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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으로서의 부활과 십자가 (눅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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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으로서의 부활과 십자가 (눅 11:29~3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 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 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2-23)”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표적을 좋아하는 민족인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표적은 ‘Miraculous Sign’이라 번역했으니 신비한 징조와 같은 기적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Sign을 좋아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헬라 인들은 지혜를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 ‘philosophy’가 헬라어 ‘philo’(사랑) 과 ‘sophia’(지혜)가 합해서 된 말이고 그 뜻은 ‘지혜 사랑’ 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선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지혜라 하였고 이 지혜를 추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철학 하는 사람들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런 삶의 자세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을 가리켜 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고대 헬라 인들은 지혜를 사랑하는 이런 노력으로 인간의 혼을 지고의 선과 아름다움에 이르도록 하고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으로 지극한 선 곧 절대자를 향해 다가가는 방식과는 달리 유대인은 인간의 지혜와 자연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기적들을 체험하며 살아왔던 독특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하는 참 지혜는 사람의 노력으로 터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0)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아름다움과 선을 발견하는 것이 지혜자의 자세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거룩해질 능력이 없고 스스로 선하게 될 능력이 없기에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아침 이슬처럼 사람들 가운데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상상력과 기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한 일하심이 사람들의 세계에 드러날 때 그것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임한 기적,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상 어느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면서 씨를 뿌리고 돌보고 거두지 않고도 200만 명도 더 되는 무리가 매일 아침마다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을 먹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어느 민족이 강과 바다를 육지처럼 마른 땅으로 건너고, 낮에는 뜨거운 해를 가리는 구름이 밤에는 어둠을 밝히는 불기둥이 사람들보다 앞서 움직이며 길을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이적을 체험해보았습니까?   세계 어느 민족이 옛날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대화하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 속에 살아왔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 시대 이후로 15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조상들이 체험하였던 그 신비한 표적을 기억하고 사모하며 모세가 예고하였던 그 선지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시면 자기들도 동일한 표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기다림 속에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함께 갈멜산에 모여 각기 제단을 쌓고 어떤 신이 참 하나님인가 알아보기로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단에 불을 놓지 말고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기도의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 대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실패하였고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로부터 내린 불이 제단을 감싸고 제물을 태우는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표적들을 가까이 체험하며 살던 특별한 민족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 이후 850여 년이 지난 자기들의 시대에도 하늘로부터 이런 불을 내리게 할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께서 등장하여 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고 불구자들을 회복시키며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자 혹시 이 사람이 곧 그 선지자가 아닐까 기대하며 호기심으로 뒤를 따랐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오리라 한 그 엘리야가 아닐까 기대하며 그 불이 내리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이적들을 보이는 예수를 그저 나사렛 변방 출신 괴인으로만 보고 경계하며 혹시 이 사람으로부터 어떤 흠이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회만 노리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귀신이 들려 눈 멀고 벙어리가 된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보고 이 사람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리던 하늘의 표적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그들이 기대하던 방식으로 오신 그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정말로 바알세불을 힘입어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사실을 시험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동안 그들 눈 앞에 보이셨던 온갖 이적들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예수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이심을 부인하기 위하여 자기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보고도 귀신의 왕이 준 능력으로 일한다고 애써 부인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이적 과잉섭취현상이라고 할까요?    너무 빈번하게 보여지는 신비한 이적은 이들에게 더 이상 신비한 이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귀신놀음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사람들이 이적을 많이 체험하면 믿음이 좋아질까?  하는 물음에 자신 있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게 합니다.   그 좋은 예로, 구약의 이스라엘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조상들은 다른 민족은 알지도 듣지도 못했던 신비한 이적들을 수 없이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이 남달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대답은 역시 ‘아니요’였습니다.   그렇게도 신기한 이적들을 많이 체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주변 이방인들의 신을 찾고 따름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수 없이 슬프게 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별로 신뢰할만한 믿음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야말로 이적 불감증 혹은 이적 과다 경험증(?)에 걸려 이적에 대한 감격과 감동이 무디어진 백성들이었습니다. 