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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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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9)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많은 병자들을 낫게 하자 5,000여명정도의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피곤하고 배가 고프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요 6:5)고 물으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 빌립이 말하기를 모인 각 사람이 조금씩만 먹어도 200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 액수는 노동자의 8개월의 임금에 해당됩니다. 제자 누구도 여기 모인 많은 사람에게 식사 한끼를 제공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도시락에서 발견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복기도를 한 후에 나눠 주었는데, 성경 말씀은 기록하기를 모든 사람들이 원대로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들을 모으니 12 바구니에 찰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보고는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세상에 오시는 선지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열광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 사람들의 관심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설교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기적이 주는 교훈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무이한 ‘생명의 떡’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아가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영원한 생명의 근원으로써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됨을 의미하는 곳입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군중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말씀을 재미있게 들으며, 떡과 생선을 먹고 즐거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깊이 있게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광하던 사람들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그 곳을 떠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66절). 

제자들도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왜 마음에 걸림이 되는가?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않고 육적으로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벧전 2:7-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그렇게 재미가 없느냐?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가 이해하는 예수님이 설교가 참으로 명설교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능력있는 설교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무리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였을까요? 그리고 설교에 대하여 거부적인 의사를 보였을까요? 여기에는 무엇인가 잘못된 깊은 오해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자신들의 영웅으로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땅의 양식만 주는 분으로 생각하였지 하늘의 양식 즉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 ‘믿는 것’ 외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니, 그들은 즉각적으로 반응 보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들은 영생을 얻는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6:29)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흔히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교회를 나가게 되면 제약받은 것이나 해야 될 의무가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신앙심이 깊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물론 외적으로 보면 그런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를 믿는 길뿐이며, 다른 인간적인 방법은 전혀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또는 심지어 헌신적으로 열심히 믿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고 스스로 바르게 살려고 혹은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과 도덕적 행위로는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 기적의 목적

성경에는 여러 가지의 ‘기적’들이 나옵니다.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것은 히랍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sign’입니다. 즉 암시하는 바가 있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적들은 많은 부분에서 그 기적적인 사건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의도하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놀랄만한 사건들은 보여주십니다. 그런 의미하는 암시가 있을 때는 그것을 성경에는 ‘표적’이라고 구분해 씁니다.

이 표적은 당장의 어떤 이익이나 유익을 주기보다는 더 나아가 참된 헌신된 삶과 자기 희생에로의 발전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을 받은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고백해야할 말씀인 것입니다. 

(요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성경에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자주 등장시키지만 계속적으로 그런 일만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종교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참다운 가치와 바른 목적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고상한 목적을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신비한 일들을 나타내지만 그것을 본질적으로 소개하거나 계속적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신아생활을 하다가 병이 낫거나 어떤 일에 신비한 경험하거나 또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면 자칫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기 쉽습니다. 

때로는 목회자도 교인들 앞에서 사람들이 더 잘 믿도록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뭔가 보여 주고 화끈한 것을 내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니 교인들 중에서도 당연히 이런 쪽으로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더 자극적이고 신비한 어떤 기적을 보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오히려 생명의 떡이나 천국 대한 말씀을 하시게 되니 사람들에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성경에는 보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당시에 이방인들이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라는 신에 미혹이 되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사람이 만든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큰 신상 앞에서 무언가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자기 충족 혹은 가시적 매력에 빠졌던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 “나에게 어떤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는 신비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계속 그런 식으로 신앙적 어떤 보이는 것의 추구만을 요구한다면, 그런 종교는 사람을 무속이나, 광신자, 혹은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학문이나 노력, 희생이나 인내, 연구와 문화개발, 과학이나 예술도 다 필요 없을 것입니다. 무속신앙이나 사이비 신앙은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을 것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더 훌륭한 삶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나의 만족 나만의 이익에 집착하게 되는 이기적이고 반윤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들은 구원이나 영생보다는 자기만족 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참 믿음의 중요성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는 그를 믿음으로 현세와 내세의 죄와 불행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안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은 어떤 지식을 얻는 것이나 고상한 교양만을 얻는 것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내 인생의 바른 좌표를 찾는 일이요, 궁극적 행복과 바른 삶을 사는 일이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나와 이웃을 위한 행복을 말합니다. 

혹시 이 예배를 통하여 나의 어떤 욕심이나 자기의 희망을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무엇을 위하여 우리 그런 것이 성취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출세해서 무엇을 하려고,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건강해서 어떤 삶을 살려고 하는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며, 왜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을 분명히 안다면 많은 무리들과 의심하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상하고 영원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하신 말씀은 너희가 여기 온 것은, 예수님 앞에 온 것이 고작 기적이나 바라고 행운이나 얻으려고 운수나 대통하려고 온 정도 뿐이냐? 의 의미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당장 부담이 되거나 내 삶에 당장 어떤 유익이 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말에 대해서는 지루함을 느낍니다. 더구나 참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게 되면 바울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배척하고 쉽게 떠나게 됩니다. 

인류는 그간에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여 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인간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변화 무상한 사회 속에서 불확성의 미래를 살아가기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힘, 다른 세계에서 오는 어떤 가능성, 인간 내면이 신비한 힘, 신에 대한 의존심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매일의 운세, 도심 한가운데 점집, 운세자판기, 일본에서는 부적 자판기가 나와 있습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오늘 우리 사회에도 갈수록 불안한 삶을 달래기 위하여 점점 더 새로운 길을 사람들은 모색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시원하고 확실한 것이 오늘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 믿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미신과 무속, 잘못된 신앙으로 더 빠져들게 되어 결국에는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집트 군이 느비아 지방을 정복할 때 1연대가 사막을 행진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떨어져 위기를 맞아하였을 때 그들을 멀리 호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짜 호수가 아니라 사막에서 일어난다는 신기루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로 가는 것을 안내자가 반대했지만 그들은 안내자를 살해해 버리고 계속 전진했으며 결국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사막의 해골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 사막에서는 신기루 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고독, 실망, 아픔 등 갈증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일시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들을 찾게 되나 궁극적인 해결이 없어 허탈에 빠지는 것이 인간들의 흔한 경험인 것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결 론

결국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종국에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실패, 좌절에서 벗어나기를 위해서 어느 신적 존재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한편 성공, 출세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무종교, 무신앙의 중립 상태는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다가 엉뚱한 데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다급해지면 교회로 오라! 바른 선택은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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