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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세상을 이기는 부활 (눅 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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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부활 (눅 24:1~10) 


1.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골프선수 로버트 드 빈센조가 어느 날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을 받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뒤, 클럽하우스로 가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잠시 뒤, 그는 혼자서 주차장에 세워 둔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그의 승리를 축하한 뒤, 자신의 아이가 몹쓸 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치료비가 없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 없노라고 덧붙였습니다. 

드 빈센조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며, 조금 전에 우승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 서명을 한 뒤 그녀의 손에 쥐어 주며 말했습니다. “아이를 위해 이 돈을 써 주시오.” 다음 주, 드 빈센조가 컨트리클럽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프로골프협회 직원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주차장에서 놀던 아이들에게 들으니, 지난주 선생께서 우승하신 뒤 우연히 젊은 여성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드 빈센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직원이 말했습니다. “선생께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녀에게는 병든 아이도 없고, 결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속여 돈을 받아 간 겁니다.” 

드 빈센조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죽어 가는 아이가 없다는 말인가요?” 직원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자 빈센조는 말했습니다. “그거야말로 내가 이번 주에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이군요.”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보다 ‘죽어가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 가장 좋은 소식, 굿 뉴스(Good News), 복음(福音)이라는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은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예수의 부활이 온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능력, 부활 생명을 누리게 되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이 굿 뉴스,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 여러분에게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모든 죄와 죄의 세력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병원에서 질병에 대한 검사를 받을 때 꼭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가족 중에 암환자가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가족 중 암환자가 있었다면 암 유전자가 잠재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고 따라서 암에 걸릴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암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도 마찬가지로 암 유전자와 같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음을 안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를 성경은 “죄 아래 있다.”(All men, both Jews and Greeks, are under the power of sin)<롬3:9> 고 설명합니다. “

죄 아래 있다.”라는 말은 죄의 세력, 죄의 영향력,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권세는 바로 죽음입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동생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법대로 예배드렸고, 형 가인은 믿음없이 드렸습니다.(히11:4) 당연히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열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안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영향력을 익히 아시고 죄를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라.”(but you must master it.)는 말은 ‘master', 즉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결국 ‘죄 아래’를 벗어나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땅에 묻어 숨겼습니다. 죄는 묻어둔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다스리고 정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정복하지 못하고 죄에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히12:4) 죄를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생을 죽여 동생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도 아실 뿐만 아니라 아담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아담은 형제 살인의 비극이 자신의 죄로 인해 빚어진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죄 아래’ 팔려간 가인의 계보, 그 후손들의 면모를 보면, 끊임없는 살인과 전쟁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5대손인 라멕에 이르러서는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라멕은 인류 최초의 일부다처와 함께 살인을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창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 셋의 계보를 보면, ‘의로움’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셋의 후손들은 번창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 후손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자신들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겸손히 하나님께 고백하며 기도와 찬양, 감사와 경배가 있는 예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흘러 셋의 후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창6:1)이라 불렀고, 가인의 자손들을 “사람의 딸들”로 불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는 자손과 ‘죄 아래’ 팔려 사는 후손을 구분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과 죄 아래 사는 ‘죄인’을 구별한 것입니다. 

의인의 계보인 셋의 후손 가운데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죄 아래’ 사는 죄인들을 의롭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 8:1-4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죄를 정복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 ‘죄 아래’, 죄의 영향력 아래 살지 아니하고 죄를 다스리며 죄를 정복하고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의 권세가 우리의 삶을 다스려 우리를 부활의 은총으로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1입니다. 

(롬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가 그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그 순간부터 부활의 능력, 부활의 권세, 부활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를 정복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9:1-6을 보겠습니다. 

(마9:1-6)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강도는 죽어 지옥에 떨어졌고, 다른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밤으로 낙원,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왼편에 있는 것으로 설명되는 강도는 죽어가면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시오.’라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평생 강도 행각을 일삼은 주제에 죽어가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뉘우치며 회개하기는커녕 최후의 발악하는 추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강도가 이 왼편의 강도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아도 싸지만 이분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합니다. 죄악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 강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시고 그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나라’, 즉 천국을 가지신 분이란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며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야유와 비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십자가 주변의 군중들과 로마의 병정들을 바라보시면서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며 원수같은 인간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들은 것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같은 기도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경에 변화를 받아 그간 소문에 듣던 메시야, 구세주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분이라면 나도 용서받을 수 있는 구세주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시면서 원수같은 사람들을 저주하거나 한을 품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들까지 용서하시는 분이라면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믿고 구원해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도의 고백에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으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회개한 강도는 천국에 들어갔고, 그렇지 아니한 강도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회개한 강도는 인생의 마지막에서 평안히 눈을 감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억되는 인생이 되어 천국에 들어갔고, 회개하지 아니한 강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거품을 물고 발악하며 지옥으로 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값을 친히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신 것입니다.(롬8:2) 

세상을 정복했을지라도 죄를 다스리고, 죄를 정복하지 못하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세상을 마침내 정복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앙생활로 죄를 정복하고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로 하여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있는 삶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몹시 싫어하여 이들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이 다 모여 베드로와 요한을 한 가운데 세우고 심문합니다. 

“너희는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 그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앉은뱅이였던 여기 이 사람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건강하게 되어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늘 아래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의회 회의장 밖으로 내보내고 서로 의논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소. 이 일이 사람들에게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앞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여 경고해 둡시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며 명령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유대 최고 의회 산헤드린은 백성들이 두려워 베드로와 요한을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단단히 협박만 해서 풀어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밖에서 두려워 사람들 틈에 몰래 숨어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오?’라는 추궁에 화들짝 놀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배반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후로는 어떠한 협박이나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세주이신 것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바울이 예수 부활을 전하며 온갖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되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로 협박한다 해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얼마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얻고 있다’(We are winning an overwhelming victory), ‘완벽하게 정복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어떠한 능력이나 권세에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어떠한 사탄의 세력일지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넉넉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롬8:32-39)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해 고문을 당해도 풀려나기를 거절했습니다. 조롱을 받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사슬에 묶여 갇히기도 하고 돌로 맞기도 하고 시험을 당하며 톱으로 몸이 잘리거나 칼날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며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온갖 학대를 받았음에도 결코 세상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겨냈습니다. 부활 생명 앞에 세상은 아무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히11:34-4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성도,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부활 신앙으로 정복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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