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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인도하심 (수 8: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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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하심 (수 8:30~35)


어떤 사람이 고객과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미국 아틀랜틱 시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조금남아서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자료를 보면서 피곤을 씻기 위해서 위스키를 한 잔 시켜서 마셨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서려고 하는 찰라에 정말 눈부신 미녀한사람이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면서 이곳에 처음 온 손님에게 자기가 술 한 잔 사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미녀의 제안에 놀랐지만 그래도 영화배우 같은 이 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온통 이 미녀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이 미녀는 바에 가서 술잔 두 개를 들고 왔습니다. 미녀의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면서 잔을 비웠습니다. 이후 이 사람은 다음 상황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어리둥절한 상태로 눈을 떴을 때 그는 호텔 욕조 안에 누워있었고 욕조에는 차가운 얼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의아해하며 정신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러다 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움직이지 말 것 ! 911에 전화하시오’ 욕조 옆 작은 탁자위에 휴대전화가 놓여있었습니다. 그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911을 눌렀습니다. 얼음 때문인지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환원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꽤 익숙한 것 같았습니다.

교환원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등 뒤로 손을 뻗어보세요 천천히 조심스럽게요. 혹시 허리에서 튜브가 나와 있나요?” 이 사람은 불안감에 떨며 등 뒤를 더듬거렸습니다. 튜브가 만져졌습니다. 교환원이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고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선생님은 어제 밤 신장을 도둑맞으신 것입니다. 요즘 이 도시에서 장기 절도 조직이 활동 중인데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그 피해를 입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즉시 응급요원을 보내드릴테니 그 사람들이 도착할 때 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 이야기는 미국에 칩 히스와 댄 히스라는 사람이 쓴 ‘Made to Stick : Why some ideas survive and others die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15년 전 쯤 미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도시의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낯선 곳에서 여인이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유혹할 때, 무엇보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된 그 환경에서 거절 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장 원했고 또 필요한 부분으로 접근해 올 때면 구태여 싫다고 말하면서 멀리할 사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신장과 같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요즘 신문에 오르내리는 정치인들이 돈 문제로 구속되는 것을 보면 이 분들이 우리만큼 생각할 줄 모르고 또 위험부담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유지되는 길을 아는 사람들이 저렇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것은 아마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로 인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빠져 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됨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어쩌면 아무런 의식 없이 선택하며 살아왔던, 그것 때문에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오늘 이 시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은 모든 것이 다 있는데도 평안과 만족이 없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도 내 마음에 무엇인가 공허하고 때로는 허무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갑자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우리를 휩싸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역시 아간, 한 사람으로 탐욕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가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간 한사람의 범죄한 것을 이토록 심각하게 생각하며 진노하신 것입니까? 이 아간의 범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처럼 큰 화근을 불러들일 줄 꿈에도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보신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첫 번째 관문이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공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이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때 백성들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친김에 아이 성까지 치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음의 정복지였던 아이 성이 문제였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 아주 작은 성입니다. 주민 수도 남녀 모두 합쳐서 1만 2천명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아이 성, 정복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2-3절 보면, 3천명의 군사를 보냈는데 쫓겨 옵니다. 그리고 전사자 36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얼어붙었다는 뜻입니다. 뜻밖의 패배 속에서 자신들을 돌아봅니다. 물론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문제가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전리품을 숨긴 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진노하신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저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 40년을 보내는 동안 광야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200만이 다되는 백성들이 먹고 마시고 거주하는 일상의 삶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에 도착하자 백성들은 소유에 대한 애정이 ?트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간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병든 아간의 말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때 그들의 현실에 가장 민감하게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소유에 대한 문제입니다. 물질, 돈에 대한 문제입니다. 가나안에 사는 이방인들은 철저하게 물질만능에 젖어사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배의 대상은 물질이다 보니까 그 물질을 풍요롭게 해 줄수 있다고 신을 찾게 되었고, 그래서 바알이라든지 아스다롯 같은 자신들이 만든 신에게 경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려하신 것입니다. 사실 아간도 자신이 한 행동이 이렇게까지 심각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주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면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집니다. 눅12장 15절을 보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생명이란 의미의 ‘조에’라고 하는 단어는 생물학적인 생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삶의 질을 의미합니다. 즉, 살아갈 때 갖는 보람과 의미를 함께 이야기 합니다. 참된 기쁨은 소유에 있지 않기 때문에 소유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탐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유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높을 깃발로 생각을 합니다. 또 안전을 지켜주는 확실한 방패막이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생명도 나의 건강까지도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돈의 위세 앞에서는 법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삽니다. 심지어 돈 앞에서 교회마저 무릎을 꿇는 비참한 현실을 우리가 지켜보고 삽니다.

