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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되라 (암 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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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되라 (암 7:10~17)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적대감이 어디에서 왔는가? 죄로 인해 들어왔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적대감이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사탄의 미혹으로 죄를 짓고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은 반목이 시작되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에 관한 예언을 한 이래로 인간의 삶은 사단과 죄와의 싸움이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인류의 물줄기는 두 개의 강이 되어 있다. 하나의 강은 육적인 인간으로 죄를 짓고 더 짓는 육체가 되어 버린 가인의 후예의 삶과 영적인 인간으로 죽는 존재임을 알고 신앙으로 살려는 셋의 후예의 삶이다. 이 두 종류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인류에 대하여 그래도 희망을 거는 것은 셋의 후손들의 신앙 때문이다. 세계사 속에서 이 두 물줄기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늘과 땅이 만날 수 없듯이 서로 다른 형태로 흐른다. 그런데 노아 홍수 때까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혼합하여 모두 육체의 아들이 되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는 육체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심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심판으로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지만 불신의 사람과 믿음의 사람으로 나뉘어 흐르는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이란 두 개의 강줄기는 바뀌지 않는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다. 요3:6의 말씀처럼 영과 육은 같이 할 수 없고 영과 육은 서로 부딪힌다.

롬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타협점이 없다.

롬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의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싸워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영적 전쟁이며 반드시 대결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은 오늘부터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싸움 속에 던져져 있다. 과거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싸움은 존재하였다. 기원전 8세기, 아모스는 스스로 말하기를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암7:14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치기였다고 말한다. 그 시골뜨기 아모스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서 전해주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암7:15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아모스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가 아니지만 선지자가 하는 예언을 외친다. 
  

1. 그 전하는 묵시의 내용은 사실이었다. (암1:1~7:9)

암1:1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그는 이웃 나라들의 서너 가지 죄와 그 벌을 예언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에 내리실 죄에 대한 벌을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보여주신 환상인 ① 황충의 떼, ② 불의 재앙, ③ 다림줄의 환상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실 앞에 막아서는 적대자가 나타났다. 아마샤라는 사람이 아모스의 메시지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도전한다.

암7:10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묵시를 거짓으로 만들고 거짓 송사로 왕의 모반꾼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적을 하고 있다. 아마샤는 누구인가? 그는 벧엘의 제사장이다. 당시의 권세있는 왕인 여로보암에게 아모스를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거짓의 장본인인가? 아모스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다. 드고아에서 양을 치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렇지만 제사장이라고 자처하는 아마샤는 사람에 의해 세워진 제사장이다. 여로보암 1세 때부터 벧엘의 성소와 단의 성소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성소였다. 제사장직도 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세운 정치적 직분이었다. 그 처음부터 거짓말로 출발하고 있는 자가 벧엘의 제사장이다. 따라서 사실을 듣고 사실을 전하는 영의 사람의 메시지가 거짓으로 세워진 거짓된 모함에 도전을 받고 있다. 아모tm의 삶에 방해자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든지 어떤 도전을 만나더라도 당황해서는 안된다. 약해져서도 안된다. 두려움으로 인해 말씀을 따르고 사는 삶에서 물러서거나 포기해서도 안된다. 신앙 생활은 이겨야 하는 영적 전쟁이다. 주님을 믿는 자로서 거짓을 말하는 자처럼 모함받을 때가 있다. 괴롭고 참아내기 어렵다. 그때마다 이겨야 할 영적인 일이라 믿고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진실을 왜곡시키는 전문가다. 싸워야 하는 대상임을 깨닫자. 마귀는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해서도 안된다. 마귀는 대적해야 한다.(벧전5:9) 그래야 물러간다.

  
2. 그 묵시를 전하는 것은 사명 때문이었다. (암7:12)

아모스가 유다 출신의 사람으로 북왕국으로 올라가 예언의 묵시를 전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예언을 기분 나쁘게 듣고 방해하는 아마샤는 아모스의 사명을 조롱한다. 사명 따위를 우습게 본다. 

