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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기쁨 (눅 1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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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쁨 (눅 15:8~10)


 저는 지난주에 고향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공주사범대학의 유00 교수라는 원로교수가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초등학교 일학년 반 학생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아이는 8살, 어떤 아이는 15살....... 
한꺼번에 다 들어가서 한 반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유00 학생이 바지에다 똥을 쌌습니다. 
(‘똥’은 표준어니까 양해하시고 들으십시오.) 

그러자 같은 반 형들이 유00를 안고 수돗가에 가서 잘 씻어 주었습니다. 
이제 커서 유00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인정받아 총장 후보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가기만 하면 형님들이 “학교 다닐 때 바지에 똥 싼 놈이.......”하면서 놀리는 거예요. 
다른 데에서는 그럴 듯한데 고향에 가기만 하면 체면을 구겨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저 형님들 빨리 죽게 해주세요.” 
아무튼 고향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데 고향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은혜롭게 집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저의 고향 교회는 이렇게 개척되었습니다. 
55년 전의 얘기입니다.  26살의 청년이 읍내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투전에 젖고, 술에 젖고, 인습에 젖고, 미신에 젖은 고향 마을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약방을 차려놓고, 그 약방 마루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어른 교인은 하나도 없었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미라는 것을 아시지요? 
여자 아이들이 밥을 지으면서 가족 숫자대로 숟가락으로 쌀을 퍼서 교회에 가져오곤 했습니다. 이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환이가 아이들에게 쌀 도적질을 시킨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끼를 가져와 죽이겠다고 문지방을 찍었습니다. 
갓 시집 온 아내는 남편과 함께 전도하다가 동네 사람이 지게작대기를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놀라 도망가다가 돌다리를 잘 못 디뎌 물속에 쳐 박히기도 했습니다. 
무지막지한 시골사람들의 행패를 상상할 수 있겠지요? 

딸이 태어나서 5살 되던 해였습니다. 교회에 7-8미터 높이의 종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마다 종이 있어서 초종, 재종을 치면서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몰려와 종을 치고 놀다가 그만 종 방망이가 떨어져 밑에서 놀고 있던 딸, 윤희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이마가 깨져서 피가 철철 흐르고, 아이는 금방 전신이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손수건으로 깨진 이마를 싸매어 들쳐 업고, “이 놈아. 죽지만 말아다오!” 외치면서 30리 길 읍내로 내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등학교 3년 전 학년 우등생에다가, 중앙대 약대 4년 전 학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지금은 약사가 되어 대전에서 큰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개척한 교회가 이젠 두 교회가 되어 200명, 100명의 교회들이 된 것입니다. 
척박한 고향 땅에 울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청년을 보고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이제 원로 장로님이 되어 머지않아 주님 품에 안기겠지만 그가 누릴 영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분의 삶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1. 여기서 ‘잃은 자’란 누구를 말합니까? 

잃은 자란 육체적으로 병든 자를 말할까요? 잃은 자란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를 말할까요? 
잃은 자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할까요? 
아마 듣는 사람이 사회운동가라면 그렇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잃는 자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잃은 자란 영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죄인을 말합니다. 
건강하든 병들든, 친구가 많든 외롭든, 부하든 가난하든 ‘구원받지 못한 자’는 잃은 자입니다. 
이 주장이 확실한지 본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눅15: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15: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15: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다 ‘죄인’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2. 짧은 본문에서 저의 주목을 끄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1) ‘찾도록 찾지 아니하겠느냐?’ 

이 구절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절박감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8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드라크마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의 화폐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헬라의 화폐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한 드라크마를 잃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약 10만 원 정도의 값어치를 잃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경제적인 수치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열 드라크마는 보통 한 세트로 결혼할 때 남자가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에게 주는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이 드라크마 세트를 자랑삼아 머리에 장식용으로 꽂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여인들은 잘 때조차도 이 열 드라크마 세트 장식품을 풀어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빚을 못 갚을 경우라 할지라도 열 드라크마만큼은 차압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고 합니다. 
열 드라크마 세트를 잘 간직한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편에 대한 자기 애정과 수절과 존경의 표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한 세트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남편에 대한 불경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 사랑의 증표를 잃어버렸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이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몹시 초조했을 것입니다. 
유대 서민의 가옥은 창문이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환기를 위한 조그마한 것 하나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집안은 늘 어두웠습니다. 
때문에 이 여인은 불을 밝히고, 집안을 쓸었습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을 때까지 쓸고 또 쓸었습니다. 
이 여인이 당황해하면서 급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여인의 모습은 잃어버린 죄인을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이 메시지를 놓치면 안 됩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① 한 드라크마는 집안에서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먼저 가까이 있는 영혼들에게서 관심을 가져야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먼저는 예루살렘입니다. 
우선 우리는 가족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는........’하다가 우리의 목전에서 그 소중한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의 믿음생활을 점검하십시오. 
저는 여러 일을 겪으면서 교우 자녀들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초조감을 느끼게 됩니다. 
건강하다고, 돈 잘 번다고, 공부 잘 한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이번 총력 전도주일에 ‘엄마의 소원’이라고, ‘아버지의 소원’이라고 자녀들에게 호소하십시오. 

② 한 드라크마는 불행하게도 자기가 잃어버려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절실하게 깨닫기 어렵습니다. 
잘 사는 줄 알 뿐입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줘야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래서 복음은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찾아질 수 없는 실존-이것이 성경이 본 인간 드라크마의 실존입니다. 

③ 한 드라크마는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었으나 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잃어버려진다는 것은 확실히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잊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어졌다는 것은 슬프잖아요? 
본문의 이야기에 나타만 드라크마는 잃어버렸으나 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여주인이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마음에 잊어진 영혼은 없나요? 
너무 익숙하기에, 너무 자연스럽기에, 품고 기도해야할 영혼을 잊지 않았습니까? 

2) 우리의 주목을 끄는 또 다른 구절은 ‘나와 함께 즐기자.’입니다. 
이 말씀은 죄인을 찾는 하나님의 기쁨을 토로한 내용입니다. 
9절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은 반복하여 잃은 영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6절 “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9절 “또 찾은 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23절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경제적으로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푸는 비용이 더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 중 하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성경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그 표현들을 보십시오. 
사62:5절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다음 두 마디의 말 중에서 어느 말이 타당하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는, “자식 팔아 이 물건을 사서 행복하다.” 
다른 하나는, “전답을 다 팔아 자식을 구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후자이지요? 
그런데 요3: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외아들을 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죄 많은 나를 위하여! 
고맙지 않나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의 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성가-난 예수가 좋다오. 

2007년에 우리 한국교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단기 선교를 갔던 형제자매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배 때마다 납치된 아들과 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배형규 목사, 심성민 형제가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한동안 순교당한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애석해했고, 죽인 탈레반을 생각하며 분노했으며, 유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속상해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그러나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봅니다. 
사람은 여러 모양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자살로, 노환으로, 자동차 사고로, 암으로, 교수형으로, 타살로, 건물 붕괴로, 전쟁으로....... 
하루에 200만 명씩 죽습니다. 
이 땅에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의 순교는 축복된 죽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07년도에 우리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 100여년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평가하고 대대적인 기념예배와 행사를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100년이 지난 뒤에 우리의 아들들이, 그 아들의 아들들이 한국교회 200년을 뒤돌아볼 때 어떤 사건을 가장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할까요? 
저는 선교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확신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의 순교사건을 기억하리라고 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가운데 이방 땅, 조국이 아닌 이슬람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사람이 있었노라고, 우리는 바로 그런 믿음의 후손들이라고.” 
그들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복음과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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