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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모하는 영혼 (시 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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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하는 영혼 (시 107:9)

(시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뱀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하려는 사단의 술책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인 고로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미혹하였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접근할 때 하와도 알고 있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을 건네면서 다가갔습니다. 하와는 평범한 질문이요 대화이기 때문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 질문에 대답하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도구인 뱀의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와는 대조적으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지극히 작은 명령조차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먼저 엄히 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 책망은 매우 준엄했지만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담의 답변을 보면 그는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하와와 하나님께 돌린 데 비해 하와는 그것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범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벗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범죄 이전까지는 벗었지만 벗은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범죄로 말미암아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은 바야흐로 수치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었던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 부끄러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범죄가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두려움은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로 인한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왜소하게 만들어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합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는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뱀에 대하여 저주하시고 그 장래 운명을 예고하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3장 14절과 15절에 하신 말씀은 들짐승으로서의 뱀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주관자인 사단에 대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즉 뱀에 대한 가혹한 저주는 곧 그리스도를 대적할 사단에 대한 저주로서 장차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치명상을 입을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뱀을 저주하신 하나님은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자녀를 생산하는 수고를 더하시고 남편을 사모해야 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에 대해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와 죽음에 대한 선고로 고난의 인생, 종교적 파산이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러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무거운 징계를 하신 하나님은 육적 죽음의 유예와 벗은 수치를 가리워 줄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범죄한 인간을 향한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인간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히9:22).

범죄한 인간이 사는 길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입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유다인의 관원이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유다교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개인적으로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예수를 직접 만나 교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표적 행함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음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바리새인이고 유다인의 관원인 지식층이었지만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육신으로 다시 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즉 성령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던 영혼이 새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중생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들려야 하는데, 이는 자기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진리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죄악으로 타락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독생 성자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지만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를 잘 설명하여 줍니다.   

구원의 은혜의 역사는 통회하는 심령에 임합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으려고 펼 때에  모든 백성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데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겸손하게 받고 그 말씀을 순종할 뜻을 이러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을 받는 자의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말씀 선포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아멘으로  응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들릴 때 그 말씀을 받은 백성은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범죄한 연고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조상들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여 주신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바벨론 포로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이 훼파되었음을 깨닫고는 진정으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의  회개는 이제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할 때가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요시야왕의 성전 수리 사역을 감당하던 대제사장 힐기야는 여호와의 전에서 연보한 돈을 꺼내려다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율법책을 발견하자, 서기관 사반에게 율법책을 발견하였음을 알리고 왕께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에게 나아가 복명하며 요시야가 명한 대로 성전 수리 사업을 준행했음을 고하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였음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사반은 요시야 왕 앞에서 그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사반이 낭독하는 율법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 왕은 곧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는 것은 히브리 관습에서 극한 슬픔과 위기 의식을 나타냅니다(민14:6;수7:6).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새로운 시각에서 예수님의 잡힘과 고난, 그리고 죽음의 진술을 들은 후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죽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메시야를 죽게 동조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눌린 무리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합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 말씀하심으로 구원 받을 자가 

누구인가를 밝히셨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구입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라는 말씀에 따를 때 마음의 가난은 죄의식임을 알 수 있음은 심령에 통회한다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서 자가의 의가 없는 줄 느기는 사람 곧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며 천국은 이런 심령을 가진 사람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두 손을 들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나와서 주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이 눈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눅7:36-50)
세리가 이런 고백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눅18:9-14)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심령에는 만족과 평안이 임합니다

유다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보았습는데 그때에 읽은 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애굽 하여 광야에  거하던 과거 조상의 생활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기억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주 되심과 언약을 상기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율법에 명한 대로 초막절을 행하는 유다 백성은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때까지 그러한 절기 행사를 체험하지  못하다가 초막절을 지킴으로써 큰 기쁨과  즐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기쁨이 어떠한 것인가를 증거하여 줍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심령은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고후 5:13-14)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5: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그런데 은혜는 사모하는 심령에 더욱 크게 임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사모하는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샤카크)는 '뛰다, 달리다, 돌진하다, 뛰어 돌아다니다, 이리저리 달리다(뛰다)'를 의미에서 갈망하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잠 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사 29:8)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 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준비된 그릇대로 채움 받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느 날 엘리사에게 선지자의 미망인이 찾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선지자인 남편이 죽자 빚진 돈을 갚지 못하여 두 아들이 노예로 끌려갈 지경에 이른 불쌍한 과부였습니다. 이 과부는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이 여인에게는 음식과 연료로 쓸 수 있는 기름 한 병밖에는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기름 한 병밖에 없다는 대답을 들은 엘리사는 다시 말하기를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되 빌릴 수 있는 한껏 빌려오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음으로 빌릴 수 있는 한껏 빈 그릇들을 빌려 왔습니다. 빈 그릇의 수효는 곧 그녀의 믿음의 분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신 만큼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빌려 온 빈 그릇에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기름병의 기름을 부었습니다. 아무리 부어도 기름병의 기름은 줄지를 않다가 마지막 그릇을 가득 채우자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빈 그릇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물론 그릇이 더 있었다면 그것도 가득 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름이 넘쳐 바닥에 흐르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도 무가치하게 바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부흥(하야)은 '살다, 생명을 가지다, 살아있다,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다, 소생하다'를 의미하며 복원 회복 회생의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흥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헤로 말미암으며 은혜는 더욱 사모하는 심령에 크게 임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하는 심령으로 사모하며 은혜 받고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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