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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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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눅 24:1~12) 

부활의 개념

오늘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시다. 겨우내 땅이 꽁꽁 얼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하고 마치 죽은 것 같았는데, 이제 봄이 되자 어느새 화사한 꽃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연두빛 잎사귀들이 마치 죽었던 대지의 부활을 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부활절을 지키게 된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얼었던 땅이 녹고 초목이 꽃을 피우고 잎사귀를 내는 것을 보면서 만물이 소생한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소생이란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소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만물의 소생은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부활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이전의 불완전하고 약한 상태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상태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현재 우리의 몸은 차원이 낮은 몸이어서 병들고, 깨어지고, 노쇠하고, 죽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높은 차원의 몸으로서, 병들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늙거나 쇠하지 아니하며, 죽지 않는 몸입니다. 현재의 몸을 육의 몸이라고 하면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증언합니다. 문을 다 걸어 잠겄으니 누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방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인데도 예수님께서는 방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부활의 몸이 현재 우리의 몸과는 차원이 다름을 말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몸은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몸입니다.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가 돌아왔을 때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하자, 도마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마침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주님을 만져보고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뻐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셔서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부활의 몸이 한갓 그림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주신 부활의 소망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16편은 메시야에 대한 시편인데, 그 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는데,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란 죽어 장사된 사람들을 말하고, 깨어 영생을 얻는 자는 부활에 참여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예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벼나 보리의 처음 거둔 곡식단은 곧 이어서 대대적인 추수가 있을 것을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물론, 심판 때에는 주님을 믿지 않던 자들도 무덤에서 살아나지만 그들은 영벌을 받기 위해서 살아나는 것이므로 성도들의 부활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의 부활에 대하여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 영생은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신령한 몸

사람이 대기권 밖으로 나가려면 외부의 온도와 충격과 기압을 견딜 수 있는 특수하게 제작한 우주선 안에서 특수한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한 준비가 없이는 대기권을 벗어나기도 전에 질식해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보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의 몸은 천국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이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살려면 그곳의 환경에 적합한 부활의 몸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부활의 몸을 입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죽어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므로 육체의 죽음을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제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이르기를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신자들이 부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인즉,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소망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과 유혹을 이기려면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을 믿어봤자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17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럴 염려를 할 것이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원 받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아서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아서 믿을 수 있습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부활해서 영생에 들어갈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아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석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에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 같이 따라서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망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

삼일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한 시간 거리인 기자는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가면 세 개의 웅장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곳에 가서 보았는데, 그 규모가 참으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또 입장료를 내고 그 중 한 피라미드의 내부에 들어가 살펴보고, 바로의 관이 있었다는 장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들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패배의 상징물에 불과합니다. 막강한 권력으로 이집트를 다스렸던 바로들이지만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 진시황제인데, 그는 생전에 자기를 위해 무려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서 지하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서안에서 발견된 병마총이 그것인데, 그 규모가 수천 평에 이르고, 그 안에서 발굴된 실물 크기의 병사와 말의 인형이 8천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병마총이라고 불리는 진시황제의 무덤은 그가 죽음에게 정복당했다는 증거물과도 같습니다. 천하를 통일했지만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 가면 공자를 모신 사당인 공자묘가 있는데, 매년 유교 신자들이 제사를 올립니다. 공자묘는 공자가 죽고 다시 살지 못했음을 말해 주는 증거물입니다. 석가모니가 죽어 다비를 행하고 나자 무수한 사리가 나왔는데, 그것을 여덟 나라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불교 신자들은 진신사리를 대할 때 부처를 대하듯 공경합니다. 그러나 사리들을 남겼다는 것은 그가 죽고 살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공자와 석가모니와 같은 성현이라도 죽음의 위력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유월절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대적들에게 붙잡혀 가시자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주했으며,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나타나서 담대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고 증거했습니다. 공회에 붙잡혀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앞으로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주했던 그들에게 어디서 이 같은 용기가 생긴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사도 요한을 제외한 사도들 모두가 순교로 생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위해 핍박을 받고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에 자기들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엄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기독교 믿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죽어 무덤에 장사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죽은 예수님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과 다른 점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자기의 새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돌을 파서 굴처럼 만든 것입니다. 그 안에 시체를 눕히는 상 위에 예수님의 시체를 향품을 넣은 세마포로 사서 눕혀두었습니다. 무덤의 입구는 돌을 굴려다가 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 해질녘에 장사되셨는데, 안식 후 첫날 곧 주일날 새벽에 여자들이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여자들은 무덤의 돌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가보니 이미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상태였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어쩐 일인가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선 것을 보고는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의 천사라고 하였고, 요한복음에는 두 천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두 천사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온 것은 도의상으로나 인정상으로 볼 때 탓할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여자들은 시체에 향품을 바를 목적이라면 무덤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제 삼일에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듣고서 되돌아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여자들이 천사의 말을 듣고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떠나 달음질하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증언합니다. 이로 인해 여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인류의 사대 성인 가운데 한 분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도덕군자로 알고 존경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높이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들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로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여러 가지의 종교 가운데 하나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더라도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나같이 유대교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백성들의 종교생활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종교인이었으나 메시야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알고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으면 좋은 말만 하니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신이 계신지 안 계신지 알 수 없지만, 신을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안심이 되어서 좋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하셨으면 어떻고, 부활하지 못하셨으면 어떻느냐, 나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을 사회개혁가 정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남미에서 생겨난 해방신학은 예수님께서 억압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득권을 가진 계층을 상대로 전쟁을 해서 억압당하고 가난한 자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해방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민중신학이 되었습니다. 민중신학을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목회를 하지 않고 노동운동이나 정치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상의 도덕률을 말씀하시고 실천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도덕을 가르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셨으나 사회사업을 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주 안에서 모든 사람을 한 형제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권운동을 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아는 사람들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사람들입니다. 

부활로 인한 은총

우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용서 받아 의로운 자가 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영멸에서 영생으로, 지옥 백성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는 성도님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죄와 사망을 이길 뿐 아니라, 주 강림하시는 그 날에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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