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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오심의 약속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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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심의 약속 (행 1:6~11)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려지신 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약속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약속이 몇 가지 있는데 장차 예수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큰 약속입니다. 성경은 예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시고 성경은 예수를 중심하여 말씀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의 약속은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최대의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할 것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선포하신 내용이 천국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시며 하나님을 소개하고 진리와 구원과 죄 사함의 길을 전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시하시고 잘 죽는 법을 말씀하셨고 종말을 말씀하시고 섬김의 삶과 승리하는 삶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내용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그 예수님은 고난의 죽음을 죽을 것임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성경의 약속대로 예수님은 마침내 진정한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예수께는 아픔이었지만 우리에게 은총이고 복이고 은혜였습니다. 그가 찔림을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고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수모를 당함으로 우리가 영광을 얻었습니다. 고로 예수께서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복중의 복이고 은혜중의 은혜이고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그의 고난과 죽음은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습니다. 그가 무덤에 묻힌 것도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죽음과 고난과 무덤도 나를 위한 아픔이었습니다. 그가 아픔으로 내가 무서운 아픔으로부터 나음을 받았고 그가 죽음으로 내가 죽을 것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고난 뒤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도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승리했으니 너희도 승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선물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캄캄하고 어둑하고 침침하던 무소망의 세상에 일대 새로운 길을 내 놓은 은혜이고 선물입니다. 그가 부활했으니 우리들도 줄지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승리했으니 우리들도 주 안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무덤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으니 우리들도 무덤에 갇히거나 무덤 속에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광의 모습으로 변모했으니 장차 우리들도 영광스럽게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일”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부활하신 것을 세상에 알리시고 마침내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오셨던 자리인 하나님의 우편자리로 다시 복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한마디로 말하면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승천하시면서 예수님은 몇 가지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남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세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마가복음16장15절에서 말씀하신 “복음을 전파하라“는 당부입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 본 내용들을 세상에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본 신비한 내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오시리라고 예언되었던 내용 그대로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천국에 대해서 비밀을 말씀하셨고 사역하시는 동안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 병자들을 고치신 내용들,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내용들, 물위를 걸으신 일, 오병이어 사건, 죽은 자를 살리신 일 등 많은 신비스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시고 땅에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일 등 그런 내용들을 전하고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용이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행한 모든 일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전도요 설교요 선포요 메시지 선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당부하신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들이 체험하고 본 그대로를 돌아다니며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오늘 읽은 본문 8절에 나와 있는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순교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증인”이라는 말은 영어의 순교자를 뜻하는 마터(martyr)라는 뜻입니다. 즉 영어의 순교자라는 뜻의 마터는 헬라어의 순교자라는 뜻의 마르튀스(malt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앞으로 세상에 나가서 증거하되 순교자적 자세를 가지고 들은 것과 본 것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주석자는 이 뜻을 “장차 너희는 순교자가 될 것”이라는 예고하신 말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탁을 명령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미래시제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로 제자들은 한결같이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애급에서 칼 맞아 순교했고 마가는 알렉산드리아 근처에서 개 끌려 다니듯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누가는 희랍의 한 섬에서 교수형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전해지는 대로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안드레는 십자가형을 도마는 인도에서 칼 맞고 죽임당하고 바울도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고 미래시제로 말씀한 그대로 증인의 삶을 철저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라는 말씀대로 복음전파의 경로를 먼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 다음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11:18) 온 세계로 확장하여 갔습니다(11:19-28:31). 그리고 누가복음을 보면 그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로마까지 퍼져나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순교자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중심과 자존심과 고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와 화해의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때 복음이 세계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한계는 중심도 자존심도 용서와 화해의 능력도 발휘하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들이 보완할 일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코리텐 붐이라는 여자 전도자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유대인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강제수용소에 갇혀있는 동안 독일인 간수로부터 악랄하게도 추운 겨울날 발가벗겨져 모욕을 당하고 심한 고통으로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종전 후 그는 전도자가 되어 원수의 나라 독일로 가서 시골마을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집회 후 어느 허름한 남자가 다가오는데 그가 그를 모욕하던 그 간수였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우리는 당신의 적이었는데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고 복음을 전합니까, 

