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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부활의 복음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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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부활의 복음 (요 20:19~31)


성도여러분 지난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예배순서 주보에 보면 부활절 제 2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이 아니라 부활절 제 2주입니다. 부활절이 끝나고 다음 주일이 아니라, 부활절이 계속 되어진다는 그런의미의 뜻입니다. 글자 하나만 틀려도 이렇게 의미가 다릅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첫 번째 주일이 아니라 부활절 두 번째 주일, 부활절 제2주입니다. 오늘도 사방에서 주의 전에 모여 함께 예배하는 여러분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하여 처음으로 제자들을 만나 하신 말씀을 생각할 것인데, 그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오늘 나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주중에 노무현 전(前)대통령이 소환되어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속영장이 발부하게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예우하여 불구속 조사를 계속 받게 될지 모르지만, 이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국민들의 입장으로서는 참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주변에서 있는 얘기들을 매스컴을 통해 들어보면, 돈을 주고 돈을 받고 또 돈을 가운데서 전하여 주고하는 노 전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 오랜세월동안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다시 말하면 오래 전부터 주변을 맴돌고 또 기대를 갖고 있던 그런 사람들이고 또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런 사람들인데, 그래서 이제 권력을 쥐게 되니까, 함께 잔치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니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전행을 하였던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고, 또 그들이 그런 일들을 보였던 것이 한 두군데가 아닌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신문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소수의 사람들 외에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불안해서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몸 말.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또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도 뭔가 기대를 하며 예수님의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스승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예수님이 그들의 기대대로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더라면, 예수님이 뭐 500만불 100만불을 받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분명히 돈을 받고 돈의 거래가 있을 수 있고, 권력을 이용해서 어떤 나쁜 일들이 있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것을 다 아셨던 것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권력을 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과 제자들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런 아픔과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인데,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1절의 말씀에 보시면, 그들이 두려워 떨며 함께 모여 문을 꼭 닫고, 잠그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 보면 ‘안식일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장면이 지난주일에 사건이 있었는데, 오늘 19절 말씀에 보시면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 저녁 때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겁이 나서 두려워서, 예를 들면 아주 열심인 유대인들에게 붙들리면 그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런지도 모르고, 베드로가 경험한대로는 아주 작은 계집종 아이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심지어는 그들의 가족들의 안정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움, 두려움에 잠겨있는 이 제자들이 한 군데 모여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시간에, 문도 열리지도 않고 갑자기 그들 방 한 가운데 많이 본 듯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예수님이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죽는 모습을 멀리서도 보았는데, 죽은 그 예수님이 그들의 방 한 가운데 나타나셔서, 놀라운 일입니다. 경악할 일입니다. 어떤 이는 ‘귀신이 아닌가, 귀신이다’ 소리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입을 틀어막고 이 얘기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 자신들의 안전이 위협을 받을까 걱정한 사람도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이런일이 바로 벌어졌습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수님이 아주 자상한 얼굴로 제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째려보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쳐다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예수님을 배신한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한마디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처음으로 하신 말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짠~ 나타나서 그 많은 말들 중에, 또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나무라시고 책망하시는 것이 제일 먼저일수 있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향하여, ‘평안이 있을지어다. 평안하라.’ 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평안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제가 생각해보니,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꼭 있어야 할 첫 번째의 것이 그들에게 평안한 마음, 강건한 마음, 그게 평강이거든요. 평화롭고 강건하게, 평강이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첫 번째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시간 우리에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주일에 여러분, 나에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주님이 내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내게 가장 필요한 제일 필요한 것을 내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부활하시어 첫 번째로 만나시어 여러분에게 그것을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전히 불안한 사람, 오늘 예배를 드리며 모이고 있는 우리에게도 세상의 근심과 걱정으로 두려워하며 걱정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역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또 어떤이들에게 병약하여서 늘 걱정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할지어다. 건강할지어다’ 말씀하실 줄로 믿습니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길 원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하여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말씀하실 것입니다. ‘부활한 나를 바라보아라, 부활을 통하여 너희에게 소망이 있을지어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 주님 만나시고 그 주님이 채워주시는 내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채움받아 오늘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복된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땅이 꺼지라 한 숨을 쉬며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이, 20절에 보시면 이제 처음에는 두렵고 걱정스러워 벌벌 떨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경악하고 놀랍니다. 그리고는 이제 20절에 보면,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어떻게 하였다.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하였다. 이제 마음이 조금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이제 평안하게 되고, 그리고 주님이 살았구나 하며, 기쁨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고, 21절에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십니다. 다소 의외의 말씀입니다. 

