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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홉번째 복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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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복 (요 20:24~29)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4)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5)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6)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9)
<요한복음 20장 24~29절>



<목회기도>
구원의 하나님!
새 잎 돋고 꽃피는 아름다운 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허락하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날들은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음에도
‘내 힘, 내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셔서 겪는 어려움들을 능히 극복하게 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자리에 세워 주시옵소서. 
경쟁하며 살기에 피곤하고, 정치인들이 실망을 주고,
북에서 하는 일들이 마음 편치 못하게 하고,
믿을 만한 사람 없어 답답한 삶이지만 …
부활과 영생의 소망으로 힘 있게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한숨 쉬던 입으로 찬양하게 하시고
두려워하던 마음은 기도의 문을 열게 하시고
오늘의 고난은 추억이 될 줄 믿고 감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군대에 … 객지에 … 외국에 나가 있는 성도들 … 
하나님 기억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특별히 육체의 병 때문에 고통 받으며 치료받는 환자들을 
기억하여 주셔서 저들 회복하여 
우리와 함께 기쁨의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부족한 종이 말씀 들고 섰습니다.
능력 있게 전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필요한 말씀으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서 열린 세미나에 곳곳에서 온 800여명의 CEO들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세미나를 주최한 게리 스몰리는 테이블 위의 낡은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습니다. 
목 부분이 부러진 채 줄에 매달려 있는 몰골조차 형편없는 바이올린이었습니다. 
스몰리는 청중 모두가 볼 수 있게 그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고
“이 악기의 가치가(값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몇 몇 사람이 “부러진 부분을 고쳐 판다고 해도 10~20달러에 불과 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스몰리가 그 바이올린 안쪽에 새겨져 있는 글을 읽어 보겠다고 했습니다. 
“1723년 안토닌 스트라디바리우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 일가(一家)가 제작한 바이올린으로 현재 지구상에 600여개가 남아 있으며 대당 가격은 30억~300억원)

스몰리는 세미나 참석자 모두가 그 바이올린을 돌려볼 수 있게 하겠다며 맨 앞줄 첫 사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바이올린을 마치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는 물건이라도 되듯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목 부러진 바이올린이 옮겨가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스몰리가 처음 그 바이올린을 보여주었을 때,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그 바이올린을 아무 가치도 없는 쓰레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이올린 안쪽에 새겨진 글을 읽어주는 순간 청중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 때, 바이올린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저 목 부러지고 몰골이 형편없는 바이올린 그대로였습니다. 

우리는 스트라디바리우스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비록 지금 몰골이 초라해보여도 … 
지금 사업이 안 돼서 힘들어 어깨가 쳐지긴 했어도 우리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옆의 분들과 이렇게 인사합니다. “이렇게 값진 분인지 몰랐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심하는 사람, 도마

오늘 본문의 도마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특별히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에만 3번 나옵니다. (요 11:16, 요 14:5, 요 20:24~29)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인상 깊게 기억되는 도마와 관련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도마는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에 ‘의심하는 사람’의 대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혔을 때 모두 도망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눅 24:10)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겁에 질린 채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었습니다.(요 20:19)
그러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 20:19) 하며 
평강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24장 37절에는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눅 24:37)고 했습니다. 
‘영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귀신인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인데 문이 굳게 닫힌 방에 죽었던 예수님이 나타나셨으니 그 상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 …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고 하시고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고 했고 (요20:27)
누가복음에는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눅 24:40)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자리에 없었던 도마

그런데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본문은 도마가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몸이 아팠는지, 친구를 만나러 갔었는지,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두려워 숨었는지 … 이유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을 선언해 주신 그 복된 자리에, 도마는 빠졌습니다. 
도마는 
- 동료들의 모임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 공동체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제자들의 운명과 같이 하겠다는 자세가 부족했습니다. 
- 제자들과,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개인행동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두려워해도, 문을 닫고 있어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주석가 Matthew Henr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규적인 엄숙한 자리, 
정규적인 예배의 자리에 마음대로 빠지면, 
언제, 무엇을 잃어버릴지 무엇을 놓쳐 버릴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매튜 헨리) 

정규 예배에, 정규 모임에, 엄숙한 자리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기쁜 자리를 놓친 것처럼 모여야 하는 자리, 복된 자리에 빠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약속하신 복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 가정에서 부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자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일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유다서 1장에 보면 천사라도 그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유 1:6)

성도들이 주일에 있어야 할 자리는 교회입니다. 
예배의 자리입니다. 은혜 받는 자리입니다.
여러분도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동료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던 도마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날로부터 8일 뒤에 제자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도마가 참석했습니다. 도마는 동료 제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0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We have seen the Lord Jesus!) (요 20:25) 

