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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머문 자리 (딤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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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머문 자리 (딤후 4:6~8) 

 
어느 날 점심시간에 이철진 집사님하구 해미 쌈밥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자석에 있는 사람들 대화가 가관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식당에 앉았는데 아주머니들 하구 남자하구 한 다섯 명이 마침 저희의 옆자리에서 고기를 시켜놓고 함께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직장 동료들이었습니다. 한참을 먹다가 오고가는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칭이 “집사님! 집사님!”하더니 새벽기도회 다녀 온 이야기며, 남편 집사님이야기며, 교회 이야기를 합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아하, 교회 다니는 집사님들이구나. 같은 직장 내에서 집사님들끼리 만났으니 참 좋겠구나.’생각하면서 왠지 편한 마음으로 제 아내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습니다. 

얼마 뒤에 바로 그 옆자리 집사님들이 주인에게 음식을 시키는데“아주머니! 여기 소 갈비하고 백세 주 하나 주세요.”합니다. 제 아내와 저는 귀를 의심하면서 서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옆자리를 동시에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상식에서 <백세 주>라 함은 술의 일종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고기와<백세 주>가 함께 나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가관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집사님, 한 잔 받어!”로 시작하더니“마지막 남은 한잔은 집사님 몫이야!”하면서 홀짝 홀짝하는 것입니다. 정말 주위에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듣거나 보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괜히 제 아내와 제가 노심초사하느라고 소화가 다 안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려면 그냥 마시든지 꼭“집사님, 집사님!”하면서 술잔을 주고받으니 민망하기 그지없더라고요.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난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백세 주>라는 상표가 선명하게 붙은 술병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집사님이 어떻고 교회가 저떻고 새벽기도회가 이러니저러니 하던 신앙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 말입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냉면이 질기게 느껴지던지...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머물다가 간 자리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야외놀이 철이 되었습니다만 저마다 돗자리를 들고 삼삼오오 모여드는 공공장소에 가보면 사람들이 머물다간 자리에 언제나 아름답지 못한 흔적을 남기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쓰레기며 음식찌꺼기며 지저분한 자취를 남기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게 냄새만 남깁니다. 그러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한 없이 욕을 먹게 됩니다.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잠시잠깐 머물다간 자리라 할지라도 그 흔적은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의 자리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무엇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시작보다는 끝이 좋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인생을 시작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시작할 때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기쁨을 안겨주며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마무리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마지막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이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그곳을 가보면 숱한 묘지들이 즐비한 데 저는 꼭 습관적으로 그 묘지 앞에 세워진 묘비 문을 읽어 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을 읽어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의 발자취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길게 살았든지, 짧게 살았든지 하는 것은 관심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머물다 간 인생흔적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의 묘비에는 인생의 아무런 자취도 없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는 것만 적힌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묘비에는 그가 평생 나라를 위해 살다가 나라에 목숨을 바쳤다는 애국적인 묘비문도 있습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어린이를 남겨 두고 가니 잘 부탁하네.”라고 친구들에게 유언을 하면서까지 평생 어린이를 위하여 살았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지도 망우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보다 더욱 귀한 묘비 문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름 모를 묘지입니다만 그 묘비에 적힌 내용만큼은 그의 삶의 발자취를 알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길을 달려가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마침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노라.>는 묘비 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삶의 내용이 또 있겠습니까? 