암7: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사명에 사는 사람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나 아마샤는 도망가라고 충동한다. 사명에 사는 사람은 떡이 우선이 아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남유다로 내려가 거기서 떡이나 먹으라고 비아냥거린다. 벧엘은 이스라엘 땅이니 예언을 하려면 남으로 가라고 한다. 사명이란 국경을 넘으며 열방의 사람 누구에게든지 다가간다는 것을 아마샤는 모른다. 진실로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아모스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왕궁에 세워진 아마샤가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는 제사장직도 거저 얻은 직, 신분의 안위나 보장 받는 자리, 지경과 경계선을 넘나들 필요없이 살아가면 되는 직업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사명을 지닌 자가 평안하게 지내면 된다는 유혹, 직장만 보장되면 된다는 세상적인 것들의 유혹을 받아서도 안된다. 승진하고 인정만 받으면 되는 세상적인 것들의 가치관에 넘어가서도 안된다. 이 시간에도 사명으로 살아가려는 신앙 생활을 무너뜨리려는 세상적 도전은 항상 일어난다. “너만 배불리면 되는거야? 너만 안정되어 살면 되는거야?” 그때마다 나는 사명자다. 사명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명을 따른다. “나는 어떤 유혹 앞에서도 치우칠 수 없다.”라고 선포하고 반드시 사명을 위해 사는 삶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3. 그 묵시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확신하였다. (암7:15)

아모스는 암7:15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아모스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순종하려고 한다. 민족을 위해서 묵시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에 순종하고 이스라엘까지 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방해하는 아마샤는 왕의 권세, 왕의 성소, 왕의 궁전만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권세에 도취한 사람들은 말씀을 농담 정도로 여기고 말씀을 무시한다. 그러나 말슴의 가치에 아모스는 자신의 생을 걸고 있기에 예언하지 말라는 아마샤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아마샤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자를 향해 심판을 선포한다.

암7:1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측량하여 나누어질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 아모스는 물러서지 않는다. 불신앙적 아마샤에게 심판을 선포한다. 

우리는 말씀을 업신여기는 타락한 사람이 되지 말자. 오히려 가정이 잘 되려면, 민족이 잘 되려면 말씀을 최고의 가치있는 보화로 여겨야 한다. 문명의 이기가 인간의 삶을 점점 세속화로 끌고 가는 이 때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싸워이겨야 한다. 묵시의 말씀이 개인을 살린다.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린다. 말씀 위에 세우므로 회개와 정직한 삶이 이루어진다. 말씀을 사랑하고 붙잡으라. 강단과 예배, 묵상 속에 말씀이 항상 신앙의 기준이 되게 하라. 말씀의 사람이 되면 아마샤 같은 조롱과 도전을 이겨낼 수 있다. 

예레미야도 바스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겨냈다.(렘20:1~6) 다니엘도 사자굴의 공격을 이겨냈다. 예수님도 사탄의 도전을 받았으나 이겨냈다.(마4:1~11) 오늘도 신앙 생활을 하노라면 대적자가 보이지 않게 나타난다. 거짓으로 공격하고 쓰러뜨리려 한다. 사명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공격이 있다. 그때마다 두 번 생각하지 말라. 순간 순간 대적하고 이겨야 한다.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삼킬 자를 찾아 헤매이고 있다. 믿음으로무장하지 못하면 악마의 먹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영의 사람이다. 말씀에 어긋나는 것들이 도전해 올 때 힘이 들고 땀을 흘리는 수고가 있어도 이겨야 한다. 아마샤의 대적은 ① 거짓의 모함의 공격, ② 사명을 무너뜨리는 공격, ③ 말씀을 우습게 보게 하는 공격이었다. 생명을 노리는 공격이 있더라도 이겨야 한다. 이기면 큰 상급이 있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의 약속을 보라.

①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 나무 과실을 주신다. (계2:7)

②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가 없다. (계2:11)

③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신다. (계2:17) 받은 자만 아는 흰 돌이다.

④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새벽별을 주신다. (계2:26, 28)

⑤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신다. (계3:5)

⑥ 이기는 자는 네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 (계3:12)

⑦ 이기는 자는 네가 내 보좌에 함께 있게 하리라. (계3:21)  

우리는 사탄의 공격 속에서 전쟁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 깨어 근신하고 기도하자. 말씀의 검을 들자. 복음으로 무장하자.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또 이기고 최후까지 이기자. 이기는 자에 대한 엄청한 상급을 바라보고 오늘도 똑바로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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