제자들이 도마에게 평범한 목소리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해 주었겠습니까?
아마 급하게, 큰 소리로 …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실지라도 
손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창 자국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요 20:25) 
도마는 눈으로 보고/손으로 만져봐야만 … 
증거를 확인해야만 믿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본다고 하는 것은 각기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릅니다. 
일시적이고 영구적이지 못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봐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 다르고 판단이 다릅니다. 
‘내가 봐야 믿겠다, 내가 만져봐야 믿겠다’는 태도는 
천국도 가봐야 알고, 지옥도 가봐야 알지 안 가보고 어떻게 알겠냐고 할 사람들입니다. 
지옥은 가보는 곳이 아닙니다. 아주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거기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가 느끼고 판단하고, 경험한 것이 아닌 것은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물의 일부분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게 존재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보고 사는 것보다 만지며 사는 것보다, 못보고 살고 못 만지고 사는 것이 더 많습니다. 
가본 곳보다 안 가본 곳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참 넓습니다. 
제 서재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 1001곳”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책을 사서 제가 가봤던 곳을 표시해봤습니다. 그런데 가본 곳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그 책에 소개된 곳에 가보려고 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어도 인간의 눈으로, 
심지어 현미경으로도 확인이 안 되는 병원체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주일 강대상 위에는 보고서 한 장이 놓여있습니다.
부교역자들이 주 중에 심방을 하고 나면 한 주간 동안 교구에 있었던 일들을 작성하여 이메일로 제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입원한 환자, 집에 있는 환자, 태어난 아기, 돌,
결혼, 고희, 별세 … 등 성도들의 형편, 특별한 사항들을 기록하여 강대상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할 때 참고하기 위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환자들이 적을 때는 10명, 많을 때는 25명 이상 되기도 합니다.
집에 있는 환자들도 많습니다. 그 많은 환자들 중에 다리나 팔이 부러진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것은 수술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정말 기막힌 일은 병명이 무엇인지 모를 때입니다.
의사들조차 무슨 이유로 병이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이 세상에 죽어가는 환자 중에 눈에 보이는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 병원체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고, 자기의 손으로 만져봐야만 믿겠다고 하는 
도마와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 왔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목사의 설교에 아멘하고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홉 번째 복 - 보지 못하고 믿는 자

사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지금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 사람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그 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도마는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 그들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인지 겪어 봐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 베드로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할 말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부터 꺼내고 보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 13:37, 마 16:22) 

- 아고보와 요한은 어떠했습니까? 베드로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성질이 급하다 하여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보아너게’란 ‘우레의 아들’(‘천둥의 아들’- 쉬운성경) 
이라는 뜻입니다. (막 3:17)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그 마을에서 그들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자,
분에 못 이겨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게 기도하려고 했던 
과격한 사람들이었습니다.(눅 9:54)
그들은 예수님에게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자신들을 좌우에 앉혀달라고 해서 
제자들과 말다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막10:37,41)

그런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니 … 
확인하기 좋아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한 도마의 생각에는
‘저것들이 또 뭘 잘 못 보았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마는 남들이 하는 말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 14:2~4) 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 모르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 분명한 성격의 도마가

“ …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 14:5)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도마는 이렇게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거나 안 믿어지는 것을 믿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마에게 예수님이 “ …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그 자리에서 
“ …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라고 고백했습니다. 

손으로 확인해봐야 믿겠다고 했지만 … 실제로 손을 만지거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요20:27~29)
예수님을 만난 도마는 만지지 않아도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감탄사로 되어 있습니다. 
“My Lord and my God!”-NIV

도마의 고백에/반응에 예수님은 “ …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20:29)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가 무의미합니다. 
-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 만약 부활이 없으면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있는 우리는 참으로 한심한 바보들입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의심이 갈 때가 있습니다. 도마처럼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고, 
때로는 실망해서 복된 자리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고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의 상처로, 어떤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어떤 때는 괜한 투정으로 … 복된 자리에 있기를 거절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를 책망하고 버리지 않으심처럼 우리도 버리시지 않으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주변에 믿지 못하고 토라지고, 
모임에서 멀어지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어도 … 
참고 또 참으며,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 주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는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8복(福)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哀慟)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溫柔)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淸潔)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和平)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義)를 위하여 박해(迫害)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3~10) 

이렇게 예수님이 8복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8복만 알고 있으면 안됩니다. 
아홉 번 째 복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는 말씀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분명한 것 좋아하는 도마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복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8복에만 머무르지 말고 9번째 복 “보지 못하고 믿는 복”에까지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한 때 제자들, 동료들의 모임의 자리에서 떠나갔으나 다시 돌아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가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
우리의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힘들고 어렵고 탄식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의심하는 소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여”하며 
하나님을 부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식입니다. 물론 자식이 속 썩일 때도 있습니다. 말 안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특별한 것입니다.

저는 아들만 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재미없습니다.
딸 가진 아버지가 부럽습니다. 요즘 작은 아들은 미국에 있고, 큰아들만 같이 있는데 …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아들과 한 마디도 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들하고 얘기 좀 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해 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건넨 한 마디가 “밥 먹었냐?”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한마디 합니다. “네”
어떤 때는 한 마디도 안합니다.
그래도 급한 일이 있으면 아들이 제게 “아버지”하고 부릅니다.
“아버지” …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 한마디 부름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 아닙니까?

도마가 의심하는 자리에 있었고 손가락을 넣어 봐야 믿을 수 있고, 
옆구리를 만져봐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한 그 한마디로 다 된 것입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온 여러분, 보지 못하고도 믿는 믿음의 자리에 있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때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속상하고 답답하다 해도 …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
결국엔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하며
주님을 고백하며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보지 못하고도 믿는 복에 이르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했던 도마처럼
우리도 범사의 삶 중에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예배의 자리에 참석한 이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저들의 찬양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 저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살며 땀 흘리고 애썼던 물질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들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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