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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라 (막 5: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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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막 5:35~41)
 
  
예수님의 사역현장을 기록한 마가는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바쁘게 활동하셨다고 했습니다(막 3:20). 대부분의 종교가 정(靜)적인데 비하여 기독교는 동(動)적인 생명력을 행사합니다. 교회가 시대적인 사명을 망각한 채 주저앉아 있거나 생동적인 기능을 상실하면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세상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을 외치신 예수님은 오늘날 무기력해진 자기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라고 명하십니다. 어떤 상태에 있는 자를 일어나라고 하셨을까요? 

1. 시기(時機)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로마서 13:11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어두움에 익숙해져 깊은 잠에 빠져 들게 됩니다.

1) 음란하고 방탕한 때입니다.

성경은 범죄하고 타락한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 16:4). 사도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저희 정욕대로 버려두셨다고 하였습니다(롬 1:24). 사회적인 관습이나 도덕적인 기준을 무시하고 또 그 양심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는 사람은 정욕에 방치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9절에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순리에 따르지 아니하고 정욕에 따라서 성적인 타락을 일삼는 것을 뜻합니다(롬 1:26-27). 더 심각한 것은 이와 같은 음란 행위와 방탕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빌 3:19). 

2) 세상잠에 깊이 빠져버린 때입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고 하였습니다(마 25:5). 솔로몬의 품안에서 사랑의 잠이 든 술람미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한 것처럼 세상 잠에 취한 사람도 일어나기를 싫어합니다(아 2:7). 사도 요한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어둠의 일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요 3:19). 말세적 현상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윤리적 불감증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앙의 경각심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4-5에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딤후 5:6). 

3) 그리스도인의 삶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6). 어둠 속에서 썩어져 가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밝고 깨끗한 삶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거나, 빛이 어둠을 추방하지 못한다면 아무 쓸모없이 되어 그냥 짓밟히게 됩니다. 오늘날 말세의 현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시대적인 책임의식을 갖지 못하고 세상과 함께 어둠의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2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14절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2. 영혼이 잠을 자는 자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비유합니다. 호흡이 멎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쉬지 않고 죽어 있는 야이로의 딸을 잔다고 하였습니다(39절).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고 하였습니다(요 11:11).

1) 마음이 몸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유월절 성만찬을 행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6:37-38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자신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심각하게 기도하였습니다(39절). 그 시간 세 제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잠자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였습니다(41절). 기도의 잠을 자는 사람은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사람입니다(롬 7:15).

2) 시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단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 5:8).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는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그 중 ‘좋은 땅’은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이지만, 가시 떨기 밭은 마음이 복잡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결실을 못한다고 하였습니다(마 13:22). 바울도 이런 사람을 두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딤전 6:9). 이런 마음을 마귀가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탄이 밀 까부르듯 흔들기 때문에(눅 22:31) 베드로는 기도 시간에 잠을 자버렸고,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마 26:75). 

3) 판단을 그르치며 잘못된 행동을 합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게 됩니다(왕상 3:9). 인간이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엡 1:17-19). 옛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함락되어 백성이 방황할 때 무리들은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께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예레미야 42:2-3에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소서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자기의 지혜와 능력을 과신한 채 기도하지 않고 어떤 일을 시도하려 할 때 판단을 그르치게 되고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던 베드로는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자르는 등 엉뚱한 일을 저질렀습니다(요 19:10).

3. 사명을 망각한 자입니다.

풍랑을 만나 요동치는 배안에서 요나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다가가서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욘 1:6).

1)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부르시고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욘 1:2).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
하려고 다시스로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어떤 내용이든지 하나님의 분부가 내려지면 거기 복종하는 사명만 있을 뿐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선지자적 사명을 받은 성도들이 이따금씩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자기의 철학이나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요나처럼 하나님과 맞서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2)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선지자는 사람들이 길을 잘못 들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백성이 방황하거나 좌절할 때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선지자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요나 한사람의 범죄로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승객이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책임이 있는 요나는 배 밑층에서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결국 선장에게 덜미를 잡히고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미친 길을 가던 발람은 당나귀의 경고를 들어야 했고(민 22:25-30), 예수님을 부인하던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에 정신이 들었습니다(마 26:7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역할을 못하게 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40).

3) 기독교 복음의 신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7:33).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은 목숨을 걸고 그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서 사명을 포기하는 사람은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요나의 경우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고 묻는 선장에게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욘 1:11-12). 결과적으로 풍랑이 잔잔해졌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인식하는 사람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용감하게 일어서야 됩니다. 자기를 던지는 희생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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