남들은 맛도 못 보았던 하늘의 만나를 지루하게 여겨 감사할 줄 모르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애굽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그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었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민수기 11장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애굽을 나온 지 2년 2월 20일에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에 머물 때 드디어 사람들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의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마늘과 부추와 파가 그립다.  이제 우리 정력이 다 쇠약해지는데 이 만나 외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며 징징거리고 울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런 부끄러운 기억은 슬며시 뒤로 감추고 자신들만이 특별히 경험했던 그 신비한 하늘의 표적이 다시 임하기를 감히 기대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신 이적은 하늘의 표적이 아니고 무엇이며, 죽어 장사 지내러 나가는 나인 성의 과부 아들을 살리신 것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일은 하늘의 표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이 유대인들은 더 나은 표적, 땀 흘려 일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를 먹는 그런 표적,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표적을 끝없이 요구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께서 하신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처럼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였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혹평을 하셨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그 마음 동기가 불순함을 지적하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표적만 바라보고 거기에 취해 살 것인가 마음이 답답해지신 주님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실 표적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배 속에 삼일 밤낮을 갇혔다가 물고기가 육지로 토해내어 니느웨 성으로 갔습니다.   바다에 던져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나가 멀쩡하게 살아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자 요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몇 일 전에 지중해에서 대풍을 만난 사건과 그 사건의 중심에 요나가 있었고 풍랑을 잠잠케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던 뱃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의 말대로 바다에 던졌더니 신기하게도 풍랑이 멈췄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요나가 살아 돌아와 니느웨 성에서 보게 되었으니 다시 돌아온 요나는 그들에게 놀라운 표적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 세상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그보다 더 큰 하늘의 표적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물고기 배속에서 살아나와 전도한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있는데 요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니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미련한 방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저주스런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그처럼 비참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그 길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답게 위대한 표적을 보이는 분이어야만 나의 구주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의 나무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고상한 삶과 심오한 지혜로 신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헬라인들에게 험악한 죄수의 모습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십자가의 예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한 길을 걸은 사람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기적을 보인다고 해도 이보다 더 능력 있는 표적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알고도 믿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이적을 보인다 해도 그 신비한 이적에 그 순간 감탄하고 즐거울 뿐이지 그것이 그를 구원하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부자 되었고, 사업이 번창하고, 병 고침을 받았으며, 걱정 근심이 없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지고 한편 부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간증 듣는 일은 부담이 없고 즐거우면서 예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라는 말은 왠지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까?    고린도전서 1장25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다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받고 회개하여 구원 얻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선지자의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끌려가 마지못하여 전한 요나의 하룻길 전도는 앗수르의 심장 도시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하나님의 구원이 그 성에 임하였습니다.   그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사양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회개의 복음,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려 죽음의 자리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루셨습니다.

요나의 전도는 이스라엘의 적국 앗수르의 수도로 들어가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세속국가의 상징인 로마로 들어가 사람들을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유대인들처럼 하늘의 만나를 받아 먹었기 때문이 아니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에 능통한 복음 전도자들이 인간 지혜를 토론하던 수준 높은 학당이나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헬라인들이 생각하기에 너무나 미련한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었습니다.   요나보다도 더 큰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던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 자기들과 함께 있었지만 깨닫지 못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시 말씀드리지만 병 고침 받은 것만이 표적이 아닙니다.   어렵던 사업이 회생된 것만이 표적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됨이 기적입니다.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신앙고백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감이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요?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위기에 하늘의 만나가 내리듯 하늘로부터 돈벼락이 떨어지는 표적이 있다면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를까요?   머리를 싸매며 박사논문을 쓰는 중에 어느 날 밤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그 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이 술술 풀려가는 정보와 자료가 정리되어 저절로 프린트되어 있더라는 신기한 표적을 구합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연 그런 일이 생기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수 있다고 할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밖에 또 다른 표적이 있겠습니까?  나 같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선물로 받음이 참 표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신앙을 내 믿음으로 고백하면서 이 신앙고백 속에 표적의 참 증인으로 살아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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