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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 20: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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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 20:15~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실상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첫번째 만나주신 사람이 "울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누구가를, 무엇인가를 끈질기 찾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시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날 장레식을 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므로 무덤을 방문하지 못했고, 안식이 지난 첫날, 그러니까 주일 새벽이 되자마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장사된 무덤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문하여 무덤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은 빈무덤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혜롭게 이 사실을 베드로게 비밀리에 알렸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곧 빈무덤을 찾아와서 빈무덤뿐임을 보고는 자기들의 집으로 속히 돌아가버렸습니다. 더 무덤가에서 머무르다가 군인들에게 발각되면 예수님의 시신을 빼돌린 자들로 몰릴 수 있겠다 싶어서였지는, 아니면 예수님에게 닥친 위험이 자신들에게도 닥칠 것을 두려워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뭍은 제자들은 급히 집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위협이 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현장이라는 것쯤은 알면서도 그녀는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서 울면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몸을 구부려 무덤안을 들여다보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요 20: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했습니다.

이 때 흰옷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으면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위험을 당할지라도 끝까지 무덤을 지켰고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는 걱정이 되지 않아도 예수님의 시신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애절하게 주님을 찾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녀에게 나타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시체라도 가져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곳 저곳 울고다니면서 예수님의 시체라도 찾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본심이었습니다. 방법이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진실이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천사는 이런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맨처음 이 여인을 만나주셨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앉겨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보다 더 소중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칠 것 같으면 쉽사리 내가 지켜야 할 자리도 떠나버리고 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살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가장 천한 자이면서 가장 소중한 자로 나타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서쪽의 막달라 지방에 살던 여인입니다. 마리아란 이름은 히브리어의 "마라"에서 온 것으로 고통 또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룻기1:20에 보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난 후에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 만큼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이 크기에 "기쁨" 이란 뜻의 나오미란 이름을 고통이란 뜻의 "마라"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처럼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여인이었습니다. 눅 8:2에 보면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린 여자였다"고 말합니다. 한 귀신만 들려도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인데 이 여인은 일곱귀신이 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채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창기였습니다. 그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서 일곱 귀신에 묶여 있는 영적 상태에서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고 깨끗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구실도 못하던 여인이 사람 다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평생을 산 여인이었습니다.

구원받고 새사람이 된 이후로 이 여인처럼 변화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녀가 갖고 있는 신앙을 살펴보면 그녀는 300데나리온이나 더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고 자기 머리카락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씼겨드릴만큼 헌신적인 신앙이 있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현장에서 지켜보았고, 장례를 지낼때에도 있었으며,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첫 새벽에 제일 처음에 무덤을 찾아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 있다가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 겁나는 때에 이 여인은 겁없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고 그곳에 오랫 동안 머무르는 순교적 신앙이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도, 위험한 일이나, 손해가 나는 일이나, 불이익을 당할 것 같으면 조용히 떠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여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할 때도 그 분 겉에 있었지만 그 분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도 무덤에 장사되어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그 분 곁에 머무르고자 했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맨 처음 무덤에 갔었고, 그리고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알리려 가서 알렸고 그리고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다녀간 다음에도 그대로 무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주 극성이며 대단히 적극적입니다. 어쩌면 정말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날 자격이 이 여인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함없은 사랑, 이런 변함없는 신앙이 결말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끈질기게 무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끝까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끝까지 만나고자 했습니다. 시체라도 가져가고자 했습니다. 그때에 천사도 만나고 부활하신 주님도 만났습니다. 방법이 옳으니 아니니 하기 전에 이만한 믿음이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실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날 만지지도 말고 날붙들지 말고 어서 빨리 가서 전하라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17~18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너희의 아버지가 되었고 나의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의 되었다. 그러니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가 되었다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와 목적이 여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목적이 아버지 없이 목자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고 목자를 찾아주시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양떼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으로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우리와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가 사랑으로 울면서 빈무덤일지라도 떠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머물러 있으면서 주님의 시신이라고 찾아가지고 가고자 했을 때 천사를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울면서 찾는 것이 누구며 무엇이냐가 내 인생을 결정하고 내 운명을 결정합니다. 예수님의 시체라도 찾겠다고 했을 때 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울면서 누구를 찾고 있으며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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