이제 평안해지고, 기쁨이 생길랑 말랑 하려는 사람들에게 곧장 어디론가 보내겠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겨우 놀란 가슴을 안정시키고 평안하고 기쁘기 시작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냥 두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가라. 이 세상이란 험하고 위험하고 그리고 많은 고난이 있는 곳인데 거기로 보내신다. 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평안함 속에 퍼질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저 평안하기만을 원하는 인간적인 본능 그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약간 헷갈립니다. 저는 이 말씀, 아니 왜 금방 우리를 세상으로 이 어렵고 힘든 세상으로 보내시려나 명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키울 때, 아이들이 예를 들면, 병이 듭니다. 또 사고를 쳐서 다칩니다. 그럴 때 부모가 생각하기를 ‘건강이 제일이다’ 또 TV나 주변의 사람들의 아이들이 병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어보면, 또 괴상한 병에 고생하는 그런 얘기를 TV에서 보면, 그래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것이다. 아이들이 병들면, 병원에 입원하면 그래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그게 제일이다. 아이들에게 그저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며칠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 그리고 며칠 지나면, 공부해라, 공부해라 합니다. 아이들이 헷갈립니다. 아니 며칠전에는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그렇게 말하던 엄마가 공부해라. 금방 스트레스를 줍니다. 아빠 엄마가 이중적이다. 그렇게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건강하기만 해라. 그것도 진심입니다. 그럼 건강하기만 하면 제일인가. 생각해보면, 건강한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건 부모로서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한 몸으로 또 공부를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중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심정도 꼭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안이고 평강이기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거기에 평안하게 너부러져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일을 하시기 원하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은 정말 그들을 사랑하시며,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 같은 교회 좋지요. 여기에 오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고, 밥 그냥 주지, 커피 그냥 주지, 뭐 욕하는 사람없지, 다 친절하게 인사하고, 좋은 사람만 있지, 좋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에 계속 너부러져 있기만을 바라시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힘을 충족받아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 주님이 두 번째 하시는 말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요. 그 다음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고 성령을 받으라’ 왜 숨을 내쉬었느냐,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 나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 나의 한계, 우리의 한계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걱정스럽고 한심스러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한 숨을 쉬면서 그런데 성경에 예수님이 한숨을 쉬셨다 그러기 곤란하잖아요.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연약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냥 나만 보내지 아니하시고 우리 홀로 보내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받아라. 성령과 함께 우리를 세상에 보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신비한 주님의 사랑이,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 험한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상이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는 줄 아시는 주님께서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그냥 혼자 보내지 아니하시고, 숨을 내쉬고, 한숨을 내쉬며 성령을 함께 보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손을 붙들고 세상을 향하여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이 우리와 함께 동행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세상을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보내지 아니하시고 성령과 함께 보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요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십니다. 이것 정말 난해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히 누구의 죄를 용서하고 뭐 어쩌고 할 수 있는 사람이냐 말이에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그런 입장에 있느냐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생전에 비슷한 말씀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멋있는 고백을 하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너무 흐믓해 하셔서 그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시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울것이다. 말씀하시면서 그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열쇠를 주노라.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겠습니다만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선포적인 말씀을 하신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던 없던, 이 말씀을 받던 안 받던 상관 없이 주님께서 선포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너희가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다시 말하면, 너희가 이제 세상을 향하여 가는데 세상에 나아가서 이제는 용서의 주체로, 용서의 주체로 세상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용서를 구걸하지도 말고, 세상에서 끌려 다니지도 말고, 이제는 너희가 세상을 향하여 용서하고, 세상을 향하여 사랑하고, 세상을 향하여 너희가 손을 먼저 내미는 주체적 입장에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하여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의 죄를 용서할만한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마는 이제부터는 우리가 변화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여 갈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들이 세상을 향하여 구걸하고 세상에 끌려다니는 그리고 세상의 눈치를 바라보며 비겁하게 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너희가 세상을 향하여 용서하는 주체가 되어서 세상을 향하여 나가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제자들 여전히 잘 이해할 수 없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조금씩 지나가면서 그들의 마음속에 아마 미동이 생겼을런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은 3년전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지금은 고기를 낚는 어부이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 생각 났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자기들을 향하여 기대하시는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놀라운 뜻이 있었음을 조금씩 조금씩 회상하며 그리고 자기들의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 가는 그런 놀라운 일이 분명히 생겼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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