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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부활후 사역 (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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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후 사역 (행 1:1~8)


사도행전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누가가 기록하였습니다. 1절에 보면 “내가 먼저 쓴 글” 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먼저 쓴 글이란 누가복음을 의미합니다. 즉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쳤던 모든 말씀과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셨던 일들을 기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부활 그 자체를 증거 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행 1:3)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최초로 나타나신 것을 시작으로 4복음서 전체에서 약 12회에 걸쳐 제자들에게 친히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거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성서의 어떤 교리도 우리 주님의 육체적인 부활보다 더 집요하게 공격을 당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 교리의 위대한 아치에 있어서 쐐기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교리 전체의 구조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지탱되거나 무너집니다. 만약에 부활이 반증될 수 있다면 기독교 신앙은 부서져 가루가 될 것이며 옛날 그리스나 로마의 허무맹랑한 신화보다도 더 신빙성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그의 제일 먼저 하는 그리고 가장 자주하는 공격은 그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셨기에 제자들이 조금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증거하셨습니다. 

2. 회복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상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 고개 들고 서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때 누구 한 사람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막상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얼마나 미안하고 얼굴 들기가 죄송스러웠을 까요? 
제자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연약함 때문에 모두가 다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제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말입니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회복의 사역이라고 해봤습니다. 

무엇을 회복시키셨습니까?

① 평강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말씀이 바로 평안입니다. 눅 24:36절과 요한복음 20:19,21,26절에 의하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마다 하신 말씀이 바로 평강이라는 단어입니다. 요 20:19절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저 원수들의 핍박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등장을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 없는 삶은 두려움과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평강이었습니다.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에게 평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안한 사람, 늘 편치 못한 사람에게 평강은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 셋이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밟고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습니다. 불안해진 두 아이는 벌벌 떨며 울상을 지은 채 건너고 있는데 한 아이는 신이 난 모습으로 태연히 걷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가 물었습니다. 
"얘 넌 겁도 안나니" 
"왜 겁이 나니 이 다리는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만들었단다.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우리 아빠가 설계했는데 뭐가 겁나겠니..." 그렇습니다. 평강은 쥐어짠다고 물처럼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라틴어로 평화를 팍스(pax)라고 합니다. 
팍스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 피스(peace)입니다. 본래 팍스라는 말의 뜻은 쟁취하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정복하고 무찌르고 짓밟고 이겨서 얻어내는 평화가 팍스인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악의 축으로 보았습니다. 
그 축을 제거해야 중동에 평화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라크엔 평화가 없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는 평화 즉 팍스는 또 다른 분쟁의 불씨. 불안의 불씨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샬롬(shalom)은 그 뜻이 전혀 다릅니다. 샬롬의 뜻은 넓고 다양합니다. 안전하다, 잘있다, 행복하다, 정답다, 건강하다, 번창하다, 평화롭다, 번영하다, 쉬다, 평안하다 등 좋은 뜻을 다 담고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당신은 낳을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당신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평강을 주는 것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안전을 보장하고 행복과 평화 건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 죽음을 이기신 예수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은 "평강이 있으라, 평안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최정호 선교사 사역지인 아프리카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폭력 정치를 할 때인 1973년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개신교 지도자 ‘케파 셈판기’ 목사가 7천명이 모인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비밀경찰 5명이 뒤 쫓아와서 총을 뽑았습니다. 
순교를 각오한 ‘셈판기’ 목사는 『오늘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죽기 전에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한 후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셈판기’ 목사가 기도를 끝내고 눈을 떴을 때 비밀경찰의 책임자는 대원들을 데리고 조용히 나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우리에게 평강과 용기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②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반신반의 하였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못 자국을 보여주시기도 했고 제자들과 함께 한자리에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육체로 부활했음을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736년 감리교회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레(John Wesley) 목사는 미국의 조지아 주에서 전도 활동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영국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대서양 한 복판에서 그가 탄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거의 침몰 직전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는 공포에 사로잡혀 떨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독일의 모라비안(Moravian)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전혀 근심 없이 평온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간 요한 웨슬레는 이러한 풍랑 속에서도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데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웨슬레는 자신의 두려움이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을 고쳐주셨습니다. 
막16장 14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은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무엇을 꾸짖었을까요?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었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자기의 살아났다는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고난 받을 때 다 도망쳐 버린 괘씸한 행동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은 한번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부활하신 것을 의심하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 넘어지고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죄와 실수와 잘못이 많을수록 오히려 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꾸짖으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불신을 꾸짖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③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 일곱이 낙심과 절망에 빠져서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베드로 주동자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컸던 그들은 반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자 실망도 컸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목격했으면서도 예전의 직업인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그 곳에 주님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 고 말입니다. 주님의 질문이 주어지는 순간 베드로의 가슴은 주님을 사랑하는 처음의 마음이 불일듯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아니 제자들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을 다시 타오르게 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가슴에 사랑을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여러분 사랑을 회복합시다. 내 마음이 싸늘하게 식은 온돌처럼 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복음송에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에서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 없이는 주님을 믿는 다는 고백도 한낮 공허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집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도 십자가의 험한 길을 기쁨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의 원동력이기에 사랑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부활후 주님은 제자들의 사랑을 회복시켜주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3.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 20:21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명을 수여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마가복음16:15-16절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수여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8절에 언급하신대로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골목길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이 날아와 소년의 눈을 때렸습니다. 친구가 돌을 던졌는데 그것이 그만 한쪽 눈에 명중한 것입니다. 소년은 손으로 눈을 잡고 쓰러졌습니다.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소년의 부모가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크게 다쳤군요 나머지 한쪽도 못쓰게 되어 앞으로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부모는 비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소년은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눈은 잃었으나 머리는 남아 있어요"

소년은 평생을 시각장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자신의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 삶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머리는 남아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소년이 앞을 보지 못했지만 영국의 위대한 경제학자요,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요, 국무위원을 지낸 헨리 포세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해야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항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인 삶을 살 때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가 정말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구나 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그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취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푸대접과 인격적인 모멸을 당하고서도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는 온유함이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가져가며, 오직 주님께서 자신의 변호사가 되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웃이 선하든, 악하든, 훌륭하든, 비열하든, 신자든, 불신자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눈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일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 성도의 마음은 궁핍한 영혼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가장 선한 방법을 짜내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의지는 자신의 희생적인 도움이 요청되는 힘든 상황이 왔을 때 그 일들을 비껴 도망치기를 잘하는 잔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단단히 채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시구나” 라고 알게 되고 인정하고 그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갖게 될것입니다. 

둘째는 직접 부활의 사건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요 선교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교회가 이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은 전하는 사명을 맡은 것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부활절을 기념하는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부활이 전파됩니다.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부활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회복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평강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됨니다.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의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두려움과 불신이 회복되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여 선교를 위해 헌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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