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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찬송 (계 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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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찬송 (계 19:1~2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이 또한 찬송입니다. 찬송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권능을 만방에 선포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그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크신 사랑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성도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기뻐하시며 마귀는 찬송을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할 때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며 성령 님께서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귀는 벌벌 떨며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삼상16:23절에 보면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그랬습니다.
사울의 마음속에 악신 곧 사탄이 들어와 역사 하니까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하다가 결국은 창을 먼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앞에서 수금으로 찬송을 부를 때에 악신이 곧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사울은 제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악신으로 인해서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종종 사람들이 무슨 일 해 놓고 이런 말을 합니다. ‘아이고 내가 왜 이러지 내 정신이 아닌가 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던지 악신이 들어가면 자신을 알지 못하고 극도로 교만해지던가, 또는 자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포악해집니다. 그리고 좀더 심해지면 정신을 잃어버리고 횡설수설합니다. 정신병자가 별다른 것 아닙니다. 악신의 역사가 노골적으로 나타나면 정신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극도로 교만해진다 던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포악해지는 것은 바로 정신병의 시초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분수를 모르게 하고 절제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을 알게 하며 절제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성도는 자기의 분수를 알고 언제나 겸손하며, 감정을 절제하여 의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늘 찬송하며 기도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마귀가 들어와 정신을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찬송은 언제나 사탄을 내어쫓는 무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찬송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미움이 사라집니다. 더럽고 추악한 마음이 물러갑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사랑과 평안히 임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힘있는 승리의 찬송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19장은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바벨론 멸망에 대하여 기뻐하는 찬송이고 둘째는 흰말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적 그리스도와 그 군대를 진멸하시고 승리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1.기쁨의 찬송입니다.

1-10절에 보면 “할렐루야”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 아시다시피 ‘여호와를 찬송하세’라는 의미입니다.
1절에 보면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찬송이야말로 정말 감사와 감격과 기쁨에 넘쳐 부르는 힘있는 찬송입니다. 우렁차고 장엄한 허다한 무리의 합창입니다. 이런 찬송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진정한 찬송입니다. 마지못해 부르는 찬송이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따라 부르는 찬송은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오히려 목구멍만 아프고 피곤만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입은 성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력 있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찬송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구원과 영광과 능력입니다.

1절 하반 절에 보면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에게만 영광이 있고 오직 그에게만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9:1절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주경 신학자 그레다너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 종말이 이를 때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가 완성되는 동시에 그 자신의 계시적 광채와 권능이 완전히 나타날 것을 내다보며 부르는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궁창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어느 정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이제 마지막 날에는 확실하게, 뚜렷하게 그리고 누구나 알아 불 수 있게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는 것입니다.

2절 초두에 보면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하였습니다. 평상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 행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우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응적 성격을 밝히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후 심판 행위는 적나라하게 보응적 색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바벨론을 비롯해서 죄악된 세상을 온전하게 심판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것은 바벨론이 영원토록 멸망 상태에 처해 있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니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6절 하반 절에 보면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 하시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다스려 왔고 또 세상의 종말엔 그 다스리심을 완전히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행 자지 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옥을 방불하게 하는 혼란하고 고통스러운 죄악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는 탄식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통치 곧 기쁨과 찬송과 영광이 넘치는 천국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으니 ‘할렐루야’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랑이 신부를 영접하여 즐거운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처럼 교회가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무궁한 안식과 영광을 누리게 되는 내세의 복된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9절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복 있는 자는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뿐입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다”고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예비했다는 것입니까? 헬라 원어에는 “그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8절에 보면 “그에게 허락 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의의 옷과 옳은 행실입니다.
그런데 더욱 감사한 것은 이것조차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고 또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 님의 능력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재림하시는가를 오늘 본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백마와 탄 자의 모습입니다.
11절에 보면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백마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어린양과 자비로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오신다.........그는 이제 화목 하려 오시지 않고 땅 위의 모든 거룩치 않은 것을 거스려 싸우려 오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대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뜻이요 우리 성도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2). 권능과 영광의 모습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어린양 곧 죄인의 모습으로, 대속 자로 오셨으나 여기서는 정복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불꽃같은 눈’과 ‘면류관을 쓰신 모습’은 전지전능하시고 만 왕의 왕권을 가지신 권세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피 뿌린 옷을 입으셨다’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한 정복자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예고하시고 경고하신 그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성도들에게는 환희와 기쁨의 승리요,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자들에게는 철창 권세로 내려치는 철퇴와 같이 무섭고 두려운 공포와 고통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포도가 포도즙 틀에서 짓이겨지는 것처럼 비참하고 처참하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최후 승리입니다.

17-21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엄위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패망하고 그 시체들은 내버림이 되어 새들이 먹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신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멸망이 얼마나 처참하고 끔찍한 것임을 비유로 말씀해 주고 있는 반면에 얼마나 완벽하고 철저한 보응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성도들이 얼마나 무시와 조롱을 당하였고 유혹과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참고 인내하여 최후 승리를 맛보게 되니 감격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불신자들과 함께 멸망당할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0절에 보면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만은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상 섬기는 죄를 깨우쳐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고, 그들의 비유나 맞추고, 이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종처럼 속여서 그들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적이라고 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적으로 인하여 주님이 가리어지고 말씀보다 이적을 추구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적을 미끼로 진리에서 결국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최후 승리 얻기까지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여 세마포 단장한 신부로써 혼인 잔치에 다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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