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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애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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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본문/렘애 3:19-26 

  

4월 하순, 봄도 거의 다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은 우리가 노래를 통해 잘 아는 봄의 시 하나를 읽어 드립니다. <이은상> 선생님이 쓰신 <봄 처녀 제 오시네>입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 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나중에 <홍난파> 선생님께서 곡을 붙여 유명한 가곡이 되었습니다. 이 봄의 노래는 얼어붙은 땅이 녹고, 꽃피는 계절이 오는 것처럼 삶에 지치고 힘들었던 이들에게 소망을 선물합니다. 이런 시와 노래를 접하면 얼굴이 밝아지고 웃음을 머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는 소망이 여인의 부드러운 웃음처럼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비장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장한 소망의 이야기 중 하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와신이란 <땔나무 위에 눕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나뭇가지 위에 누워 자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배기고 불편하겠습니까? 깊은 잠을 잘 수 없지요. 또 <상담>이란 <쓸개를 핥아 맛을 본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쓰겠습니까? 중국 춘추 시대에 오 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월 나라의 왕 구천(句踐)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였고, 결국은 목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패배한 월 나라의 왕 구천이 곰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부차와 구천은 비장한 각오로, 이를 깨물면서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이들이 품은 소망은 봄처녀의 웃음처럼 찾아오는 부드러운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도 쓸개를 핥는 고통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9절을 보세요.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라고 합니다. 쑥은 본래 쓴 것입니다. 그리고 담즙은 쓸개즙이지요. 히브리어로 <로쉬>라고 하는데, 담즙이란 뜻 외에도 독약이란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독약이라도 마시는 것처럼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분이 누구일까요? 그 분은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지금 쓸개즙을 핥고, 쑥을 씹는 것처럼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쓸개즙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조국의 멸망이 가져온 고통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 제13년부터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깊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고, 점점 타락해갔습니다. 결국 주전 586년 유다는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을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자기 눈으로 바라보아야 했으며, 자신은 두 눈이 뽑힌 채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는 40여 년을 선지자로 살면서 그 모든 과정을 피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고통과 그 고통으로 인한 절망의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들은 완전히 좌절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므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다시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절망은 인생이란 자동차의 후진기어와 같습니다. 절망하면 인생은 뒤로 물러갑니다. 

우리들 중에도 여러 가지 힘든 일로 인해 마음이 낙심되어 숨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헛 살아온 것 같이 공허합니다.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우리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길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결코 담즙의 쓴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눈물 속에서 기쁨을 말씀하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21절을 다같이 읽어보실까요?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아멘. 

무슨 말씀일까요? 쑥과 담즙 같은 고초와 재난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만나면 잊으려고 애를 씁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라도 잊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어떤 이는 취하여 잊기 위해 술을 찾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런 고통을 인생 밖으로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고난과 질고를 마음에 담아두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어머니가 주시는 떡만 먹는 게 아니라, 때로는 채찍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는 종아리를 맞는다고 해서 집을 뛰쳐나가지 않습니다. 집을 뛰쳐나가는 순간, 이미 그 아이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닙니다. 종아리를 맞으며 울더라도 어머니 앞에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마음에 담아둔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놀라운 소망이었습니다.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그 고통과 괴로움이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애가는 여기서 위대한 반전을 보여줍니다. 쑥과 담즙을 먹는 고통이 소망으로 바뀝니다. 오늘의 담즙은 내일에 대한 놀라운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멸망하는 백성들에게, 그래서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소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고 살길 원합니다. 오늘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 소망을 이루실 것입니다. 

후에 유다 백성들은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은 아름답게 실현되었습니다. 

소망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지만, 절망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이런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산간 마을 초가집 처마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고드름은 슬퍼서 울고 있었습니다. 곧 날이 따뜻해지면 녹아 버릴 테니까요. 그런데 마당에 있는 눈사람은 웃고만 있었습니다. 고드름이 물었습니다. <넌 녹아서 사라지는 것이 두렵지 않니?> 눈사람이 말했습니다. <난 녹아서 물이 되어 산과 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꽃들을 잠에서 깨울 테야. 그리고 계속 노력해서 바다로 가려고 해, 바다는 우리의 고향이거든, 그것이 뭐가 두렵겠니?> 그 후로도 고드름은 걱정으로 점점 야위어졌고,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러나 눈사람은 소망으로 웃고 지내는 덕택에 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소망을 가지면 푸근해집니다. 웃게 됩니다. 오늘의 절망을 넘어선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절망하면 고드름처럼 끝이 뾰족하게 됩니다. 인생이 뾰족해지고, 마음은 날카로워집니다. 남도 찌르고 자신도 찔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치 쉬츠> 목사님은 <소망>이란 책에서 어떤 사람들이 소망을 잃은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깊은 상처가 느껴진다면, 그리고 열정이 사그라들고 무관심과 냉대만이 마음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의 포로가 된 증거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공허감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그 또한 절망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절망의 사람인가, 소망의 사람인가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소망의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소망은 어디서 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얻고자 하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십 년을 기다려도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낙심되었습니다. 잠언 13장 12절을 보면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고 했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마음이 상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아브라함이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소망이 좌절될 때 인간적으로 해결한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좌절된 소망 앞에서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하갈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억지로 준비한 것은 참 소망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마엘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정과 가족들의 마음은 더 깊은 상처를 받았고,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더 오래 기다린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몸을 통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고, 반드시 성취하는 분임을 배우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아무런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은 다윗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편 39편 7절을 보면 그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이 때 다윗은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의원들, 좋은 약들을 동원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부귀와 권력도,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도 참 소망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그 순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멸망한 마당에 예레미야의 소망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근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22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할렐루야! <지금 이렇게 채찍을 맞아 멸망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크시기 때문에 진멸되지 않고, 살아남아 반드시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이게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참 소망이 되십니다. 히브리어에서 소망이라고 쓰이는 단어들 중에 <티크바>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콰바>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콰바>란 <서로 꼬아 한데 연결시키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소망이란 멀리 있는 것들을 서로 꼬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소망이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꼬아져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자궁 속 태아가 모체와 연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태아는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 연결될 때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꼬아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을 보면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이 때 <앙망한다>는 단어가 바로 <티크바>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 저와 하나님 아버지가 뗄 수 없도록, 그 무엇도 저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마치 서로 꼬아 하나가 되게 하듯, 저로 하여금 하나님께 붙어 있게 해 주세요>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절망한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절망은 우리를 과거로 후퇴하게 합니다. 그러나 소망은 우리를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바닷가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뒤로 물러가도 좋다고 하신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두 미래 시제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그 대표적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 될 것이다, 이건 미래입니다. 소망의 사람은 언제나 내일을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미술가에게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린 그림 가운데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요 다음에 그릴 그림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난 세월에 매여 살지 않고, 앞으로 자신이 더 훌륭하게 할 수 있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가운데 생명을 선포하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부활은 절대 절망에 빠진 인생들에게 참 소망을 선포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제자들은 그 후로 소망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늘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에게도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몇 가지 말씀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을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에서는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성도들은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소망을 일으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하는 극도의 시련 중에서도 아침에 눈물로 눈을 뜨지 않고 설레는 가슴으로 눈을 떴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셔서 반드시 인자와 긍휼을 끝까지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레미야로 하여금 울면서도 웃게 한 힘이었습니다.

숱한 전쟁과 정치적 난관을 헤쳐 나간 다윗도 <내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고백했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승리했음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촉구합니다. 24절 이하를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아멘.

날마다 죽음마저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믿음의 전진을 계속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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