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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신 예수님 오시면... (눅 24: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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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 오시면... (눅 24:33~35)


I. 길가는 나그네 인생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은 하숙생, 나그네입니다. 한번 이 땅에 태어나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낯설은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 종착점은 묘지요 죽음이라. 인류의 삶은 결국 묘지를 향해가는 길고 긴 행렬입니다.

제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에 살아도 한번 숨거두고 나면 그 집에 5일 이상 머물 수가 없습니다. 3일장 아니면 5일장입니다. 요즘은 죽기도 전에 병원 영안실로 떠납니다. 꿩이나 호랑이는 박제를 해서 집안에 두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사람 박제해서 안방에 두는 가정은 일찍이 본 일이 없습니다. 왜요? 인간은 이 땅이 고향이 아니요 이 땅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 떠난 육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끔찍한 흉물일 뿐입니다. 

여러분, 인생 종착점에서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까?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에 바다로 흐르고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에 하늘로 올라가고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분 세상 떠났다고 합니다. 갈 곳이 있으니 떠났겠지요. 그분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 곳이 있더라는 거지요.

때문에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큰 미련을 둔다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다리!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것들 또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도 명예도 지식도 돈도 지나갑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서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나그네가 짐이 많으면 그 여행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신 나그네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 투자 할 줄 압니다. 그것만 영원합니다. 나그네는 자주 길을 확인하고 물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이 바른 길인가?

오늘 본문의 사건은 1절의 말씀대로 "그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날"은 바로 예수의 빈무덤이 발견된 날이요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원문에서는 "보라 그 날에" 감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몹시도 허무하고 또 당황스러웠습니다. 

주님은 또 당신의 죽음의 자리도 지켜주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도망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못 박힌 손을 보이고 옆구리를 보이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 의심쟁이 도마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실망하여 엠마오를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쯤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십 오리라고 번역했습니다만 원어에서는 60스타디아 즉 12km쯤되는 거리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두 제자가 실망과 슬픔에 젖어 황혼녘 엠마오를 향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보게, 나는 정말 예수께서 그토록 허무하게 죽을 줄은 몰랐다네." "누가 아니래, 우리 민초들의 희망이요 백성들의 구세주가 될 줄 알았지." "빨리 발길을 재촉하세. 곧 제자들을 잡아 들여 죽이려 할 것일세."

바로 이때 낯선 길손 한 사람이 어디서 나타나 두 제자와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길손은 두 제자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었습니다. 메시야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조가 없는 종교는 인간구원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이 없는 종교는 구원을 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발길은 엠마오에 다달았고 날은 이미 저물었습니다.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여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과정을 누가는 퍽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길손이 주빈이 되어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4개의 동사들은 오병이어 기적 그리고 최후의 만찬시 사용된 바로 그 유명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즉 기적같은 성만찬을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아니 이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겠습니까?" "아, 선생님" 외치며 안기려 하자 벌써 예수님은 그 자리에 계시질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이었구먼." "아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세.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세나."

공포와 절망, 불안과 낙심에 쌓여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은 희망과 용기, 기쁨과 감격을 안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무거웠던 발걸음이 어쩌면 이렇게도 가볍습니까? 이것이 부활 예수의 신비입니다. 여기까지가 대강 오늘 본문 말씀 엠마오 도상에서 있었던 두 제자의 얘기입니다.

II. 엠마오로 가는 길 : 방황, 낙심, 절망의 길

여기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발걸음 -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모든 인생들의 발걸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 "엠마오"라는 말은 원문에서 "모른다.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입니다.
엠마오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방탕의 길입니다.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 계십니까? 당신은 지금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늘 성경에서 엠마오 길은 "내려가는 길" 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내려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길이었습니다. 

지금 신앙의 열정을 잃었습니까? 뚜렷한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뭔가 불평스럽고 못마땅합니까? 당신은 지금 엠마오 도상에 서 있는 것입니다.

3. 또한 17절에서는 "슬픈 빛"을 띠었다고 기록합니다.
엠마오 길은 슬픔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여, 목놓아 울 수밖에 없는, 눈물의 길,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지금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으십니까? 가슴이 답답하십니까? 그 길이 엠마오 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어차피 너도 나도 나그네, 엠마오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인생 길은 슬픈 대화의 길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의 종착점은 너도 나도 죽음뿐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명예도, 영화도, 부귀도... 죽음은 모든 인간의 종착점이 되어 왔습니다.

죽음이라는 이 숙제 앞에는 진시왕의 불로초 불사약도, 삼천갑자 동방석이의 몸부림도, 철학도, 종교도, 무능함을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영역입니다.

III.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어떻게 우리는 엠마오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절망의 길에서, 슬픔의 길에서,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를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리던 땅에, 기다리던 백성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가셨습니다. 병든 자를 찾아오셨고 죄인의 집을 찾아 오셨습니다. 낙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오시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낙심이 변하여 희망이 됩니다. 절망이 기적으로 바뀌어집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어집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면 죽음의 길이 변하여 영생의 길이 됩니다.

실망과 낙심,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 죽음의 인생 길을 걷고 계신 분 -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일찍이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아무리 화려한 성공일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거기 구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거기 희망이 있습니다.

