. 경건한 청교도들이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세운 하버드대학교도 예수와 신학을 외면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것이지요. 

바로 그 때, 세계최고의 수재들이 공부하던 하버드대학교 졸업생들이, 미국사회의 온갖 범죄에 연루되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혀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0년대 초부터 하버드가 다시 ‘윤리적 사유 
Moral Reasoning'라는 과목을 신설하게 되었는데, 그 과목에서 20년 동안 Harvey Cox가 강의하였던 내용이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입니다. 예수님 없는 하버드대학교가, 더 이상 사회와 역사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하버드대학교가 예수님을 되찾아야 했다는 역사적인 사건을 말해주는 책입니다(예상을 뒤엎고 7, 8백 명의 학생들이 매 학기). 
우리들의 신앙을 가만 보면, 너무 세속화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관심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형통을 좇는 ‘예수 믿으미들’이 되려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예수따르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허망한 형통의 복음을 좇아가는 ‘예수믿으미들의 교회’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마땅히 대가를 지불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따르미들의 교회’로 든든하게 서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 모이; akolouqei moi).” 

주여, 주여 하는 나의 기도를 살피십시오.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나의 믿음을 살피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와 믿음과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회 금요일 아침에 갈라디아서 2, 20 말씀을 전하면서  사도 바울을 SoftWare가 바뀐 사람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十字架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나는 아직도 육체 가운데 삽니다. 그 이유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自己 自身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까지, 자신의 인생과 신앙, 삶을 作動시키던 모든 것들과는 완전하게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컴퓨터를 作動시키는 SoftWare가 완전히 교체되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과 신앙을 작동시키던 SoftWare, 프로그램이 다 죽었다는 고백입니다. 율법주의, 바리새주의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편협한 선민주의, 난지 팔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할례의식, 교회를 핍박하던 그 열심도,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고 나서는, 그것이 다 죽었다는 겁니다. 도리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지금까지 내게 ‘유익’(케르도스, kerdos, 利益, 자산) 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도리어 다 '害'(제미아, zhmiva; 손해, 손실, 부채)가 되었습니다. ‘배설물’(스퀴발론, skuvbalon; 人糞이나 식탁에서 떨어진 더러운 음식찌꺼기)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바울의 인생과 삶과 신앙을 움직이는 SoftWare가 되지 못하였다는 겁니다. 그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SoftWare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님의 十字架가,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새롭게 작동시키는 SoftWare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하드웨어를 갖춘 컴퓨터라도, 그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가 나쁘면, 그 컴퓨터는 나쁜 소프트웨어가 시키는 대로만 作動합니다. 그저, 폭력적인 개임이나 보여줍니다. 醜惡한 것들만 보여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좋은 소프트웨어를 깔아주면, 그 컴퓨터는 완전히 새로운 도구로 作動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은, 그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인생을 작통시키는 소프트웨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인생 전부를 작동시키는 유일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드리되, 관제와 같이(素祭-곡식제사) 자신을 다 부수어 드렸습니다. 거친 알갱이, 덩어리 하나 없는 고운가루처럼 부수어, 자기 인생을 주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리되,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 부어 드리는 관제灌祭와 같이, 자기 전부를 다 쏟아 부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따르미’에 실패한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요한복음 18장에서 보면, 대제사장 안나스의 관저 뜰에서, 예수님이 다 들으시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요 18, 15-18). 아가파스 메(agapas me)/ 아가파스 메/ 필레이스 메(fileis me)/ 

그 때, 시몬이 대답합니다. 필로 세(filw se)/ 필로 세(filw se)/ 필로 세(filw se)/ 시몬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너는 나를 따르라, akolouqei moi.” 

베드로가 어떻게 주님을 따랐습니까? 본도와 갈라디아, 비두니아, 갑바도기아, 터키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Clemens에 의하면, 베드로가 死地로 끌려가는 아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주님을 기억해요.” 아내가 먼저 순교한 후, 베드로도 ‘네로 황제’의 박해가 밀려드는 로마에서, X자형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못 박혀 순교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감히 예수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가치가 없다면서, 자청했기 때문이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 외치면서 주님만을 높이면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한 ‘값싼 예수믿으미’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否認하고 나의 十字架를 지고서, 앞서 가신 예수님을 뒤따르는 ‘예수따르미의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 되십시다. 아멘. 

주님, 이 시간 우리도 감히 주님 앞에 고백하고 싶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이 있게 하시고, 우리 안에 주님 사랑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예수따르미’의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