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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셨습니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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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셨습니다 (마 28:1~10)

  
오늘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온 세계 주님을 믿는 백성들이 모두 기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부활을 찬송하며 기뻐하는 축제의 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를 대신하여 값 치르고 사하여주신 주님께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권세를 부여하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예수를 믿는 백성들은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도 없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매우 흥분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고 거기에 더하여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와 같은 주님의 권세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적용되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면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고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모든 이 세상을 떠남이라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진행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격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장면 속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가게 되고 거기서 부활의 첫 번째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이 그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부활의 내용을 또 다시 전하러 가게 되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이 되던 날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수습하려는 마음으로 향유를 가지고 갔던 것이죠. 그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번개와 같고 그 옷이 눈같이 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깜짝 놀라고 무서워 떨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는 이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깜짝 놀라고 있는 여자들에게 천사가 말씀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런데 그가 여기 계시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신 곳을 보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누우신 곳을 보니 성경의 여러 구절을 같이 합해서 볼 때 거기는 예수께서 누우셨던 자리에 세마포만 남겨져 있는 거죠. 예수님이 시신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천사들이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셔서 그 자리를 떠났고 예수님을 싸고 있었던 세마포만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이제 가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니 거기서 너희를 뵈오리라 라고 그들에게 전해라." 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이와 같은 모든 사건들을 생각할 때 천사가 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들은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모든 상황도 그래요. 
그런데 천사가 분명히 말씀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너희는 가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해라.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리고 모든 영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 여인들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죠. 그리고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현장 속에서 느꼈던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열심히 그 사실을 전하러 갑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이었어요. 
하나는 두려움과 무서움과 다른 하나는 기쁨이었습니다. 
'야,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구나!' 
그리고 이제까지 체험해보지 못했던 장면에 대한 무서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을 동시에 복합적으로 품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는데 그들은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이 여인들은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거죠. 

예수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느뇨 하시거늘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얘기합니다.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천사들의 말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모든 정황을 볼 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데 이들의 눈앞에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들은 너무나 감격하여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가서 네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들에게 뭔가 새로운 사명을 줬죠. 
"가서 그들에게 전하라 부활의 사실을 전하고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라 내가 거기서 그들을 보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을 통해서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내용을 생각해봅니다. 
부활의 첫 번째 메시지로 말씀대로 살아나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처럼 부활도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천사가 여자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아노라 그런데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첫 번째로 전해준 천사는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역사는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시는 것도, 자연을 정복하는 것도, 귀신을 쫒는 것도 주님은 단지 말씀하심으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이 주신 말씀-주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우리 삶속에 실천하며 그 뜻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내용대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지하여 때로는 우리 자신의 한계 밖의 일은 깨닫지 못해 이해도 못하고 들어도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4장 5절>이하를 보면 역시 부활의 사건을 다른 '누가'라는 사람이 기록을 하고 있는데 여기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장 6절>을 보면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절, 8절>에 이르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그 말씀을 들으니까 이 여인들이 깜빡 생각이 났습니다. 
'아, 그 때 그런 말을 했지.'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들은 전혀 납득을 못했어요. 전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그 말씀이 들어오기는 들어왔는데 마음에 부딪혀서 전혀 감흥이 없으니까 그냥 스쳐갔던 거예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보니까 깜빡하고 생각이 났던 거예요. 
정말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구나! 그리고 그 말씀대로 되어졌구나! 라고 그들은 지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됩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거죠.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까맣게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은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대부분 기억합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한계 밖의 영역이었어요. 
여러분, 내가 논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한계 속에서 이해하는 겁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내 논리를 가지고는 이해가 안돼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 속에 있는 것만이 존재하고 내 한계 속에 있는 것만이 진실과 지식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 한계를 벗어난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거예요. 그 세계를 우리는 이해하지 못해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위치에 계신 분이죠.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셔도 우리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니 우리는 쉽게 마음을 스쳐가 잊어버린단 말이죠. 분명히 듣긴 들어도 전혀 안 들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거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뜻과 섭리가 내 마음에 이해되지 않아도 그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인정하고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응하여 이루는 놀라운 순종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신비롭고 무한한 세계를 내가 이해하고 믿고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놀라운 세계를 내가 다 이해하고 믿고 납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내가 논리적으로 납득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없어도 내가 그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믿고 따르고 순종할 수는 있습니다. 

