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행 27:27~28:10)

  • 잡초 잡초
  • 358
  • 0

첨부 1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행 27:27~28:10)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생텍쥐페리는 자전적 소설인 '인간의 대지'에서 자기가 직접 겪었던 한 사건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생텍쥐페리 자신이 우편비행기 조종사였을 때에 한번은 야간비행 중에 정상 항로에서 벗어나 바다 쪽으로 편류하게 됩니다.
자기 비행기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 휘발유가 떨어지면 땅인지 바다인지 알 수도 없는 깜깜한 어둠 밑으로 그대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종사와 무전사는 어찌하든지 비행장 불빛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문제는 지평선이 구름 사이에 걸려 있는 밤하늘에서는 그것이 별빛인지 비행장의 등불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방에 무슨 불빛이 보일 때마다 이들은 자기네의 생사를 건 실험을 해 봅니다.
"불 보임, 등대를 세 번 껐다 켰다 하시오."라고 자기가 찾고 있는 비행장에 무전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행장에서는 그들의 요청대로 등불을 세 번 껐다 켰다 합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그 두 사람이 주시하던 불빛은 깜박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행장 등대가 아니라 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실망을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그 조종사는, 즉 생떽쥐베리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손이 미치지 않는 수백 개의 별 가운데에서 오직 하나인 진정한 별, 우리의 별, 홀로 눈에 익은 우리들의 풍경과 우리들과 친근한 집들과 우리들의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그 별을 찾아, 우주공간을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조종사는 밤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진정한 별' 하나, 즉 자기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비행장의 등불'을 그처럼 간절히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구원'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타납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그와 같은 배를 탔던 사람들, 유라굴로라는 풍랑으로 인하여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던 그들이 14일 동안 밤낮으로 그 막막하고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어떤 구원의 빛을 얼마나 간절히 찾고 있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앞서 27장 22절의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라는 바울의 예언대로 드디어 그 구원이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구원은 기대하던 사람을 더욱 낙심케 만드는 환상이 아니라 진짜 등대와 같은 참된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제 나름대로 사람에게 구원의 빛을 비춰 준다고들 하는 '수백 개의 별들', 즉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들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진정한 별' 즉 자신을 죽음에서 살려 줄 수 있는 참 구원의 빛인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 - 사람을 사망의 저주에서 살려 주는 그 진짜 구원의 빛은 과연 어떻게 보이며 어떻게 깜박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1. 참된 구원은 사람의 심령 속에 확신과 평안을 채워 줍니다. 

27장 27절로부터 32절에 "27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 이리저리 쫓겨 가더니 밤중쯤 되어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하고 28물을 재어 보니 이십 길이 되고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이라 29암초에 걸릴까 하여 고물로 닻 넷을 주고 날이 새기를 고대하더니 30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고 거루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31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32이에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는 "열나흘" 동안 "아드리아 바다"를 표류했습니다.
이 '아드리아해'는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 명칭인데 그 당시에는 그레데 섬과 이달리야,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한 가운데 있는 바다를 가리키는 말로서 지중해의 중심지에 해당되었습니다.
"사공들이 어느 육지에 가까와지는 줄을 짐작"한 것은 아마도 해변가의 파도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물을 재어 보다"라는 것은, 납덩어리 추가 달려 있고 길이 표시가 일정하게 되어 있는 밧줄을 물속에 내려서 수심을 재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이 점점 더 얕아지는 것을 보고 그들은 육지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중이라 확인할 수는 없고 일단 "암초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물" 즉 배 후미에 "닻 넷"을 내려서 배를 정지시키고는 "날이 새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 즉 뱃머리 쪽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거루" 즉 거룻배를 몰래 바다에 띄웠습니다.
이것은 사공들이 자기네들만 확실히 살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배는 이미 많이 파손되었고 또 내일 아침에라도 암초에 걸릴지 모르는 위험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지금 육지가 가까운 것이 거의 확실할 때 탈출하는 것이 상수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숙달된 선원들이 떠나 버린다면 배에 남아 있는 승객들은 더욱 큰 위험에 처해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의도를 알아챈 바울은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경고했고,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림"으로써 사공들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 사공들은 그처럼 아직까지도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들려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는 이처럼 항상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3절로 3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33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34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35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36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먹으니 37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륙 인이러라 38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불안해하는 사공들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아주 여유가 넘쳤습니다.
그는 그 배를 타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음식 먹으라"고 권하면서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고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구원받게 될 것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는 기정사실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우선 밥부터 먹고 기운을 차리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졌던 것은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처럼 불안해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식사 전에 바울이 떡을 가지고 "축사하고"란 말은 원래 '감사하고'라는 뜻으로서 예수님께서 디베랴 언덕에서나 다락방에서 음식을 앞에 두고 행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니까 물론 성찬식을 할 수는 없었지만 식사 감사기도는 드릴 수 있는 것이었고, 아마 그 배에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전 처음으로 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바울의 그 감사기도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희도 다 안심하고" 떡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의 숫자는 "이백칠십륙 인"이었다고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큰 배에는 육백 명까지 탈 수 있었던 것으로 역사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바울 한 사람의 구원의 확신이 그 276명 모두에게도 전해짐으로써 그들도 14일 만에 처음으로 평안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짜 구원은 이처럼 사람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구원,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기는 하지만 못 될 가능성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구원이라면 결코 참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구원이란 것은 사람에게 여전히 불안을 남겨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다른 종교의 구원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탈'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데, 성철이라는 소위 고승도 "한 평생 남녀를 속여 미치게 한 죄 때문에... 산 채로 지옥불에 떨어진다."하면서 죽었을 정도이니 과연 불교 평신도들 중에서야 누가 그런 경지에 실제로 도달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천주교에서는 '이행득구'의 구원설을 주장하지만, 평생토록 그렇게 많은 선행을 했다고 해서 '성녀'로 추앙된 마리아 테레사 수녀조차 끝내 구원의 확신도 가지지 못한 채 죽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받은 기독신자는 결코 그처럼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찬송가 201장 가사처럼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주만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구원의 확신을 든든히 가지게 되고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라고 감사 찬양이 절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불신자들로서는 도무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육신의 죽음 앞에서도 지극히 평안한, 정말 신기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보다 더 금세에 대하여 여유 있고 내세에 대하여 안심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직 기독교 신앙만이 그것을 믿는 신자에게 완전한 확신과 평안을 주는 참된 구원의 종교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구원은 다른 사람을 함께 구원받도록 만들어 줍니다. 