젊은 설교가 무디는 어느날 정부고관의 장례식 설교를 부탁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장례식 설교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예수께서 장례식 설교를 어떻게 하셨는가?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복음서는 물론 성경 전체를 뒤졌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서 참석했던 장례식 행렬은 모두 깨져 버리고 말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포기, 실망, 낙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생 대학생 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로슈멕도르」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물론 인류역사는 사기극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최대의 비극이 될 것이다.”

기독교는 절망으로 마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무덤으로,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가 소중하지만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 부활이 있고 거기 더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VI. 예수 오시면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 오시면 안보이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 오시면 무미건조하던 삶에 풍요로운 삶이 약속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 오시면 절망의 길이 변하여 빛나는 희망이 됩니다.

따르릉~ 따르릉~ 토요일 아침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설교 제목이 좀 이상해서요" "왜요" "목사님 설교 제목은 늘 긴 문장으로 되어있었는데 오늘은 「예수 오시면」 뭔가 빠진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주일 아침 주보를 들고 강단에 서신 목사님 - 설교 제목을 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예수 오시면 -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잘못된 설교 제목이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어딘가 크게 충격을 받은 목사님 - 이 제목을 몇 번이고 되뇌이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건축을 하다말고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목사님, 하나님 앞에 넋두리하며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어려움 당한 교인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마땅히 도울 길이 없어 안타깝게 가슴을 쥐어 뜯었던 목사님, "예수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불안하고 기쁨을 잃어버리고 교인들에게 선포한 그날, 목사님의 가슴 속에는 절망이 찾아왔고 거룩을 설교하던 그 주일날 무서운 욕망이 이글거리고 있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목사님 "예수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날, 근심, 염려, 문제, 실패를 안고 왔던 모든 교인들도 크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쥐를 잡아 독안에 넣고 빛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완전밀패를 시켜 놓았더니 3분 안에 죽더랍니다. 희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빛을 열어놓았더니 36시간이나 살아있었습니다. 720배를 더 살았다는 거지요. 문제는 희망입니다. 지금은 우리 함께 희망을 사야 할 때입니다.

신학자 에밀 부루너는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에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예수 오시면, 이 땅은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예수 오시면, 당신의 가정은 희망이 넘칩니다. 예수 오시면, 그래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부활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V.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 : 하나님 앞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발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본문 33절입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올라갔습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기회가 지나기 전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어디로 갔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란 뜻입니다. 주전 1000년경 다윗 왕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즉 희망의 길, 구원의 자리,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엠마오 가는 길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즉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으로 갔습니다. 절망을 떠나 희망으로, 낙심을 떠나 기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곳이요, 성전이 있는 곳이요, 제자 공동체 - 교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아픔을 가지고 오신 분 계십니까? 가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분 계십니까? 희망없이 하루 하루 사시는 분 계십니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신 분 계십니까? 외롭고 고독한 인생이 오셨습니까? 

엠마오 도상! 거기는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해야 할 자리,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챤스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나그네 길, 한 가운데 계십니다. 당신의 고난 가운데 동행하고 계십니다.


저 처절했던 유대인 학살 수용소 - 아우슈비치 감옥 벽에는 오늘 찢겨 죽을지 내일 끌려가 비누공장 재료가 될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벽마다 엎드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라고 써넣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 동료들이 가족들이 찢겨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때 한 신앙인이 그 곁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당신과 함께 고난 당하고 있고 당신과 함께 울고 있고 당신과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는 그 자리, 고난 당하는 그 자리 - 하나님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시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 등지고 한없이 한없이 도망가서 외로움에 울고 지쳐 계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부활하신 주님,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등지고 가시던 분 돌아오십시오. 내리막 길로 내려가시던 분 올라가십시다. 내려가는 신앙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활 아침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 신앙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돌아가십시다. 올라가십시다. 하나님 거기 나를 반겨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의 능력이 힘있게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풍요롭게 생명이 더 부요롭게 부활될 줄로 믿습니다.


VI. 눈을 열어 주를 보라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 이상한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왜 여기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몰라보았을까요? 혹자는 석양에 눈이 비춰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이들은 주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을 만나주시리라는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꿈에도 주님이라고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갈릴리 호숫가의 제자들도 처음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 어떤이는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 부활의 주님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아침 여러분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1997년 4월 초에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소실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토리노 대성당의 화재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성당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의' 즉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다음, 그 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나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년 전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여명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구 최후의 날에 무엇을 가지고 도망가겠는가?' 그때 1위를 차지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토리노 대성당의 '예수님의 수의'였습니다. 그리고 2위가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비너스상은 인간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중의 걸작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예술품을 제치고 폭 1m 5cm에, 길이 4m 20cm에 불과한 하찮은 삼베천이 어떻게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주는 증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태리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예술품이나 값비싼 보물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세마포만을 반출했던 것입니다. 당시 그 생생한 모험적 장면이 우리나라 T.V.에서도 여러차례 방영이 되었고 제 눈으로도 똑똑히 보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일은 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경험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만나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당신을 이 시간 만나주십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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