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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능력있는 믿음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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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믿음 (막 9:14∼29)


<논어>에 나오는 말 중에<족식족병 민신지의(足食足兵 民信之矣)>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인[공자]에게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자[공자]는“나라가 바로 설려면 식량을 풍족히 하며 군비를 충족하게 하여 백성을 믿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그 세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가 빠져야 한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그럼 군비를 빼야지!”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중에 또 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그럼 식량을 빼야지!”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정치에 있어서 국방의 문제도 중요하고 경제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의(信義)라는 말입니다. 바로 백성의 믿음을 잃어버리면 국가와 정치는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의 연속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일가족이 재임시절 수억대의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우리를 아프게 하고 또 다른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들로 온통 시끄럽습니다. 며칠 전 TV뉴스를 보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시청 공무원이 5년 동안이나 식당에서 도박을 하다가 붙잡힌 뉴스가 나오더군요. 하여간 이 나라가 우울한 이야기 뿐입니다. 

이런 지금 우리가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시민이 시청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이 나라를 믿을 수 없이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더 이상 국민들이 믿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발표하고 성명을 내도 안 믿겠다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한 나라가 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고 삽니까? 누구를 믿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대 사회에 가장 요구 되는 조건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투명성입니다. 사실 모든 것에 비밀은 없습니다. 비밀이 지켜지리라 생각하고 숨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투명성이 있을 때 거기에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진실이 있는 곳에 믿음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을 근거로 지식도, 능력도, 권력도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라면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심은 믿음입니다. 얼마나 믿었느냐, 교회에서의 직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인 믿음이 있느냐가 문제요, 얼마만큼의 믿음이냐가 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시의 현실을 탄식하시듯이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19절에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시고 나머지 아홉 제자는 산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면서 예수님을 만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데 그 중에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 아버지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 귀신을 내쫓는다고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가기는 커녕 점점 아이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19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능력은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야하고 그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예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책망하십니다. 23절에“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사실 인간적으로 이 아버지는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숱한 의사들도 찾아가봤고 혹시 무당들도 찾아갔을지도 모릅니다. 능력 있다 하는 사람은 다 찾아 다녔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 나왔는데 그 제자들마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 대한 기대마저도 의심이 갑니다. 이 의심이 마음속에 파고들면 능력이 무너집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는 것은 곧 모든 관계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고목나무가 하나 있는데 고목나무 위에는 매가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목나무 밑에는 멧돼지 한 가족이 살았습니다. 위에 있는 매가 나무 열매를 따먹고 그것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멧돼지는 그것을 주워 먹습니다. 또 멧돼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땅을 파서 먹고 부스러기를 남기면 매가 내려와서 주워 먹으면서 재미있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우라는 놈이 질투를 하고 이간을 붙였습니다. 매한테는“너 조심해라 너 사냥 나가고 없으면 멧돼지가 나무를 흔들어 둥지에 있는 새끼를 땅에 떨어지게 해서 잡아먹을 거다.”그렇게 말하고 멧돼지에게는“너 조심해라. 네가 멀리 사냥 나가면 새끼들 다 잡아먹어 버리고 말 거다”이랬습니다. 듣고 나니까 그럴 거 같거든요. 그래서 그 날부터 서로 의심을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멧돼지 가족과 매 가족이 다 굶어 죽었답니다. 여러분, 의심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신뢰가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겁니까? 아닙니다. 오늘 내가 처음 만난 아무에게나 나를 믿어달라고 한다고 믿어주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나에게 와서 다짜고짜 자기를 제발 믿어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 누가 막연하게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믿음이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점점 키워 가는 것입니다. 

나를 보여주기를 수차례 또한 그 사람을 꾸준히 보면서 신뢰가 생기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믿어달란다고 누가 믿어주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무작정 믿어주길 바라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무조건 자기를 믿어달라고 하면 그 사람 수상한 겁니다. 여러분, 신의라는 것은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신앙적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있어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자마자 믿음이 출중한 사람이 되기란 쉽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이 있는 자로부터 그 믿음을 배우고, 신앙의 선배로부터 제대로 된 신앙을 본받으면서 조금씩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를 잘 만나야 되고 믿음의 지도자를 잘 만나야 됩니다. 