믿음이란 내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아름다운 전유물입니다. 내 지혜와 능력의 한계로는 다 추측을 못하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분명히 내 이해의 한계의 범위를 넘어선 분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에 관한한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이 내게 다 이해된다면 주님은 나와 같은 수준이에요. 주님이 나와 다른 수준이기 때문에 주님은 나의 한계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시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모든 일이 내게 이해되어지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내게 납득되어져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따르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납득이 안 되도 언젠가 납득하게 될 것을 믿고 순종하며 그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이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정확하게 말씀은 우리들에게 변치 않고 실현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두 번째 메시지는 절대 진리의 전파사명성입니다. 
늘 이런 말씀 많이 드리죠. 
절대 진리는 전파에 대한 사명성을 부여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절대 진리라면 우리 마음에는 그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사명이 불어 나오는 것이죠. 

천사들은 뭐라고 얘기합니까? 
빨리 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낙심해있었어요. 예수님이 큰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정복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원래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세상의 권세를 잡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단 말이죠. 
예수님이 그 당시에 정치적인 권세를 잡았으면 그 시대를 풍미하는 분이 되실 수는 있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 우리의 영혼의 구원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한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이제까지, 또 앞으로 영원히 주님 다시 오실 날까지 우리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용서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 못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못 박혀 죽으실 때 그들은 낙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다니던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던 분이 아니구나!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들은 목표를 잃고, 그들은 가야 할 푯대를 잃고 이리 저리 마음이 방황하고 심지어는 이전에 살던 삶의 위치로 내려가고 있었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빨리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사실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님의 역사와 은총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주님의 은혜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지 않았는가? 
내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는가, 아닌가? 라는 것은 간단해요. 
내가 주께 받은 은혜의 사명, 이것을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의 뜨거운 열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전파의 뜨거운 사명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 충만의 담금질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순간에도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만인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똑같은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기 때문이죠. 

빌립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다보니까 금방 그 마음속에 감격이 있어요. 그래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가서 '우리가 이제까지 기대하고 기다리던 분이 바로 그이다' 하며 예수님을 소개해요.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뭐라고 얘기 하냐면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그 비천한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며 빈축하죠. 
그러나 빌립은 마음이 너무 뜨거웠어요. 
"와 보라" 
한 마디로 그를 제압해버려요. 
말에 제압된 것이 아니라 빌립의 영적인 능력과 확신가운데 제압된 것이죠. 
예수님 앞에 옵니다.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는 사이에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요. 
이와 같은 장면을 보면 빌립은 그가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전파해야 되겠다는 마음의 사명성을 가지게 된 거예요. 

수가성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머물러 있는데 한 여인이 땡 빛-정오에 물을 길으러 와요. 이 사람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으나 정말 모두가 남편이 아닌 이와 같은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대요. 사람 보기 싫었습니다. 사람들이 물 길으러 오는 아침, 저녁에는 올 수가 없었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낮, 정오, 땡볕 가운데 물 길으러 왔어요. 
예수님과 만나 대화하는 사이에 영원한 생명,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어요. 
이 여인은 감격했습니다. 물 길으러 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얘기해서 그들을 설득해서 예수님 앞으로 데려옵니다. 

무슨 역사입니까? 이 여인은 감동을 받으니까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 피해 다닌 여자가 사람들을 찾아가서, 사람들에게 빈축을 사던 여자가 그들을 감동시켜서 주님 앞으로 데려오는 거예요. 놀라운 변화죠. 
이 여인의 마음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은 순간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물 길으러 왔던 그 목적을 잠시 내려두고 오히려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 절대 진리가 주는 전파의 사명성을 느낀 겁니다. 