39절 이하 44절 말씀에 "39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40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41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42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드디어 "날이 새기" 시작하자 이들의 눈에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정박하기로 결정하고 "닻을 끊어" 바다 속에 버린 후에 "킷줄을 늦추고" 즉 풍랑 중에 키를 붙들어 매어 두었던 밧줄을 풀어 배를 조종하면서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으로 접근해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선원들이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강한 물살이 합류하는 곳에서 모래톱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뱃머리는 그 모래톱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배 뒤쪽은 "큰 물결"에 부딪혀 파손되어 가는 위기상황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염려했습니다.
이들은 그 해안이 섬인지 대륙인지 아직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니 각자 헤엄쳐서 해안에 도착하면 죄수들이 내륙 깊숙이 도망쳐 버릴 가능성이 다분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호송하던 죄수가 탈주하면 자기 목숨으로 대신해야 했으므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지금에는 아예 죄수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것이 사전 예방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제안을 물리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들 역시 각자 헤엄쳐서, 혹은 부유물에 의지하여 해안으로 상륙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 외의 백부장과 군사들, 선원들과 승객들 모두가 다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백부장의 바울을 살리려는 시도는 다른 모든 죄수들을 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는 결과를 낳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생긴 일이지만, 28장 7절로부터 10절까지에도 보면 "7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8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아 어떤 섬에 상륙하게 되었을 때, 그 바울을 통하여 또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 섬의 제일 우두머리였던 "보블리오"를 비롯하여 많은 섬 주민들이 그를 통해 병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안수하는" 것은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신유의 기적을 베풀 때 행하던 대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 섬의 주민들은 '퓨닉(Punic)어' 즉 카르타고인의 방언을 썼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도 기탄없이 전도했던 바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섬에서는 그 어떤 구체적인 복음 증거 행위가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것은 비록 사도라 할지라도 방언 은사가 항상 주어진 것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처럼 의사 전달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대신에 안수기도를 통하여 병을 고쳐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한 사람의 구원은 그 자신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음으로 해서 그 배에 탔던 276명이 함께 구원받았으며, 한 섬의 주민 전체에게 병 고침과 복음 전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헬라인에게나' 또한 헬라어를 모르던 '야만인에게나' 다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해 주셨고, 그렇게 구원받은 바울은 이처럼 또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만드는 일에 사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처럼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구명보트에 타게 되었는데, 자기 가족이, 자기 친구가 아직 구조 받지 못하고 빠져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불난 집에서 간신히 탈출해 나왔을 때 그 불이 옆집으로 옮겨 붙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이웃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지 않고 그냥 멀거니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천천히 전도하자.' - 진짜 구원받은 신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 내가 직접 전도해야 하나? 전도사님이 와서 해 주어야지.' - 절대로 그런 식으로 떠넘길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을 받은 신자는 반드시 곁에 있는 사람도 나와 함께 구원받게 하고 싶어질 뿐 아니라 그것도 한시도 지체 말고 지금 당장 전도하고 싶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52장에서도 노래하고 있듯이, "기쁜 소리 들리니 예수 구원하신다"라고 그 구원의 복음을 확실히 들은 신자는 곧 이어서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온 세상에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나오라 예수 구원하신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구원이 진짜 구원인 줄을 분명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참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로 하여금 반드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별과 같이 빛나는' 전도의 사람으로 만들고야 마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구원은 유일하신 참 신이 누구이신지를 증거해 줍니다. 

