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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소망은 (빌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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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망은 (빌 3:7~11)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뒤집힘
지난 두 주 동안 영서지방에서만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11명이라고 합니다. 20대, 30대, 40대,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의 자리에까지 밀고 갔을까요? 젊은 나이의 그들에게 생은 왜 견디기 어려운 짐으로 다가왔을까요? ‘인생 별 거 있나, 그냥 그렇게 살다 가는 거지’ 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라는 말이 상기시키는 쓸쓸함이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려는 이들이어서 안심이 됩니다. 인생은 암중모색의 과정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답은 없습니다.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선택을 해야 합니다. 두 길을 다 걸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러한 선택이 만든 흔적들입니다. 뻘밭을 온몸으로 기어간 민챙이, 가무락, 고동이 흔적을 남기듯, 우리도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기왕이면 뒷사람이 안심하고 따라올만한 흔적을 남기고 가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영적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느라 그는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자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다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펙’(specification의 약자, 취업 준비생들이 학창 시절에 확보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의 총체를 일컫는 말로 토익 점수, 자격증, 해외 연수, 인턴 경험, 학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이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는 좀 떨어지나요?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이전에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는 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경험을 했길래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한결같이 그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가문, 학식, 신분, 종교적 열심…. 이것은 세상적으로 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과정입니다. 자랑스러운 게 많은 사람 속에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그의 내면에 비쳐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게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늘 막힌 듯 답답하던 정신의 지평이 툭 트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어디 매인 데 없는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어떤 고난도, 시련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벗어던지려고 했던 약함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약할 때가 곧 주님의 은혜가 유입되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이렇게 자리를 바꾸고 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가장 귀한 지식
지금 감리교회는 참담한 지경에 몰려 있습니다. 교권을 탐하는 이들이 우리들의 어머니인 교회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철저한 자기 부정의 길을 걸어간 예수의 길과,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의 길이 과연 같은 지향점을 갖고 있을까요? 지금 예수님의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탄식하며 이 성전을 허물라고 외치는 주님의 음성이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려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람들은 바알과 맘몬을 숭배합니다. 한완상 박사는 그의 책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서 한국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소 과한 듯싶은 표현이지만 그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7쪽)

바울 사도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다”고 말할 때, 그 그리스도는 오늘 교회 안에서 교리 속에 박제화된 예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질곡으로 몰아넣는 당시의 종교를 가차 없이 비판하던 개혁자 예수, 만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에 불타올랐던 사랑의 사람 예수,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셨던 예수, 예기되는 폭력 앞에서도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했던 그 예수, 바울은 바로 그 분 안에서 하늘을 보았고, 그 분 안에서 영생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 분이야말로 그가 그토록 찾던 진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는 예수 정신을 품고 사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의 혼에 사로잡힌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metanoia)는 혈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죄짓는 것만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자기를 넘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의 욕망을 조절하는 성숙한 인격이 없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신앙을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그가 말하는 궁극적 관심이란 참 사람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생의 지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건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이라고 하신 것, 즉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장 소중한 가치인 이것이 가장 소홀히 여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천박한 사고가 우리 사회를 이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들어가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
바울 사도의 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이전에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을 오물로 여기게 된 그는 이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관심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인생이 복잡합니다. 하지만 ‘하나’를 꼭 붙잡은 사람은 강력합니다. 바울은 다른 것을 다 팔아 ‘그리스도’를 샀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어떤 시련도 환난도 그를 예수에게서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8:37)

간신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이들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런 고통을 견디기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주님,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하고 부르짖습니다. 카르멜 수도회의 위대한 개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가 한번은 말을 타고 개울을 건너다가 말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물속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테레사는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이것이 내가 내 친구들을 다루는 방식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테레사는 ‘당신께 친구가 별로 없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군요’라고 대꾸했습니다. 말은 투덜거림이지만, 이 무언의 대화 속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련 속에서도 평온한 까닭은 자신을 종으로 부르신 분에 대한 믿음과, 인생에서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서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 바울은 율법을 따라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에는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법이 그의 외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to dos and not to dos) 사이에서 그는 늘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에 오신 후 법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하나님의 뜻은 가슴에 심어진 말씀이 되었고, 그 법을 행하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의’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수영을 배워본 이들은 알 것입니다. 힘이 들어가면 몸은 반드시 물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힘을 빼야 물의 부력에 의해 몸이 떠오릅니다. 초보자들이 몸에 힘을 주는 까닭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생각에는 무게가 없는 것 같지만, 생각이 얼마나 무거운지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간 까닭은 자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힘을 뺀다는 것을 신앙에 적용해보면 ‘자기 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봉헌합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 부활의 능력
바울은 아직 이런 자리에 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10)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의 심정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은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사랑과 연민이 그를 지배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싶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비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살아내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우뚝 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의 소망입니다. ‘몸 나’는 죽더라도 ‘얼 나’를 살리는 것이 참 사람의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인생의 참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10억 원을 호가하는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질주했던 20대의 폭주족들이 검거되었다지요? 그들은 굉음을 내며 도로를 질주하면서 남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 속에 있는 짙은 그림자가 보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그들은 참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섬김은 서로에게 신이 되는 행위’라는 테레사의 금언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궤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뜻을 알지 못하고 살면 그가 세상에서 누린 부나 지위나 명성의 크기와 관계없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삶의 뜻은 ‘함께 함’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그분을 길로 삼은 사람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들,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하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야말로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세속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중요한 것은 그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나의 일과 사귐 그리고 학문에 그리스도의 숨결을 불어넣을 때, 그것은 우리를 하늘 문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안에 자유가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의 소명은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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