우리가 중병에 걸렸어요. 어떤 약을 먹고 나았어요.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을 봤습니다. 
"당신 이 약 먹으면 나요." 라는 말을 안 하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절대 진리는 전파에 대한 사명성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진리를 내가 전하고 있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며 내가 절대적인 진리를 체험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 수많은 증인들이 있음을 볼 때, 주의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천사도, 주님도 왜 빨리 가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했을까요? 
주님의 부활은 실의에 빠진 많은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싶어 했습니다. 남은 일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그 일을 하게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그들을 훈련시켜 놨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마음에 용기백배해서 결국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충만을 통해서 그들이 용기를 얻고 나가서 복음을 전해 이 세상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 제자들이 해야 됐단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부활의 사실을 알리라는 것은 두 가지였죠. 
그들을 기쁨가운데 회복시켜주시고, 또 그들을 통해서 남은 그들의 사명을 이루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때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까요? 
아!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가 있어요.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한 후에 하나님이 왜 나를 기쁘게 하셨을까? 
하나님이 왜 나를 감격하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을까를 생각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을 주셨습니까? 
왜 나에게 지식과 지혜를 주셨을까?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것을 사명삼아 그 일을 이루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를 주셨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성품을 주셨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재능을 주셨다고요? 
그것은 통해 기뻐 감사하고 누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이루라고 명하신 은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소식은 인간들에게 너무나 큰 은혜의 기쁜 소식이에요. 
인간의 죽음의 문제,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영원한 문제해결의 생명구원의 역사이지요. 
우리는 이와 같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 하신 천사들의 말,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는 마음속에 새기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복음의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면 전파의 사명성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처음 체험으로 인하여 무서움과 큰 기쁨의 심정인 이 여인들은 주님께서 직접 만나주심으로 이제 그 무서운 마음을 제거해주시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게 했던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장면-그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 
예수님의 부활의 직접적인 모습은 못 봤어요. 그런데 모든 장면의 현상을 볼 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분명해요. 천사들이 얘기했고, 그 모든 정황이 그러해요. 
마음에는 무서운 마음과 기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가 가서 제자들에게 전해라하는 사명을 받고 달려갔다는 말이죠. 그런데 중간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고 두려운 마음을 제거해주셔서 기쁨으로 달려가게 했던 거죠. 
주님의 부활을 전해 받은 이 여인의 심정은 무서움과 기쁨이라는 복합적인 심정이었단 말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심정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었어요. 

어, 예수 믿으니까 이런 것도 있구나! 내가 몰랐던 이런 새로운 세계가 있구나! 
마음이 너무 기뻐요. 감사해요. 감격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생각이 있어요.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이전까지 누리던 것 정리해야 될 텐데, 내가 예수 믿으면 이런 것은 절제해야 되는데... 하는 마음의 부담이 생긴단 말이죠. 
알지 못하는 은혜를 체험하니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체험하니 마음에 기쁨도 있어요. 복합적인 감정이죠. 
믿음이란 항상 이 두 가지 복합적인 생각을 부여하는 거죠. 그러나 그와 같은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가운데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 두 가지 마음가운데 두려운 마음을 주님이 제거해주시는 거죠. 
기도라는 것도 그래요. 

여러분, 기도하실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이번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실 거야. 
그리고 '내가 정말 기도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 뜨거운 용기와 열망이 일어나요. 
그런데 한 마음. '이제까지 내가 기도해서 안 들어진 것도 많잖아.' 
세상 사람이 기도해서 다 들어지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교회에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것 보니까 교회에서 늘 안 이루어지는 일이 많더라고요. 
이런 마음 생각하면 또 한편으로는 의심의 마음도 들어요. 
내가 조금 더 의심하면 너희 구하는 것 받을 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기도해봐야 소용도 없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기도 안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마음이 있어도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마음, 한편으로는 의심되는 마음이 있어요. 그러면 그 때는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다보면 의심되는 마음이 사라지고 확신 속에 기도하게 되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사명을 받고 그 정황을 본 사람들. 
두려움과 기쁨 두 가지 마음이 있었지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달려갔어요. 그 중간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두려운 맘 제거하고 기쁜 마음으로 가서 일을 완수하게 했던 거예요.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내 마음에 100%확신이 없어도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에 의심하는 마음이 제거되고 뜨거운 확신 속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헌신을 해도 그래요. 
기쁜 마음도 있는데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어요. 