신앙인이 머물다 간 자리는 이렇게 누가 보더라도 숙연해지고 존경스러운 신앙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자취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느 시대나 누구를 막론하고 머물다간 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죄의 발자취만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가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동생 아벨을 돌로 죽인 살인적인 일 외에 그의 삶의 아름다운 모습은 성경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은30에 팔아먹고 남은 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자살로 끝나 버리는 그 인생에 무슨 발자취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죄의 흔적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이런 인생이라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또한 이 세상에는 무의미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목표도 없습니다. 삶의 의미도 없습니다. 성취감도 없이 살았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입니다. 그의 인생의 내용이란 고작 <왔으니 할 수 없이 사는 것뿐이요, 되는대로 사는 것이기에 마땅히 이룰 것도 없음이요, 살만큼 살았으니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로 [므두셀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무려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 정도의 인생을 살았다면 마땅히 남겨 놓은 업적이나 아름다운 일들이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땅한 삶의 내용은 없습니다. 성경 창세기5:25-27을 보면 단지 오래 살면서 몇 백 년 동안 아이만 낳다가 죽었다는 것이 그의 인생흔적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세상에는 실로 신앙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끝까지 달려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갈 길을 알지 못한 채로 순종하며 달려 나가 마지막까지 그 순종의 믿음을 보였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허덕이는 자기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수 없이 망설였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하여 시시때때로 자기를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다가 비록 자신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만 마침내 비스가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주시겠다던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했던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자신의 달려 온 생을 돌아보며 후회 없는 삶의 흔적을 자랑스러워하며 신앙인이 머물다가 간 자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한 사람, 사도 [바울]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 딤후4:6-8을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이제 임박한 자신의 순교를 예언하면서, 자신이 지나 온 생애가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했고, 승리로 가득 차 있음을 고백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자신을 위해 예비 된 영광의 상급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길에 바울처럼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 하겠습니까?

오늘 인생의 마지막 길에 선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먼저는 그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합니다. 이 <선한 싸움>이라는 말은 생명을 걸어야 했던 일들을 말합니다. 이기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절대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지불해야 했던 값은 생명을 걸어야 했을 만큼 고된 것들이었고 이로 얻어 낸 것이 바로 그 값진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인들이 머물다간 자리에는 이런 믿음의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의 고백은 “달려 갈 길을 마쳤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달리기 시합에서 목표지점 즉, 결승점에 도달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 온 바울의 전 생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될 것은 바울이 "내가 달려갈 길을 1등으로 마쳤다.","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만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경주에서는 우승이나 1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달리는 완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여 실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곧이어 10절에서 바울이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과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떠나버렸던 [데마] 같은 사람이 있다고. 그리고 딤전1:19-20절에 보면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착한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대해서 파선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듯이 마지막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달리기 하면 마라톤을 생각하게 됩니다. 42.195km를 끝까지 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모릅니다. [한국 체육 과학 연구원]이 마라톤 선수들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마라토너들은 달리기 도중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지면으로부터 받는 충격이 몸무게의 2.72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한 선수가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하는데 평균 3만보를 뛰는데,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마라톤 우승자인 [황영조 선수]를 예로 들면, 몸무게 55kg×2.72배×30,000보 하면 무려4,488톤의 충격을 받게 됩니다. 더 체감 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3분 1라운드 권투 경기로 치면 [알리]의 1톤짜리 무쇠주먹을 1초마다 한대씩 무려 24라운드2분, 총 74분 동안 4,488대를 얻어맞는 것이 됩니다. 이거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치상으로 보면 거의 살아남기 힘들 정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평생 달리는 것도 아니고 42.195km 달리는 마라톤을 완주하는데 이토록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바울이 말하는 “달려갈 길을 마친다.” 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다. 믿음을 지켜 내는 것이 이런 각오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낸 신앙인이 머물다가간 자리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나긴 길을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던지며 자기의 죽음이 보이는 이 목표지점까지 달려 온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의 백미는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입니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선수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킬 때만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경주에서 믿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총알 없는 총을 들고 전쟁에 나가는 병사와 같을 것이며, 목표점을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제멋대로 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킨 사람들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바램을 소개한다. 신갈 장로님을 소개한다. 병원에 갈 때마다 언제나 교회 이야기를 나누기를 좋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하루 전까지만 해도 불규칙한 의식 가운데도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찬양을 들으면서 평안을 유지하셨습니다. 정말로 이 장로님이 머물다가 간 자리는 진정 신앙인이 머문 자리였습니다. 선한 싸움으로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확신하건대 하나님나라 귀한 곳에 계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신앙인이 머문 자리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신앙인 머문 자리에는 선한 싸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머문 자리에는 끝까지 버리지 않고 굳게 붙잡은 믿음의 자취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머물다가 간 자리에 과연 무엇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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