28장 1절로 6절에 "1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2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3바울이 한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4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5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6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섬의 이름인 "멜리데"는 '피난처'란 뜻인데 당시의 뱃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 섬은 오늘날의 '말타'인데 바로 이탈리아 남쪽에 있는 시실리 섬에서 더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토인"이란 여기서는 무슨 '미개한 종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섬의 '원주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페니키아인 혈통에 속한 종족으로서 헬라어를 쓰지 않고 있었으며 아주 미신적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바울 일행을 "동정"하여 "영접"해 주었는데, 바울이 나뭇단을 불에 넣다가 독사에 손을 물리자 이구동성으로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다. 바다에서는 구원받았지만 공의가 결국 여기서 그를 죽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공의"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메시스', 소위 '복수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 속에는 그들의 종교관에 내포된 '인과응보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에게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저희가)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하신 약속이 바울에게 정확하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들은 "돌려 생각하여" 즉 해석을 달리 하기를 "이 사람은 신이구나."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당시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이 공유하고 있던 신관, 즉 범신론 사상이 반영된 말이었습니다.

그 섬의 주민들이 믿던 소위 '정의의 신'이란, 살인자를 바다에서 죽이는 데 실패하고 이제 그 살인자가 섬까지 살아 도망쳐 온 후에 재차 죽이려고 시도해 보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신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 자신 하나만을 기적적으로 구원할 수 있으면 그 정도로도 신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신이란 이처럼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신'이며 '자신의 목숨만 겨우 지키는 무력한 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상종교들 역시 똑같지 않습니까?
불교의 석가모니는 '너희들이 스스로 수행하고 도를 닦아서 나처럼 불타가 되어라.'고 그 신도들의 구원을 각자가 알아서 하라고 떠맡겼습니다.
마호메트교의 알라는 사람을 구원하기는커녕 소위 '성전(聖戰)'의 미명으로 지금 전 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의 신도들을 '악의 축'의 살인자들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복수' 한 가지만을 사용하여 공의를 이루는 그런 상식적인 신이 아니라, '심판'과 동시에 '구원'까지 행하심으로써 완벽한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스스로를 보존하고 지키는 데에만 바쁜' 신이 아니라, '그 어떤 악한 죄인이라도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 어떤 절망의 상황에서도 택자를 구원해 주시는' 일에 조금의 실수조차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정말 달라도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인을 심판하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성자께서 대신 죽으신 실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구원이었습니다.
이 십자가 구원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는', 실로 만민에게 비취는 구원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이런 구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사랑하시고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살려 주신다.'는 이런 구원을 우리에게 준 다른 신이, 다른 종교가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 기독신자들은 찬송가 40장에서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고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바로 "주 하나님 독생자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네"라고 그 베푸신 위대한 구속사를 반드시 기억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놀랍고도 고마운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유일한 신이심을 더욱더 확증해 주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음의 공포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해 줄 '진정한 별', 찾기만 하면 절대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따라갈 '등대의 불', 자기의 생명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는 진짜 비행장인 것을 틀림없이 보여 줄 그 '구원의 빛'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여전히 시행착오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유일한 구원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밝히 비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상의 별만 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구원의 빛은 온 세상을 향하여 어떻게 반짝이고 있습니까?
그 빛은 그것을 보고 찾은 자에게 든든한 확신과 완전한 평안을 틀림없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구원을 체험한 자는 다른 사람도 함께 구원해 주려고 절로 발벗고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오직 참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으며 행하시고 계시는 위대한 역사인 것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진짜 구원은 단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야말로 정말 우리가 보고 찾아가야 할 '생명 등대의 빛'이며 꼭 도달해야 할 '안전한 포구'인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신들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기 쪽에서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우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 편에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고 일방적인 언약을 베풀어 주셨으며 그 택자구원을 당신의 계획하신 그대로 완전히 성취하고야 마시는 유일한 구원주이십니다.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유일한 '이것'임을 믿음으로써, '마침내 다 구원을 얻으니라' - 믿는 자신과 또한 자신이 전도해서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시는 영생 구원을 '마침내 다'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