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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된 일꾼이 받는 축복 (신 11:1,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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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일꾼이 받는 축복 (신 11:1, 8~12)


지난 주일에는 우리교회에서 장로님과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을 세우는 임직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중직은 세상직분이 아니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어 섬길 임직입니다. 이 직임을 받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적 측면과 사람을 대하는 인간관계나 인격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므로 영광스럽습니다. 반면 사명 감당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어렵지만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을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만난 사람을 통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난 교회 즉 훌륭한 직분자를 잘 세운 교회는 은혜 가운데 부흥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잘못 만난 교회, 올바른 직임자를 세우지 못한 교회는 교회의 생명인 평안을 잃고 큰 혼란을 겪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28에 교회의 기능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삶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쉼을 얻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직분자를 잘못 세운 교회는, 쉼터가 아니라 시기와 분쟁과 갈등과 반목의 자리가 되고 맙니다. 이로 인해 쉼을 얻고자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 도리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지난주 임직을 받는 분들이나, 이미 직임을 맡은 분들,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직임자들입니다. 이 직임은 세상일을 하는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직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직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一. 직분을 대하는 올바른 동기가 필요합니다.

무슨 일을 할지라도 어떤 동기로 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한 예로,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에 대한 기사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형제로서 같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드리는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초장에 덮인 양떼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보니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진 아벨은 양떼 가운데 가장 좋은 첫 새끼를 골라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이러한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반면 형인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의 눈에는 들판에 무르익은 곡식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다 자기가 땀 흘려 일한 노력의 결과로만 여겨졌습니다. 햇빛과 비와 공기와 이슬을 주시며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정성을 드려 제물을 바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곡식이나 조금 퍼서 드렸습니다. 가인의 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드린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는 것을 보자 동생을 시기하며 미워했습니다. 이 미운 마음이 쌓이고 쌓인 가인은 끝내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이처럼 동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지 못한 동기는 정성 없는 신앙을 가져왔습니다. 정성이 결여된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다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인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자자손손에게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 직분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절 말씀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하셨습니다.“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직분을 맡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어진 직임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빛없이 말없이 직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직분자를 세울 때 그 기준이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3~4에“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했습니다. 

二. 교회의 직분자는 왜 세우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최초로 직분자를 세운 것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임직자를 세운 까닭은 사도들이 맡아하던 교회의 일을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므로 사도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너무 분주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성도 한사람 한 사람을 골고루 보살필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한 성도들 사이에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사도들이 사도행전 6:3-4에말하기를“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했습니다. 직분자를 세운 이유는 사도들의 본분인“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주의 종들의 주 임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기도를 많이 하므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연구하므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영혼은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자란 화초처럼 영혼이 잘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요한삼서 1:2의 말씀처럼“영혼이 잘될 때 범사가 잘되며 강건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17에 권면 하시기를“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종들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할 수 있으며, 은혜로운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개인을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인 영혼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구원받은 영혼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어린 말씀이 있는 곳에 이러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심령의 의심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확신을 얻게 됩니다. 범죄한 심령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됩니다. 낙심한 심령은 소망과 용기를 얻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썩어질 세상만 바라보는 심령이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육신의 욕망만을 쫓던 심령이 거룩하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목회자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 분담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三. 직분을 감당해야할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1절에 말씀하시기를“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순종과 직임 수행은 항상 행해야할 일입니다.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과 직임 감당의 종점은 어디입니까? 내가 이 세상의 삶을 다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그때까지 중단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충성의 특성은 최후까지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그 동안의 힘쓰고 애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는 마치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42.195km를 달리는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우승 결정은 최종의 순간입니다. 도중에 선두에 서서 달린 것은 우승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달려가야만 우승으로 인정합니다. 직임에 대한 사명 감당이 이와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발탁된 12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남달리 계산에 밝고 정직하게 보였기에 재정까지 맡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배신자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께 행한 그동안의 충성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충성은 마지막까지 변함이 없어야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0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하라는 것이며, 죽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충성하라는 의미입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이탈리아 폼페이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인해 화산재에 묻혀 전멸 당하는 처참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화산재가 비처럼 폼페이 도시에 쏟아져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를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습니다. 이 극한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자리를 지키며 서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충성”입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환경과 상관없이 주어진 직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항상” 입니다. 하나님은 직임을 맡은 자에게 당부하시기를“직임과 말씀을 항상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四. 직임을 잘 감당한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1. 강성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강성”이란 단어의 본래 뜻은“조력하다. 돕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은 강하고 번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몸인 교회에서 주어진 직임을 잘 감당하며, 말씀을 항상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어진 직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구약성경의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시편 119:127에 기록하기를“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사명 감당에 대해서도 사무엘상 17:34-35에 기록하기를“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지켜야할 책임을 감당하고자 맹수와 싸워 죽이고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윗의 축복에 대해 역대하 11:9에“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은 강성하여 그를 대항하여 이긴 사람이 없었습니다. 블레셋 명장 골리앗도 다윗의 물매 돌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절대 권력자인 사울왕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게 강성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대왕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직임을 잘 감당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지키며 살아간 다윗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였습니다. 강성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직임을 잘 감당하며 항상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 날이 장구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9절에“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풍요로움이 가득한 땅에서 누릴 넘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장구하리라”는 것은 가나안 땅의 풍성한 유업을 자자손손이 이어받을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약속의 말씀대로 후손이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 왕위가 계속 계속되었고, 마지막에는 메시야 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 큰 영광은 직임을 감당하며, 말씀을 항상 지키며 살아간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5:10에“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셨는데 이 말씀이 다윗에게 그대로 실현이었습니다. 맡겨진 직임을 변함없이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항상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후손이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의 지혜입니다. 

3.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머물러 계십니다.
본문 12절에“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첫날부터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지키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눈이 머물러 계시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습니다.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7:8에“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라고 하셨습니다. 직임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순종하는 사람위에 하나님의 사랑의 눈길, 보호의 눈길이 항상 머물러 계셔서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이 길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 길은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 끊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은 각오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도중에 변절하여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잘 달려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모스코바를 향해 진격할 때 러시아 카자크족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자 프랑스 군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자크 족이 어느새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강물이 얕은 쪽을 골라 병사들에게 부서진 다리의 교각을 붙들게 하여 가교를 만들게 해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병사가 건너가자 물속에서 교각을 붙잡고 가교를 만들었던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교각을 붙든 채 얼어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희생은 사명의 엄숙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충성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께 대한 성도의 충성이 이에 못 미친다면 어찌 십자가 군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든, 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든, 그것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직임을 감당하든, 아니면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든 그것은 내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콩을 심고 팥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내 생애의 축복과, 복된 후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위해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강성하리라! 
너희 날이 장구하리라! 
세초부터 세말가지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으리라!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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