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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이렇게 전하세요 (눅 24: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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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하세요 (눅 24:44~49)


“교회에 다니고 나니까 어때요?”
“예수님 믿으니 어때요?”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예수님 믿고 나서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물음이기도 하고 “교회를 다니면 어떤 기분이냐?”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냥 그래”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아직 어떤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고, “좀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앙세계에 입문하는 단계에 들어온 이들 입니다. “너무 좋아요. 너무 기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영적 체험을 하고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중생을 경험(Regeneration)한 사람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으니 너무 기뻐서 춤을 출 것 같아요”라며 간증을 하고 싶어 합니다. 솟아오르는 구원의 기쁨을 혼자만 가슴 속에 묻어둘 수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간증을 하려고 야단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영인파가 몰려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예수님께 항의하자 예수님은 통쾌한 답변을 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
부활의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
그들은 결코 잠잠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너무 기뻐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그 기쁨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오신 날,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다음에 다른 여인들이고,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그리고 네 번째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로 10명의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서워 다락방 문을 잠그고 벌벌 떨며 숨어 있었는데 갑자기 불쑥 나타나셨습니다. 문은 닫힌 채로 그냥 있는데 예수님은 벽이나 문의 장애를 받지 않고 들어오셨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체로서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임을 증명하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에 계시던 예수님은 순식간에 멀리 갈릴리 해변에도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더 머무시면서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베다니 언덕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승천기념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안에는 예수님이 밟고 승천하실 때 생긴 큰 발자국이 바위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이 오늘 설교말씀의 주제입니다. 한마디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인줄 알고 열심히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붙잡혀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자 낭패와 실망을 당한 뒤에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빨리 달려가서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하라 명령하십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 28:7)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된 분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산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보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으니 예수님의 부활을 빨리 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눅 24:46)

우리 먼저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도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빨리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른 새벽 맨 먼저 무덤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시자 마자 빨리 가서 ‘내가 살아났다’는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과 같은 사명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믿는 神은 죽은 神이 아니라 살아있는 神(living God)입니다. 불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거의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다음에 무덤을 남겼습니다. 그 무덤 안에는 그들의 죽은 시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빈 무덤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연예인들 중에 자선사업을 제일 많이 하는 분이 가수 김장훈씨입니다. 어느 잡지에서 읽었는데 그는 전셋집에 살면서 30억원 이상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금을 했답니다. 그의 배후에는 신앙의 어머니 김성애 여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말로만이 아닌 몸으로 아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우상이나 죽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임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날마다 기도하며 신앙의 본을 보여준 어머니의 기도가 아들을 통해서 응답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날아갈듯 기쁘다”는 말은 두 가지 경우에 쓰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횡재를 만났을 때입니다. 갑자기 복권에 당첨되었다든지,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든지, 예기치 않은 큰 상을 받았을 때 날아갈듯 기쁘다고 표현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을 때입니다. 특히 무거운 죄책감에서 벗어났을 때 날아갈듯 기쁘다고 말합니다. 

시골에는 집안에 닭, 오리, 거위, 토끼 등을 기릅니다. 재동이라는 아이가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는 거위를 고무줄 총으로 연습 삼아 쏘았는데 직통으로 머리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겁이 난 이 아이는 아무도 몰래 뒤뜰에 죽은 거위를 묻었습니다. 저녁 나절 아버지가 들에서 돌아와 거위를 찾았습니다. 밤늦도록 찾았으나 거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간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이 소년은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아버지가 부르시기만 해도 다리가 떨립니다. 이른 아침에 아버지가 마당에서 부르십니다. “재동아, 어서 나오너라!” 겁에 질린 재동이가 뛰쳐나갑니다. “아빠, 부르셨어요?” 혹시 거위를 죽여서 어디에 묻었느냐는 호통이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한참 쳐다보시던 아버님은 장날이니 함께 장에 가서 새로이 거위를 사오자고 했습니다. 재동이가 가야 가장 귀여운 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쁜 거위를 사와 마당에 풀어 놓으니 엄마가 너무 기뻐합니다. 수고했다며 남편과 아들에게 닭을 잡아 미역국을 끓여 주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 엄마가 누나를 부릅니다. “얘야, 설거지는 네가 하려므나!” 입이 삐죽 나온 누나가 재동이를 몰래 부엌으로 불러들인 다음에 조용히 속삭입니다. “네가 거위를 뒤뜰에 묻는 것을 내가 다 보았다. 내말 안 들으면 아빠에게 일러바칠 것이다. 알았지? 이 설거지 네가 해.” 아무 소리 못하고 설거지를 합니다. 밤에는 이불을 펴 놓으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어 놓고 걸레와 비를 들고 방과 대청을 청소하라 했습니다. 찍소리 못한 채 재동이는 누나의 몸종 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갖고 복종 합니다. 누나는 점점 포악해집니다. 누나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입니다. 죄책감에 견딜 수 없습니다. 

