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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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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 (눅 24:13~35)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 의문을 갖습니다. 사람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가 하는 질문을 가집니다. 봄이 되면 풀들은 새 움을 틔우는데 사람은 죽고 묻히면 끝나고 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입니다. 

부활의 예배에 나오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이 인생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난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엠마오라고 하는 곳을 향해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다음 어떻게 나타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부터 35절까지 길게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으면서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길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오고 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우리에게 성령께서 가르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역시 이를 바로 이해했기 때문에 누가의 손으로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기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사건의 중요성은 승천하신 주님을 우리 육안으로 뵈올 수 없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주님이 우리와 같이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눈으로 본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신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이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본문에 기록되어있는 사건을 재현시켜 봅시다. 빈 무덤을 확인한 바로 그 날입니다. 그 날 오후에 두 제자들이 엠마오라고 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 km, 할머니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말하면 25리가 약간 넘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 정도 거리를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 빠른 걸음이라면 두 시간, 보통 걸음이라면 세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겁니다. 거기 도착했을 때에 하루가 다 가고 해가 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아마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선 듯합니다. 

길을 가면서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기들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 와서 함께 걷게 되니까 다른 사람이 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나타나신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는 이들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본문은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 눈이 가리워졌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들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어쩌면 대화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지금 같이 걷고 있는 분이 자기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주인공일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편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을 맹목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면 눈앞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데도, 증거를 보고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향해서 가는 두 제자들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망을 걸었던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에 죽음을 당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시체마저 없어져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심정은 무거워져 있었습니다. 

전혀, 만에 하나라도 이 제 3의 인물이 자기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주인공일 줄이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우매함 때문에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해도 맞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순간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들 자신이 자기들의 편견에 사로잡혀서 그가 주님이신 줄 보려고 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들을 보지 못하게 내버려 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보다 선명하게 알리시기 위해서, 그 예언을 밝히시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부활하신 주님을 육안으로 뵈올 수 없는 세대의 성도들에게 무언가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뵙지 않는데, 육안으로 보지 않고도 어떻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것인지에 대해서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열심히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다가가셔서 “여보게들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에 그리들 열중하오.”라고 물었지만 제자들은 묻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물으시는 주님을 빤히 보면서도 그가 주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슬픈 표정을 짓고는 말하기를 “당신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 나오면서 요즈음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혼자 알지 못하시오?”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지금 나타나셔서 지금 묻고 계신 그 분이 바로 그 슬픔의 주인공입니다. 말하자면 그 제자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지금 나타나신 그 분 때문입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것은 바로 그 분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나신 주님을 뵙고 있으면서 슬픈 표정을 짓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슬퍼해야 할 순간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으니 “아 주님이시군요”라고 반갑게 맞이하면서 기쁨으로 대해야 할 순간인데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영적인 우매함 때문에 주님인줄 알지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불신앙이 만들어낸 코미디의 극치처럼 보입니다. 그 분을 알아보기만 했다면 왜 슬픈 빛을 띠면서 멈추어 섰겠습니까? 자기들과 대화하시는 분이 살아나신 주님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순간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건을 신앙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순간에 얼마나 염려하고 불평하며 슬픔으로 맞이하는지, 우리와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제자 중 하나 글로바라고 하는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으면서 어떻게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시오?” “무슨 일이지요?” 짐짓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에 대한 일이지요. 그 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그 말하는 것이나 그 행동하는 것에서 아주 능력 있는 선지자였는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소. 

우리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큰 희망을 걸고 살았는데 말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 중의 어떤 여자들이 그 무덤에 가보았더니 시체마저 없어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실으셨다는 천사를 만났다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있는 제자들이 거기 가서 빈 무덤은 확인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무덤을 우리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풍속은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 천에 싸서 동굴을 파고 그 굴속에 들여놓습니다. 그리고는 앞에는 큰 연자 맷돌 같은 돌로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부활의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가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향품을 준비해서 가다가 생각해보니까 “도대체 그 큰 돌을 누가 우리를 위해서 굴러줄 것인가”라고 염려했던 것을 보면 여자 두서너 사람의 힘으로서는 밀어낼 수 없는 아주 큰 돌인 모양입니다. 

