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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12) : 루스드라 (행 14:8~10) -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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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12) : 루스드라 (행 14:8~10)

 
오늘의 본문은 바울 사도의 제1차 전도여행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잠시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의 일정을 조망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은 바나바, 바울 그리고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이 함께 했던 여정이었습니다. 

주후46년에 안디옥을 떠나서 48년에 다시 출발했던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안디옥에서 30km 떨어진 실루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싸이프러스)섬에 도착하여 바나바의 고향이었던 살라미에서 전도하고 이어서 바보라는 지역에서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전도한 다음 다시 배를 타고 소아시아 앗달리아 항구에 도착하여 항구에서 내려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수리아 안디옥과 구별)에 도착합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특히 이방인 전도의 문이 열려 많은 이방인 신자의 열매를 얻습니다. 

그후 이고니온이라는 지역을 거쳐 루가오니아 지방의 루스드라라는 도시에 도착합니다. (지도 참고)

오늘의 본문은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중에 주로 복음을 전하는 말씀 사역에 전념하여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장애인(8절-발을 쓰지 못하는 분, 걷지 못하는 분)을 대상으로 치유사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주 사역, 사역의 우선순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만, 말씀 사역과 함께 동반하신 사역이 바로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말씀 사역이 영혼을 돌아보는 사역이라면 치유 사역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돌아보는 사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영혼만 돌아보고 육체를 등한이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흔히 기독교의 사역을 ‘전인 사역’(wholistic ministry)이라고 합니다. 전인 선교(wholistic mission), 전인 복음(wholistic gospel)라는 말도 함께 사용합니다.

오늘은 마침 장애인 주일입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 성도들 모두가 어떻게 이런 장애인 치유 사역 혹은 돌봄 사역에 동참 할수 있느냐는 교훈을 본문을 통해 받고자 합니다. *어떻게 평범한 우리 성도들도 장애인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겠습니까?

1.관심을 가져 주시는 일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바울이 주목하여”라고 기록합니다. 주목은 관심입니다. 여러분은 최근 내 곁을 지나가는 장애인들을 주목하여 보고 그들의 상태에 관심을 가져 본 일이 있으십니까? 우선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 정부 통계에 의하면 정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장애인들만 작년 말(2008년 12월말)로 224만 4천명으로 되어있습니다. 그중에 제일 많은 유형이 지체장애(119만) 뇌병변(뇌손상, 뇌성마비, 뇌졸증 등/23만) 시각장애(22만)청각장애(22만) 나머지는 언어장애, 지적장애, 정신장애, 신장, 호흡기 장애, 장루 장애, 간 장애, 간질 장애등입니다. 등록 안 된 분들을 포함하면 배 이상 약 500만 명으로 인구의 10분의 1이상이 장애인들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선천적 장애인은 아주 적고(10미만) 대부분은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왜 후천적 장애인이 됩니까? 그 원인 순서대로 말하면 출산, 전염, 질병, 산업 재해, 교통사고 등입니다.(최근 이 순서는 뒤집어 지고) 그 말은 우리 모두 장애인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이런 장애인들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시각 장애인의 눈을 만지시고, 청각 장애인의 귀를 만지시고, 일어서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몸을 만지는 일을 금기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회적 금기를 깨트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그들 모두가 정상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터치가 치유의 기적을 가져왔고, 오늘 날의 장애인 사랑운동의 정신적 기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바울도 이런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오늘의 본문에서 동일하게 이런 장애자를 주목하신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은 주목에서 시작됩니다. 전에는 그런 분들을 피하고 다니셨다면 이제 먼저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애인 사역의 시작입니다.

2.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을 주목하며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진 것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 사도가 그에게 제일 먼저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장애자의 인생에서 믿음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바울이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태도에서 발견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롬10:17에서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장애인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실 때 그는 장애인들의 인생에서 그 누구보다 더 확실하고 그 무엇보다 더 안전한 인생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여러 도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물고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더욱 중요하지 않습니까? 장애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는 일은 그분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어떤 도움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도움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복음 주의권 교회들에서 사회 봉사운동이 일어나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책임 의식이 깨어나고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면서도 복음 전도의 우선순위를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장애인 이웃들에게도 가장 본질적인 필요는 바로 이 복음인 것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할 수 있는 도움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먼저 하신 일이 그로 하여금 죄 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셨습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그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영적 필요인 것을 예수께서 아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그는 죄책감의 갈등을 지니고 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우심은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네 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주실 수 있는 도움이었기 때문에 그 일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영적인 도움만 제공하고 이웃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눈감아 버린다면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의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도움을 우리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도 이제 이 걷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을 향하여 명하십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이 부분은 당시의 사도들이 할 수 있도록 위임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행14:3을 보실까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면 그들은 감히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표적과 기사를 바나바와 바울은 행하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의 능력이 아닌 것을 바나바와 바울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적 사건이후 이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앙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 만류하고 제지하는 모습을 이어지는 말씀(행14:11-18)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기적을 행하면서도 이것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들은 한계를 지닌 인간임을 잊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사건에서 바울 사도일행에게 기적을 행하도록 위임 하지 아니하셨다면 사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도움의 방법이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기적을 정의할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기적은 반드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시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했을 때 일어난 기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네 손에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순종하여 그 지팡이를 손에 잡는 순간 바로 그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5병2어의 기적도 “너희들이 가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한 어린아이가 5병2어를 가지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자,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5병2어가 예수님께 드려지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기적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 경제 대 공황을 해결한 해결사는 뜻 밖에도 장애인 대통령, 미국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였습니다. 그가 나이 39세 때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엘리노어가 묻습니다. “당신 왜 포기하는냐?”고. 프랭클린은 “내가 이 몸으로 무슨 일을 할수 있단 말이오?”고 되묻습니다. 엘리노어가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당신의 손이 되고 발이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기적은 일어난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 사회 복지부에서는 행복 노인 주간 보호센터를 통해 치매 노인을 돕는 사역을 감당해 왔습니다. 감사하게도 이 보호센터는 경기도에서 가장 우수한 치매 노인 섬김 센터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금년 장애인의 날을 맞이하면서는 우리 교회 사회 복지부에서는 10명의 장애인을 선정하여 재활 지원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몇 푼의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재활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 사회 한 복판에 당당하게 서도록 지원하고자 하는 사역입니다. 잘 되면, 이 사역을 더 큰 규모로 확대하고자 하는 비전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할 때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기적을 행하실 것임을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금년 장애인 주일을 맞이하여 한번 우리 주변을 돌아보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런 시선, 예수님의 시선으로 장애 이웃들을 주목해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은 미소에서 시작하여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해 보시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 바울처럼 말입니다. 그때 세상은 여러분과 저도 진정 예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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