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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님 부활의 현재와 미래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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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부활의 현재와 미래 (고전 15:50∼58)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 동산 무덤 근처의 여인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과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들.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와 제자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40일 후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그곳에 모여 있던 제자들. 오순절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많은 증인들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너무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매카트니 박사는 기독교의 대적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갈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들의 수중에 남아있는 것은 축 늘어져 죽은 시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전하기 위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처참한 고통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살았다고 거짓말하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난 것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성경 말씀대로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요즘 ‘잘 사는 법’(well-being)에 이어 ‘잘 죽는 법’(well-dying)이 사회적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는 삶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독일에서는 ‘죽음 준비학교’가 세워졌고 프랑스에서는 ‘임종치료학과’가 생겼으며 일본에서도 ‘존엄한 죽음’을 위한 처방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종교를 생각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죽어서 그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유교의 공자도 죽어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죽어 메카에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습니다. 무덤이 텅 비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1. 현재 체험하는 부활의 사건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일 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서도 계속 역사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할 때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죽은 영혼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사람의 영은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면 죽은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부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이 부활하는 것은 부활한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영을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영이 부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2000년 전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오늘날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바리새인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율법을 지키고 의식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마음이 공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확실한 것 같아서 밤에 몰래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하늘에서 온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기적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짜고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만 잘 지키고 의식만 잘 지키면 하늘나라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나같이 늙은 사람이 어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믿음으로 물로 침례를 받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성령이 바람이 불듯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 영혼을 중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육으로 난 아담의 후손들은 아무리 율법과 의식으로 갈고 닦아도 영이 되지는 않는다. 성령으로 나야 영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으니까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반역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나무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믿으면 불뱀의 독에서 낫는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믿은 사람은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들려야 한다는 것이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어떤 사람이라도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성령님이 오셔서 육 안에 죽어있는 영을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의 영을 부활시키고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 속에 같이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죽어서 안 계신 분이 아니라 부활 승천해서 성령으로 내 안에 다시 오셔서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함께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나 깨나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2. 죽을 몸에 나타나는 부활의 생명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질 때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걸머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흉악한 부정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병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저주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지옥에 가게 하는 죽음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의 추악을 위해서 우리의 병을 위해서 우리의 저주를 위해서 우리의 죽음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고 마음에 품고 몸에 짊어지고 묵상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의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거룩한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치료와 건강의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고 천국 영생 부활의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를 영적으로만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부활의 생명이 끊임없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무덤 내 무덤, 예수 부활 내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명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로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고난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싸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해도 예수의 생명이 임했기에 답답함을 이깁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아도 예수의 생명이 내 속에 충만하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실적입니다. 지금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속에 예수의 부활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거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서 죽으신 것을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날 위해서 죽은 것은 나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니 내 영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내 육체도 부활의 생명을 얻어 힘과 능력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소아시아와 유럽 일대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졌을 때 예수의 생명 또한 그 죽을 육체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죽을 고비를 당할 때마다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서 버텨준 것입니다. 아무리 집이 무너지려고 해도 기둥이 튼튼히 버티면 안 무너집니다. 다리가 무너지려고 해도 기둥이 튼튼하면 안 무너집니다. 

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심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고통과 괴로움이 몰려 와도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버팀목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활의 생명을 의지하면 우리가 넉넉히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영혼만 살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도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같이 계셔서 우리의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육체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주여, 부활의 생명으로 내 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내 약한 몸을 강하게 해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이 공포를 이기게 해주시옵소서. 부활의 생명으로 쓰러진 것을 일으켜 세워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때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오늘날도 우리 생활 가운데 실제로 역사해서 크나큰 변화를 우리에게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3. 미래의 부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절로 17절에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지금 죽으면 육체를 벗어버린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낙원에서 기다립니다. 육체를 벗어버린 영혼은 부활의 날까지 낙원에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서 부활의 때가 오면 낙원에 있는 영들이 모두 다 예수님과 함께 내려와서 부활의 몸을 새로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다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육체가 죽으면 낙원으로 가서 낙원에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같이 와서 부활의 몸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런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주님이 천국 백성을 기르는 밭입니다. 우리가 텃밭에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서 채소를 기르고 과일을 기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지구는 하나님이 천국 백성을 만드는 텃밭인 것입니다. 이 지구에서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잘 자라서 올바르게 익으면 천국 백성이 되고 올바르게 익지 못하면 썩어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올바르게 익게 되지만 예수를 거역하면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국 백성을 만들어 내는 텃밭이므로 우리가 텃밭에 사는 동안에 여기에서만 잘 살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언젠가는 이 텃밭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돈도 부귀도 영화도 공명도 청춘도 쾌락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또 가져갈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너무 좋기 때문에 이런 것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텃밭에 있을 동안에 우리의 목적은 천국 백성으로 성장하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착실하게 자라야 합니다. 

똑같은 과일이라도 작게 달리는 과일이 있고 크게 달리는 과일이 있고 잘 익은 과일이 있고 잘못 익은 과일이 있습니다. 잘 익은 과일일수록 값이 많이 나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장차 부활해서 하나님께 더 귀히 여김을 받고 값이 많이 나가려면 잘 익은 과일이 돼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도 잘 드리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말씀을 따라 순종해서 잘 익은 영혼이 되면 부활의 날에 큰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혈과 육을 가지고 “나는 거부가 됐습니다” “나는 박사입니다” “나는 교수입니다” “나는 대통령입니다” “나는 장관입니다”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혈과 육은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받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나서 성령으로 역사한 것만 상속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는 것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한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을 먼저 부활시키셔서 중생하게 해주시고 우리의 육체가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이 어려운 세상에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 영과 육이 함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로 3절에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저녁에 주님이 오실지도 모릅니다. 내일 오실지 모레 오실지 모릅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어야지 ‘주님 오실 때쯤 내가 정신 차리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깨어 기도하는 우리들이 돼야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몸 찢기고 피 흘려 십자가에 매달려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고 미래의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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