새벽 일찍이 나서는 열심은 좋았지만 생각을 깊이 해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했더라면 베드로를 깨워서 가든지 요한을 데리고 가든지 갔을 텐데 열심만 가지고 시작했지 가다가 보니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밀어줄까라는 염려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 여자들은 생각이 짧다고 남자들은 말하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걱정은 기우로 끝났습니다. 가보니까 그 돌이 이미 굴러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보니까 예수님을 뉘였던 자리에 그 예수를 쌌던 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두려워하는 순간에 보니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를 왜 여기서 찾느냐 그가 살았을 때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갈릴리로 가서 그 분을 만나라고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기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정말 ‘걸음아 날 살려라’고 성도들이 모이는 집에 달려가서 이야기했습니다. 

시체는 없어지고 천사가 그러는데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하다더라고. 아마 몇몇 여자들이 함께 갔으니까 서로 말하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앉아서 그 여자들의 말만 믿을 남자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요한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에 가서 봐야 되겠다고 달려갔지요. 그런데 요한 쪽이 나이가 젊으니까 - 달리기는 항상 나이 순서대로 결정되는 것 아닙니까? - 요한이 먼저 도착은 했는데 막상 들어가려고 하니까 좀 그랬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요한이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곧 이어 도착한 베드로가 달려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역시 말 그대로 세마포만 남아있었고 더 이상 천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의 강조점은 그 선지자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지 이미 사흘이나 되어서 나흘째 되면 영혼이 떠나가 버린다고 믿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시체마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들 설명의 강조점입니다. 그의 시체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빈 무덤이 있었고 거기 세마포가 그대로 개켜져 있었고 천사가 나타나서 살아났다고 하지만 사람이 안 믿기를 시작하면 계속 못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벌써 돌문이 열렸다고 하면 그 무언가 일어났었겠거니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이 열렸고 거기 세마포가 가지런히 개켜 있었고 천사가 나타나서 살아나셨다고 말해주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시체 타령입니다. 시체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인간적인, 불신앙적인 그들에게 있어서는 빈 무덤이나 세마포가 남은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천사가 증거를 해도 두 천사가 나타나서 증인 노릇을 했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슬픔만 가중시킨 결과가 되었습니다. 

두 남정이 달려가서 보고 온 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제 3의 인물이 엠마오로 향해서 가던 두 제자를 꾸짖었습니다. “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주님도 답답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설교자는 때로 이렇게 꾸짖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미련하고 답답한 사람보고 시원하고 똑똑하다고 칭찬해주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못 믿느냐고 책망할 때도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책망은 슬퍼하는 사람을 더 슬프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한 것을 믿으라. 그리스도께서 이런 고난을 먼저 받으시고 그 영광에 들어가신다고 성경에 누누이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모세의 글들로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서 말라기에 이르도록 어쩌면 쭉 훑어가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어쩌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발뒤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처럼 해를 끼쳤지만 그 일로 인해서 사탄이 완전히 깨뜨려진 것을 증거하고 어쩌면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말씀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을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의 채찍을 맞고 죽임을 당한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 무리의 죄악을 인해서 먼저 고생을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래서 강도 두 사람 사이에서 죽지 아니했느냐?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기도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밝아져오는 느낌으로 그 설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전에 없던 기쁨이 샘솟아나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가 여자들의 엉겁결에 하는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건 분명히 근거를 가진 이야기구나. 성경에 약속된 대로 성취되어서 주님이 살아나셨구나.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셨구나.’ 