며칠을 불안에 떨던 재동이는 들에서 일하시는 아버님을 찾아갑니다. 고개를 숙이고는 “아빠, 제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려고 할 때 아빠가 먼저 말씀하십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혼자 고민했느냐? 네가 착한 아이니 언젠가 내게 올 줄 알았다. 너를 시장에 데려간 것도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단다. 됐다. 네가 잘못을 깨달았으니 다음부터는 혼자 고민하지 말거라. 아빠는 어떤 것이든지 너를 이해한다. 너와 함께 한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너는 착한 아들이야.” 아빠가 꼭 껴안아 주셨습니다. 재동이는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이 바로 이런 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누나가 무어라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기독교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서 가장 근본문제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해 발생합니다. 죄가 있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는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곧 사망(롬6:23)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죄가 문제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그 죄가 모든 인간을 패망의 길로 빠트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 세상에는 완전한 의인은 없습니다(롬 3:10 참조). 모두 죄인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역사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뿐입니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不信仰의 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면서도 그 사랑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며 감사하지도 못하는 죄가 큽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약해지다 보니 마음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펄펄 뛰고 싶은데 절대안정을 하라니 몸과 마음이 위축됩니다. 

그런데 약함 가운데서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감사하지 못했던 죄책감입니다. 강할 때는 내가 모든 것을 이룬 것 같더니, 약해지니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오늘까지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부모님이 보살펴 주셨고, 주변 분들이 도와주셔서 이만큼 살아왔는데 그분들에게 충분한 감사를 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큽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저를 너무도 사랑하셨는데 저는 언제나 제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 불신앙적인 죄,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들이 저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는 소식입니다.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7-48) 

죄사함을 받는 길이 오직 하나가 있으니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놀라운 진리의 선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b)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죄는 저주의 맥을 잇게 합니다. 우리 몸속에는 죄로 인한 저주의 피가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그 저주의 피가 구원과 축복의 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약속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함께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눅 24:49)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큰 소리로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보호자요, 안내자이며 미래를 책임져주시는 소망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죽음은 절망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소망의 극치입니다. 불행과 절망의 늪에서 울부짖는 흑암의 백성들에게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바로 소망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번 보스턴에 갔더니 아는 분이 감동적인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의사로써 성공적인 이민의 삶을 사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명문 사립학교에서 공부를 빼어나게 잘한 모양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전도했으나 복음이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인동포들과 교제도 안했습니다. 주말이면 가족들끼리 아메리칸 드림을 만끽하며 즐기기에 바빴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사준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던 두 아들이 나무를 들이받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작은아들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큰아들은 눈 하나를 실명했습니다. 운전을 했던 큰 아들은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자포자기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풍요를 즐기던 부모는 삽시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복음이 들려왔습니다. 전에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던 복음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죄사함을 체험하고 부활의 은총을 통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그분들이 완전히 바뀌어졌답니다. 주변의 한인들에게 겸손히 인사도 하고 사랑도 나눕니다. 하나님도 보이고, 이웃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절망 중에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은 그분들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날마다 여러분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살아났다”(I am risen! I am now alive!)고 외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이 살아났다”(Christ is risen)고 전하라 하십니다.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믿는다고 전하라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전하라 하십니다. “이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님이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고 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전하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거두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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