[러셀 헤일(Russel Hale)]이라는 교수는 오늘 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목적이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교인을 이렇게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동(浮動)의 교인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공중에 떠다니는 것과 같이 자리를 찾지 못하는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등록한지 십 수 년이 지나고 신앙 생활한 햇수는 제법 되는데 교회에서는 늘 손님처럼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봉사할 자리도 찾지 못하고 교인으로서의 의무도 권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성전 뜰만 밟는 것으로 만족하고 헌신다운 헌신 한번하지 못하고 겉도는 교인을 말합니다. 

둘째는 반 기구주의 교인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교회의 조직이나 기구에 불만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조직과 부서를 만들어서 골치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여 마음 맞는 사람들 끼리끼리 만의 오붓한 모임과 친교만을 주장하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안 될 때에 맥이 풀려서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쾌락주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안에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이 시행된다 할지라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교회만 해도 성경공부모임도 있고 열린 찬양 모임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교회에서 매월 첫 주 오후에 드리는 이 찬양모임은 단순한 친교나 부서 모임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모두 참석해서 함께 찬양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그냥 가버립니다. 바로 쾌락주의 자들이라는 말은 이런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프로그램만 찾아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라는 목적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폐증교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재미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대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괜히 혼자서 생각하기를 먼저 믿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자기의 가난한 형편을 스스로 굴레 씌워서 돈 있는 교인들이 자기를 차별한다고 믿고 스스로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것이 장벽이 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일종의 자격지심이지요. 

그런가 하면 다섯 번째는 세리 같은 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마치 자기는 의인이어서 신앙생활에 전혀 흠이 없고 진실한데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마치 자기의 신앙이 본받아야 할 가장 좋은 신앙이라고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이되<절반 크리스천(Semi-Christia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와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훌륭한 믿음 옆에 있으면 나도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곁에 늘 있기만 한다면 훌륭한 믿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번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나흘이면 이미 시체가 썩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 앞에 찾아가서“돌을 옮겨 놓으라.”하시더니“나사로야 나오라!”하십니다. 

여러분, 이 장면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안 나오면 어떡합니까? 이게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에는 만약이 없습니다. 만일이 없는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11:44절을 보면“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거기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위대한 예수님의 믿음 곁에서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배워서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믿음이 되기를 워하시고 또 도와주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아이의 아버지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 없는 사람을 놓고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기적을 통해서 믿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 중에 먼저 믿은 자는 나중 믿은 자들을 도와 줘야 합니다. 직분 있는 자들은 초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재력으로, 명예로 이끌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어야 합니다. 보여 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믿었고 직분이 있다 할수록 본받을 만한 신앙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여줄 신앙도 없고 본받게 할 믿음도 없이 큰소리만 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면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 곁에 따라다니면서 많은 기적과 무엇보다도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의 믿음을 보고도 아직 온전한 믿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물론 제자들도 이 아이를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28절에 보면 아이를 고치고 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습니다.“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그때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29절이 그 대답이지요.“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어쩌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처음 예수님께서 파송하실 때 귀신을 내쫓아 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것이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라는 사실을 지금 잊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명색이 경력이 있다고 자신하는 그 순간 주님이 주신 능력임을 잊고 자신들을 믿었습니다. 다소 신앙에서 빗나간 인간적인 자신감 때문에 아마도 실패했을 것입니다. 처음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산 위에 계셨고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도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했더라면 성령으로 교통이 이루어 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란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을 말합니다. 나로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해야 되는 것이지 나 혼자만의 자신감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빼버린 신앙은 능력 없는 믿음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능력 있는 믿음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늘 주님과의 만남에서 그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믿음을 내가 받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고 이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라도 조금씩 믿음을 심어가야 되겠고 믿음을 키워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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