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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왈주일] 복음의 핵심인 부활 (행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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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핵심인 부활 (행 4:1~4)


(행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부활을 믿습니까? 과학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고 최첨단의 기술들이 우리의 삶의 부분 부분을 모두 구속하고 있는 시대에도 이 질문에 "아멘"으로 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은 희망적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부활이 당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대답을 망설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믿지만 오늘날 나를 향한 부활의 의미를 새겨보지 않아서입니다.
  
사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이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죽음으로, 고난으로, 절망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우리 모두 그분의 부활 없이는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존재합니다. 소망중에 살고 있습니다. 이만큼 부활은 개인이나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 아침에 부활이 주는 오늘날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보고자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과 관련하여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활은 우리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질적으로나 교리면에서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기고 믿는 성도들을 그 몸의 지체로서 여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생명이요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신앙이 시작되고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도록 돕는 역할을 교회가 합니다. 신앙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믿음이 잘 자라납니다. 교회없이 믿음을 지속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 겁쟁이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체포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열심히 따르던 제자 베드로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죽는데에도 함께 가겠노라'고 큰 소리쳤지만 막상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자 계집종 앞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자신이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저주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모두 두려움에 떨며 숨어서 걱정스럽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도마와 같은 제자는 철저하게 부활의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나약하고 소심하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계집종앞에서도 두려움에 떨며 부인하던 베드로가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재판대에 세우고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 베드로는 전과 다르게 당당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느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여져서 여기 서 있느니라." 베드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많은 박해자들이 쫓아다니며 온갖 방법으로 위협하고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지만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를 증거합니다. 잡아다가 매를 때려도 또 예수를 전합니다. 감옥에 가두웠다가 풀어놓으면 또 예수를 전합니다. 무엇이 겁쟁이들을 이렇게 강한 용사로 변화시켰을까요?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이 큰 사실을 빼놓으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종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엄청난 박해와 음모속에서 역사속에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고 다 흩어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사람들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겁쟁이가 용기로 충만한 용사가 되었습니다. 의심꾸러기가 믿음으로 충만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박해자가 변화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던 이기주의자들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우고 본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던 미숙한 이가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2. 부활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교회가 전파하는 하나님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입니다. 2절에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고전 15:3,4에서 '내가 받은 것을 머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활은 초대교회의 설교와 전도의 핵심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같이  부활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설교 주제도 부활이 거의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최고로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사망권세를 쥐고 위협하는 사단의 세력에 대한 최대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최고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최대의 역전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천국의 약속에 대한 보증과도 같습니다.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에수님의 말씀이 모두 진리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바드대의 정신의학자였던 엘리자베스 퀴버라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연구했습니다. 죽음에 거의 가까이 왔던 사람들, 죽었던 사람들 그런 가운데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의식세계 만을 집중적으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계는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었는데 한 종류의 사람들은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하였고 한 종류의 사람들은 터널을 잠시 통과한 후에 환한 빛의 세계에 들어가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시작입니다. 그래서 죽음에도 희망이 있고 죽음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과정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고고한 의식과 삶을 산다하여도 죽음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조 충신이었던 성삼문은 형장에서 "북은 울려 이 내 목숨 재촉인데, 돌아다보니 해는 서산에 빗겼구나.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거늘, 오늘밤 이 나그네 뉘 집에 쉬어갈꼬!"라고 시를 읊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충신이었으나, 죽은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 염려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현대인을 가리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실향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시작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 실낙원을 쓴 영국의 문호 밀턴은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 궁전의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이언 사이드 박사는 죽음을 놓고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마을길을 지나가다가 항상 열려 있는 어떤 상점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창문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자세히 봤더니 창문 밖에다 다음과 같이 써 놓았더랍니다. '내부 수리 중' 

그 후 여러 날 동안 그 가게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내부 수리 중' 이라는 팻말만 붙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인가 가게문이 활짝 열려서 들어가 봤더니 가게 안이 얼마나 멋지게 장식이 되었는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들어가는 손님들마다 아주 기분 좋게 물건을 사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내부 수리중인 것과 같구나.'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고 있다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그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여러분,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이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향한 쉼표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되어 무덤 문을 여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에서의 승리며 교회의 기초가 되고 전파되는 말씀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봄이 되어 정원에 나가 보았습니다. 정원에는 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습니다. 지난해 가뭄이 심하여 나무가 몇 그루 말라 죽었습니다. 그런데 잎이 다 말라 죽은 것 같은 나무중에서 생명이 있는 나무들은 새순이 돋았습니다. 잎이 파랗게 돋아났습니다. 어떤 나무는 꽃을 아름답게 피우고 곧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나무는 아직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부득이 잘라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여러분안에 있다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평안이 넘쳐납니다. 기쁨이 솟아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만약 여러분안에 예수 생명이 없다면 교회생활한지 아무리 오래되어도 변화가 없습니다. 세상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열매도 없고, 영생의 확신도 없고, 평안과 기쁨도 없고, 의의 열매도 맺히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지금 생명의 예수님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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