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첫열매 (고전 15:20)

  • 잡초 잡초
  • 344
  • 0

첨부 1


부활의 첫열매 (고전 15:20)
 
 
지난주가 부활절이었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사정상 한 주 연기하여 오늘 부활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날로 여겼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장래일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그런 날들의 유통기한은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절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가 없고,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 받을 일도 아닙니다. 어느 날을 부활절로 지키느냐 하는 문제는 더더욱 비난거리가 못됩니다. 지금은 춘분 이후 첫 보름이 지난 주일을 부활 주일로 지키고 있지만 7세기까지 부활절의 날을 정하는 문제는 동ㆍ서방 교회에서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상기시키는 일에 온 교회가 같은 날을 정하여 한 마음으로 동참하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일 년에 한 차례 거창하게 부활절 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겠지요. ‘계란’을 예쁘게 장식하고 먹는 날 정도로 생각하며 부활절을 보낸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요즘은 이단들이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부활절 계란의 관습을 예로 들면서 기성교회들의 비성경적인 면을 지적하여 어린 신자들을 미혹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부활절 계란의 유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기를 먹지 않다가 부활절 아침에 계란을 나누어 주던 관습에서 유례 되었다는 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시몬이 계란 장수였는데, 십자가를 진후 그의 집의 계란이 모두 무지갯빛으로 변한 이후에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설. 십자군 전쟁 때 남편과 헤어진 ‘로자린느’라는 아주머니가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아이들에게 선물로 나누어주었다가 남편을 찾게 되면서부터 관습이 되었다는 설입니다. 계란 껍데기는 예수께서 갇히셨던 돌무덤을 상징하고 붉은 색칠을 피를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을 뿐더러 부활의 의미를 왜곡하며 이단의 이용물만 되고 있다면, 그런 설들에 기초한 관습을 그 의미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교회가 계속 고수할 필요가 있는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부활절만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날은 아닙니다. 매 주일이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주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매 주일마다 성찬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매 주일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기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의식했겠지요. 핍박 받던 당시 성도의 삶은 바울 사도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고백의 연속이었을 것이므로 매 주일에 부활의 의미가 충만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죽는 삶이 전제됩니다. 성경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넓고 편한 길로 걸을 수 있습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많은 동료들과 함께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은 좁고 협착합니다. 힘써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이어서 찾는 이가 적은 외로운 길입니다(마 7:13-14; 눅 13:24). 비성경적인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날마다 말씀으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지요(고전 9:27). 누구라도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마 16:24). 이처럼 매일의 삶에서 성경대로 살려할 때, ‘자기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그러한 죽음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날마다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간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죽음이 없다면, 부활의 생명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선언합니다(고전 15:20). 첫 열매는 그 다음 열매들을 보증합니다. 성도들의 부활은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을 것입니다. 그 부활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의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는 다릅니다(막 5:41; 눅 7:11, 14-15; 요 11:43-44). 그들은 죽기 전의 상태로 복귀되었다가 다시 죽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체는 죽음 전보다 더 높은 상태였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한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고전 15:42-44). 부활한 몸은 타락 전 아담과 같은 상태로의 회복을 넘어서서 더 고귀한 상태로 높아집니다. 청년기에는 부활의 몸에 대해 그리 귀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될수록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은 큰 소망이 됩니다.

개혁 교회가 강조해온 부활의 의미 중에서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효력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성부께서 부활을 통해 확증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죄의 삯이 몽땅 지불 완료되었고 모든 죗값은 깨끗이 청산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격이 구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고백은 하나님 백성에게 언제나 현재적으로 유효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이 땅에서 겪는 고난과 재앙은 재판관이 정죄하여 구형한 형벌이 아닙니다. 거룩한 자녀답게 성숙해 가도록 도우시는 아버지의 사랑의 채찍입니다. 성경은 이를 참 아들이라면 누구나 다 받는 ‘징계’라고 표현했습니다(히 12:8).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참 자녀임을 감사하고 자녀답게 양육되어 가고 있음을 알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중생한 하나님 백성이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라도, 육신이 연약하고 욕되어서 하나님 백성다운 생각과 말과 행실에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범죄 후에도 진실하게 회개하며 은혜를 붙들기보다 환경과 상황을 핑계하기 잘 하는 조악한 성품의 소유자임이 발각될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서 만사에 웃음꽃만 피는 행복한 일생,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지요. 자기 허물과 죄로 불행과 재앙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죗값’을 치르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 까지 완벽하게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죗값의 만분의 일이라도 스스로 책임지려는 생각은 인간의 도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불완전한 것처럼 모독하는 일입니다. 공짜버스 탄 후에 머리 위에 봇짐을 여전히 이고서 위태롭게 중심 잡으며 서 있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도리 상 몽땅 신세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지라도 그녀는 운전사를 괴롭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짐을 내려놓고 편히 앉아서 가며 감사하는 것이 운전자를 기쁘게 하지요. 그리스도께서 죗값을 조금도 남겨두시지 않고 완전하게 치르셨다면, 내가 갚을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리는 것이 옳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가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상징이 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분의 공로를 믿고 의지할 때, 그분의 의로우심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죗값이 지불되었고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부활의 생명을 가졌다면,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게 왕 노릇하지 못하며, 죄의 세력도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의롭다 함을 받았으나 아직은 완전히 의롭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동안 죄의 세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셈이지요. 성도는 그런 삶 중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삶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어야 할 사람입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힘과 도덕성으로 죄를 극복하려는 하면 오히려 죄에 빠집니다. 그런 방식으로 몇 번 죄를 극복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가벼운 죄는 이겼으나 본질적인 죄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싸울 때는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일에서라도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이기되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이겨야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와 중생뿐 아니라 장래의 복스러운 부활이 그분께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께서 승천하셔서 아들로서 누리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해당됨을 보증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 함께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고 찬송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속죄도, 의롭다 함도, 부활의 생명도 없습니다. 인류는 죄를 짓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죄의 노예가 되었겠지요.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고 무서운 진노가 예배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죄의 세력이 이끄는 대로 즐겁게 따라갈 것입니다(요 3:18). 막연히 죽음을 무서워하여 더욱 죄의 종으로 살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지요(히 2:15).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인류는 소망 없이 죄악과 부패 가운데서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하여 감사 찬양합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