'내가 이런 부담스러움만 가지고 헌신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마음이 복합되지만 헌신을 시작하다보면 시간이 가면서 내 마음에 헌신에 옳지 않은 마음들이 제거되어 온전한 헌신이 되는 겁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예수 믿으시죠. 교회 나가보십시다." 
라고 얘기하면, 
"내가 아직 정리가 안돼서 다 정리하고 교회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정리된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 정리될 사람이 오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정리 다 하고 나서 가는 게 아니라 정리할 문제가 많은 사람이 교회 와서 예수 믿다보니까 그 정리 돼야 할 문제들이 정리되어 깨끗한 것이 낫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순백이기 때문에 예수 믿습니까? 
아니죠? 문제가 많으니까 예수 믿고, 예수 믿다보니까 그 문제들이 하나 둘 해결되는 거죠.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복합적인 마음-무서움과 기쁨의 심정을 직접 만나 확증시켜주심으로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온전히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는 어떤 역사가 있었습니까?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역사가 있었죠. 
주님은 높은 보좌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땅에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오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죠.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그를 만나 마음에 확신을 주셨던 겁니다. 
부족해도 출발해야 합니다. 
연약해도 출발해야 합니다. 
100%확신이 안 돼도 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성가대도 생각해 보세요. 
"성가대 좀 하세요." 
"아, 나는 노래를 못 불러서요." 
노래를 못 부르니까 성가대에서 노래를 잘 불러서 그 다음에 영광을 돌리는 거죠. 
노래 못 부르는 사람도 성가대 3년 하면 가수 되잖아요. 
우리요, 주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해서 주의 일 한다고 할 때 내가 온전해져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내 믿음이 온전해져야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부족함과 하나님을 향한 작은 믿음이 있을 때 출발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부족함을 채워 하나님의 은혜의 온전함으로 만들어주시는 거죠. 

주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고 기쁨이 다가옵니다. 따라서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야 돼요. 주님의 은혜는 간접체험이 아니라 직접적인 체험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간증하는 것 듣고 은혜도 받아야하지만, 내가 간증할 수 있도록 나의 직접적인 체험적 믿음을 소유해야 됩니다. 
믿음은 논리로 확신하는 것으로 커지지 않고 체험으로 확신하는 것으로 더 커집니다. 
논리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 속에 제한되어 있어요. 내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내 논리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체험은 내 논리 밖의 일도 체험할 수 있는 겁니다. 
주님이 내 논리 밖의 일도 나에게 체험시켜 주셔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논리라는 게 뭡니까? 
반복적인 체험 속에 일정한 원리가 발견되면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논리로 삼지 않습니까? 
이전까지는 그것을 내 논리로 삼을 수 없었는데 내 한계 밖의 체험을 하다보면 내 한계의 영역이 확장되고 그것이 내 논리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죠.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도 주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입으시기 위해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시는 주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믿음이라는 것은 두 가지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가다보면 주님을 만나 그 한 가지 마음이 제거되고 온전한 기쁨으로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 
너무나 감격스러운 날이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부여하신 날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마르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뭐죠? 영원의 불멸이잖아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육신이라는 장막 집은 무너지지만 그 영혼은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집으로 가죠. 그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죠. 더욱이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은 생명을 소유하는 영혼이 되는 거죠.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권세와 은총가운데 주의 영광을 체험하기를 주님과 더불어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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