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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을 보는 사람들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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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보는 사람들 (막 16:1~8)


세상에는 사람들의 인생관을 지배하는 수많은 철학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쾌락주의>요, 또 하나는<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사로잡는 이 쾌락주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느냐를 살펴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쾌락주의의 그 중심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예외 없이 태어난 이상 다 죽는다.”고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이기고 죽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합니다. 그럴 때에 생겨나는 인생관의 극단이 바로 쾌락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 하루하루 실컷 즐기다가 죽자. 먹고 마시자 인생이란 짧은 건데 염치고 체면이고 어디 있냐. 무조건 즐기자.” 한 마디로 될 대로 되라(케세라 세라)는 식으로 죽음을 잊어보려고 하고 잠시라도 도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극단화 된 사고가 쾌락주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와는 정반대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이 곧 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금욕주의의 뿌리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쾌락주의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도피하고 잊으려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금욕주의는 죽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인간의 능력으로 죽음을 정면 돌파해 보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 사람은 어차피 다 죽는 것이 정해진 이치인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자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욕심을 제어하고 좀 더 오래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찾아 헤맵니다.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진지한 열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도 마음은 항상 울적합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있는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만약에 “당신은 한 달 안에 죽습니다.” 라고 하면 아마 누구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마냥 실컷 먹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며 쾌락을 즐기든지 아니면 두려움에 떨면서 만사의욕이 없이 금욕주의적 삶을 살든지 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인생관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문호[괴테]는 “인간의 인간됨은 죽음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온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들면서 “내가 분명히 죽을 텐데 이대로 죽어도 되나” 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사람다워지고 철학적 사고도 생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달라진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세상적 철학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 획기적인 사건이 바로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이 있은 후 죽음에 대한 철학,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죽음이 더 이상 기피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쾌락을 즐기다가 내일 죽자는 것도 아니요,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실 그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기뻐하며 최선을 다하여 살자는 것입니다. 

향락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고, 불의한 일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어두운 미래의식에서부터 벗어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 중에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뀌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부활의 사건을 빼 버리면 죽은 종교가 되고 맙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사건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에 그 역사적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던 것처럼 오늘 부활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우리에게도 믿음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돌아가신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합니다만 위기 때에 여인들의 용기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자들보다 훨씬 용기 있고 굳센 여인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남자들이 좀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도 제자들은 자기들도 붙들릴까봐 다 도망 가버렸지만 여인들은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마자 바로 장례에 쓸 향품을 준비해서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것에 그렇게 집착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사실 향품을 준비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거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향이라는 것이 당시에 죽은 시체가 부패하거나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바르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들도 이미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무덤을 찾은 이 여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다고 믿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시신에 향을 바르며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기 위한 소원으로 향품을 준비했고 무덤으로 달려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 그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향한 사랑, 그것이 이 여인들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게 했고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했고 빈 무덤의 첫 번째 목격자가 되게 했습니다. 옛날에 일곱 귀신 들려서 죽지 못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후로 예수님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이런 마리아에게 예수님 이외에 다른 무슨 인생의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무의미하게 소망도 없이, 이 짓 저 짓 다해 봐도 만족이 없어서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가던 우리를 어느 날 만나주시고 생각지도 못했던 믿음을 주셔서 인생의 전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하신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건만 오늘 그것이 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 절실함이 있어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무덤을 찾았던 그 여인들처럼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보는 사람들은 죽음을 부정하고 피하고자 일시적인 쾌락주의로 사는 자도 아니요,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항상 생각하며 일상생활까지 포기하고 인간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겨보겠다는 어리석은 금욕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언제든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현실에 충실하며 주어진 하루에 기뻐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먼저 우리 속에 그 사랑이 부활되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믿음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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