슬픔으로 지친 그들의 마음속에 희망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세한 말씀 풀이를 들으면서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25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다 지나가고 이제 엠마오로 가는 마을 앞에 다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더 가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이 보내고 싶겠어요? 그렇게 시원하게 창세기부터 구약 전체를 꿰뚫으면서 설명해주는 그 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성경이 읽어지네?” 구약세미나로 구약성경을 깨닫게 된 우리교회는 4월 말에 “어! 성경이 읽어지네?” 신약세미나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시지 마시고 이미 해가 기울었는데 뭘 더 가시겠습니까?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유하시고 가십시오.’라며 강권했습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함께 묵었다 내일 가시지요’ 소매를 잡고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가십니다. 집안에 식탁이 마련되었습니다. 누군가 식탁기도를 해야 합니다. 식탁 기도라고 하는 것도 나라마다 다릅니다. 백인들은 가장이 기도를 합니다. 흑인들은 음식을 준비한 주부가 기도합니다. 한국은 목사가 하지요 누구 집에서든지. 

유대인과 한국 사람이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길가는 손님이지만 가르쳤으니까 그 분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분이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기도하는 모습하며 그 떡을 떼어서 주시는 것이 낯익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하시던 바로 모습을 연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이심이 확인된 순간에 주님이 사라져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주님이셨지 길에서 성경 말씀을 풀어주실 때 우리마음이 뜨거웠지 역시 주님이셨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서 다시 25리를, 11 Km 를 달려갔습니다. 

조깅이 부활절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새벽부터 뛰기 시작합니다. 여인들이 달려와서 소식을 전하고 두 제자가 빈 무덤을 향해서 달려가고, 이제 저녁이 어두워졌는데 이 사람들이 다시 25리 길을 달려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열한 시가 넘도록 열 한 사도들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까 그 사람들이 먼저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확실한 것입니다. 

타락 후에 생긴 병적 증상이 바로 남자들이 여자들을 잘 무시를 하는 경향입니다. 여자들이 둘 셋씩보고 와서 증거를 해도 안 믿더니 이제 베드로가 봤다니까 그 때는 믿습니다. 열 한 사도와 모든 성도들이 모여서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두 사람 역시 길에서의 일이며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셨던 주님에 대해서 기쁨으로 증거한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기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이 오늘 우리와 어떻게 교제하시는 지를 말해주고 싶어 합니다. 육안으로서는 더 이상 승천하시고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는지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 합니다. 

언제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 24장에 몇 번 반복해서 말씀하기를 “그들이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니”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는 현장에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수난절의 사건, 십자가의 죽음, 그 새벽의 소식, 할 것 없이 나사렛 예수의 일에 관심을 가진 무리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때 주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길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던 것처럼 지금도 주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무리들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자기 이야기를 즐겨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 이야기를 한다 싶으면 ‘글쎄 내 이야기를 뭐라고 하나’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도 자기 일에 관심을 갖는 무리들을 만나주십니다.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때에 우리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가 인생행로의 어느 지점에 있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와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복된 예배에 참석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길 원합니다. 앞으로 서로 만나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을 바꾸어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에 나오는 본문을 따라 매일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풍성한 이야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매일 본문에 나타난 주님을 알게 되면 그 분에 관해서 무엇인지 나눌 수 있는 것이 준비되고 할 말을 갖게 되면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것입니다. 무언가 새롭게 주님을 만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이야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이 늘 닫혀있으니까 해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입니다. 몇 달 혹은 몇 년씩 같은 구역이나 모임에 함께 지내다보면 세 번, 다섯 번, 열 번 더 들은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오히려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도 좋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축하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좀 성숙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 분이 우리의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더욱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이 그 날 자신을 알리셨습니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심”으로 미련하고 더디 믿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알리셨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기록된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심으로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준비하셨습한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그 불신앙에 어두워졌던 그들의 눈의 비늘들을 벗겨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떡을 떼는 순간에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읽혀지고 설명되고 나누어지는 현장에 주님은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거기서 주님은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리셨습니다. 지난 주일처럼 성찬의 떡을 떼는 현장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임재 하는 순간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믿어 입으로 고백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이 주님의 식탁에 지난 주일처럼 참석하게 될 때에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가운데 함께 앉아 계신 것을 체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님의 임재를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뜨거움으로 함께 해주시리라는 것이 오늘 분문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떡을 떼는 자리에 비록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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