탐욕에 젖은 아간을 처리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느꼈을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돌로 아골골짜기에서 아간의 가족에게 던집니다. 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다시는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간이라는 인물이 제거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셨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이 성 싸움의 패배를 극복하고 다시 대반격에 성공한 여호수아는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에발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갔습니다. 적군의 주둔지도 아닌, 전쟁터도 아닌 곳으로 전 민족을 이동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상당히 뜻밖의 결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속전속결이 생명인 전쟁터에서 승기를 잡은 이스라엘이 할 일을 계속해서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들을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 다음 성들을 공략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계곡지대를 거쳐 온 백성을 이동시키는 것은 전술적으로는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9:1-2절에 보면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전하고 있습니다. 만약 가나안의 모든 족속들이 작정하고 연합군을 결성해서 포위, 매복,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섬멸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겜으로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여호수아는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30-31절에 보십시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이처럼 가나안 정복 중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배를 드리는 여호수아의 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전쟁을 멈추고,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둔 채 이스라엘 전 민족이 에발 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장면을 주목하셔야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자는 세상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활동 중 가장 위대한 활동(the greatest activity)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인간 차원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신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합니다. 반대로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그런데 여기 31절에 에발 산에 제단을 쌓되 특별히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만 단을 쌓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 그냥 돌로 된 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당시 가나안 족속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예배드리기 위해 만든 단은 사람의 기교로 잘 다듬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 제단을 원하셨습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은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순수함이 상실 된 예배가운데 마음이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겉모양은 갖추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예배의 모습을 사29:13에서는 단적으로 이렇게 지적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성경을 척척 찾고, 기도도 잘 하고, 찬송 시간에 잘 따라 부르고, 설교 시간에 정숙하게 앉아 있고, ... 그러나 몸은 와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데 가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없이 기계적으로 건성으로 예배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신앙은 마음속에 있지만 행실로 나타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 아닙니까?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귀히 여기지도 않고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식들은 더했습니다. 그들 역시 제사장직을 세습했지만, 제사를 훼방합니다. 제물을 가로채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범하고 ...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삼상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이 경멸하시면 이야기가 끝난 것이죠. 그런 인생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는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함으로 나라도 망하고, 온 가문이 멸절됩니다.

여러분, 예배에 실패하는 게 이렇게 심각한 겁니다. 우리의 예배 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는 죽은 예배는 아닌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모습이 있다면 빨리 시정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흔히 성도들이 에배 시간에 범하기 쉬운 실수들을 정리한 겁니다. 설교시간에 강단 멀거니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보고 있는데 생각은 딴 데 출장 가 있는 경우), 주보로 밑줄 그으며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멘파, 수시로 시계 보는 안절부절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예배 후 할 일만 생각하는 염려파, 설교 시간이 혼자 성경을 읽는 나홀로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금붕어파, 기도 시간에 살짝 잠을 보충하는 기회주의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 거리는 경비파, 한 가지라도 해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집중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순정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담긴 향기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32절에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지금 여호수아는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뒤에는 율법의 말씀을 돌 위에 기록했습니다. 당시, 고대 중동 지역에서는 왕이 큰 돌 위에 석고를 바르고 자기의 군사적 위업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축하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애굽의 피라미드도 왕들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가장 강한 성들을 무너뜨린 이스라엘군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는 자신들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적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미 시작한 가나안 정복 전쟁 와중에서 모든 백성을 모아 놓고 돌에다 하나님 말씀을 새겼습니다. 돌에다 백성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말씀을 새기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전체를 돌에다 옮겨 적었으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이란 책을 보면, 멕시코시티의 대형 시장 한 구석에서 양파를 팔고 있던 한 인디언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양파 한 줄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10센트라고 말했습니다. 가만 보니, 노인이 내놓은 양파는 모두 스무 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인이 스무 줄 다 사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대량 구입하면 어느 정도 깎아 줄 수 있느냐는 서구식 경제 개념으로 물은 것인데, 이에 대한 노인의 대답은 뜻밖에도 다 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한꺼번에 다 팔아 버리면 하루 종일 여기서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좋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하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오.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사에 대해 얘기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것을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그런데 한꺼번에 다 몽땅 팔면 돈은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이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피드와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함부로 처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좀 더 잘 살고 편하게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삭막하고 메마르며 공허한 느낌들을 가슴속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외적인 삶이 아무리 화려해도 영혼 깊은 곳에 이런 황량함이 커져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 보세요. 지금 주변에서는 가나안의 왕들이 연합전선을 펴서 이스라엘과 전젱을 치루려고 일전을 불사합니다. 그런데 그 위험한 현장에서 여호수아는 예배를 드리고 지금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돌에다 새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도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어도 항상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는 작업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3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는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사람은 어둠 속을 걸어갈 때도 그 말씀이 ‘발에 등불이 되어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습니까?

지금 에발산에서 정으로 돌을 깨며 새기는 그 과정을 백성들이 침묵하며 보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말씀을 들려 줄 때 우리 심령에 이 말씀을 붙잡고 잘 박힌 못처럼 내 심령에 새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각성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서 비추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교만과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간으로 인하여 깨어진 계약을 회복하시면서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그 백성에게 동시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계속하여 말씀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정죄를 피하기 위해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값없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그분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약한 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우리의 그런 부족한 모습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에발산에 제단을 세워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나아와 다시한번 그 사랑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결단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오늘 드려지는 이 예배가 진정 나의 때 묻은 일상의 삶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영적 투석을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피를 더럽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투석을 통해 걸러내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이 깊은 은혜를 누려야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약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저를 회복시켜 주시고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기도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치유하시고 우리 안에 새 영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능력 가운데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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