오늘 너무 감격하여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는 손간 이번에는 사랑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맺혀있던 응어리들이 풀리고 평화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우리들이 증인의 삶을 살아갈 대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해서 수당이 주어지고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증인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이 벅찬 감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오늘 세계화가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메시지는 “너희가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1:11)”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두 번 오십니다. 한번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말구유로 오신 오심입니다. 이 오심을 ”초림“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초림을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1절의 내용을 보면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제자들에게 천사가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올려 가신 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부활하시기 위함이었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것은 다시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앞으로 언제인가 알 수는 없지만 다시 재림하여 세상에 오실 것만은 분명합니다. 주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긴장이 주어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태어나시리라는 약속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라라는 약속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를 증거한 책이 신약성경 4복음서 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예수께서 재림하리라는 약속을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이 혼인잔치를 배설하고 손님들을 청하니까 다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거리로 나아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마침내 임금이 잔치자리에 나와 보니 온 사람들이 예복을 입지 않고 그냥 와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다 내 쫒으라.”해서 다 쫓김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여기 예복은 영적 준비를 말합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는 기름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재림 때 구원받는 자를 엄선하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 24장에는 두 사람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한사람은 들림 받고 또 한사람은 버려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두 여자가 한자리에서 맷돌질을 하다가 하나는 들림 받고 또 하나는 버려짐을 받으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있으라 언제 주께서 재림하실지 모르느니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34절에서는 “허리띠를 띠고 등불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듯이 주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22장20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사도요한이 응답하기를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화답하는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여 원위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가시면서 약속하시기를 “내가 속히 다시 오리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약속이 얼마 있으면 오신다는 말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을 잊어버리고 부지런히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집가고 장가갈 시간이 없으니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역설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오늘까지 오시지 않고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독신으로 다급한 심정으로 전도를 했고 곧 오실 주님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은 언젠가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관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관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바로 그 심판을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이 재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심판의 의미도 알아야 합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신다.” 

그 말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심판의 약속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심판의 모든 권한을 주님께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늘 준비하며 그 심판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살면 삶이 경건해집니다. 엄숙해집니다. 삶에 질서가 생깁니다. 타락을 막고 방종을 막고 불의 행함을 막고 무질서한 삶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삶은 천년 살 것 같이 계획하여 살고 종말은 내일 이루어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살라”고 충고했습니다. 우리는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장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실직고 하고 숨김없이 나의 삶의 내용을 직고해야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말은 곧 심판을 하신다는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원래 에덴동산이었습니다. 낙원이었다는 말입니다. 낙원은 완전조화의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조화가 깨지고 부조화의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독이 생기고 파괴와 재앙과 지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질서가 깨지고 조화가 깨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조화가 깨진 이 세상이 다시 회복되려면 창조주께서 세상에 다시 오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세상의 심판을 의미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3장13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21장1-2절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기저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도성”, “새 장막”, “새 생명나무”, “생명 강”이라는 말들이 나옵니다. 그 말은 모두 새롭게 회복된 재창조된 세계를 말합니다. 새로운 창조는 처음 창조의 것들이 모두 사라짐을 전제합니다. 그때 이 세상의 체질이 불에 녹아지고(벧후3:10) 만든 것들이 다 변동되고(히 12:27) 처음 것들이 다 사라졌다(계21:1)고 했습니다. 그것이 새로 창조되고 회복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다 변화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고린도전서15장50-52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가 다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 고 했고 고린도후서3장18절을 보면 “우리가 ..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에게 약속된 신비한 내용들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은 곧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다릅니다. 인간의 약속은 100%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약속하신대로 다 이루셨습니다. 

 세상에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고난 받으리라고 하신 그대로,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재림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재림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약속하신 그대로 무섭게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망가진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켜 이 땅에 회복된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오신 것처럼 장차 오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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