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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만약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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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부활이 없다면 (고전 15:12~19)


모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있다, 없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UCC 문화를 선도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입니다.  매주 시청자들이 보내준 신기한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합성이냐 진짜냐를 MC들이 직접 현장을 추적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방송제작진은 출
연자의 발로 뛰는 리얼한 추적을 통해 UCC 속에 담겨진 따뜻하고 사연 있는 이야기를 풀어냄으
로서 대한민국의 특종을 발견할 의도로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보면 정말 신기한 것이 
많습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밝히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는 마을 크기만 한 거
대한 구멍이 있다, 없다?  강원도에는 저절로 생긴 한반도 모양의 지도가 있다, 없다?  엄마 아빠 
큰아들 작은아들이 같은 학과에 같은 학번인 가족이 있다, 없다?  운전면허 시험을 770번 떨어진 
사람이 있다, 없다?  90세에 임신한 할머니가 있다, 없다?  한우 한 마리를 공짜로 주는 마을이 있
다, 없다?  전기료가 없는 아파트가 있다, 없다?  이사하면 삼천만을 주는 마을이 있다, 없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진짜와 가짜가 아주 많습니다.

만약 1세기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당연 화제의 초점이 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의 부활이 있다, 없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그리고 교회역사가 시작된 지 10년 20년이 지난 
뒤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때 부활은 가장 큰 이슈중의 하나였습니다.  부활을 잣대로 신앙을 
규정하였고, 부활의 신앙으로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부활신학에 대해 교회는 거
센 핍박에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때 부활의 논쟁이 가장 크게 일어났던 곳 중의 하나가 ‘고
린도’라는 도시입니다.  상업도시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곳이어서 당연 
부활신앙의 공격이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 영향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성도들을 몹시 흔들어 놓
았습니다.  이런 때 바울은 교회에 편지하면서 부활을 말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
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주님의 부활을 주장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이어진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이란 말로 부활신앙을 강력하게 심어줍니다.  과
연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첫째는 믿음의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확실성을 믿음과 연관에서 강조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이렇게 선포합
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
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이 말
씀은 16절 이하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
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지 못
했고, 주님이 살지 못했다면 믿음이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헛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케논’이
란 말은 ‘내용은 없고 외형만 가진 빈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속이 비어 있는 껍데기란 말
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믿음과 신앙에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과연 어떤 주님을 믿는 것입니까?  주님의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날 위해 오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
음에서 가장 큰 믿음은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하면 제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진정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던 믿음이 바로 부활의 믿음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나중에 부활의 믿음으로 우뚝 
섰습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부활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부활의 확신을 갖고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파하는 내용에 반드시 부활이 들어갑니다.  “생명의 주를 죽
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3:15)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결국 부활에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도 살리신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주님은 마
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부활을 말씀하셨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셨으며, 부활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마르다 만이 아니라 주님을 믿
고 따르는 모든 자를 향한 동일한 질문입니다.  주님을 믿느냐, 부활의 주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본문을 기록한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전합니
다.  그래서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
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
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고전15:1-4)

1세기를 살던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믿음은 바
로 부활의 믿음 즉, 부활신앙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굳게 믿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신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모진 박해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버티고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요, 힘이었습니다.  부활의 믿음에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
하면 진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믿음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
다.  부활의 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분명 부활의 믿음을 믿는 우리에게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분명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믿음으로 능력을 경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거짓증인이 됩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
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이게 무슨 말입
니까?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사기꾼이요, 제자들은 거짓말한 자들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주님의 말씀은 진리가 아닌 것이고, 성경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법정용어를 사용하여 역설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거짓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증인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짓증인은 
언젠가는 탄로가 나고, 진실은 밝혀집니다.  거짓증인은 처벌을 받습니다.  설령 처벌을 받지 않더
라도 불안합니다.  양심이 그를 찌르고, 이성이 그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결국 
탄로가 납니다.

노르웨이가 낳은 유명한 화가가운데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절규’(scream)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노을이 지는 강변에서 한 남자가 
귀를 막고, 입을 열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입니다.  특히 몹시 흔들리는 모습의 그림은 사람의 내면
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작가가 이것을 그리게 된 배경에 이
런 내용이 있습니다.   1893년 작가는 친구와 함께 태양이 지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는 하늘이 돌연 피처럼 붉게 물든 것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순간 초
조해 지고, 공포에 떨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그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배경을 가진 
이 작품은 그 뒤로 유럽사회에 사람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종 표현 되곤 했습니다.  사람
이 공포와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여줄 때 그림이 등장합니다.  특히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하는 자
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정치인이나 공인의 진실공방이 이어질 때 여지없이 그림을 보여주며 거
짓을 풍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증인입니다.  거짓 증인의 거짓증거는 언젠가는 밝혀지게 됩니다.  거짓 증인은 
결국 자기의 거짓말이 발목을 묶어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
다.  거짓증거는 결코 오래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깐 동안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
기 말하는 거짓증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모두가 거짓증인입니다.  그런데 부활
이 거짓이 아닌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참으로 많
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물론 여러분과 저도 포함되어 있
습니다.   또 그렇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청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려고 애를 썼고, 또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
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여전히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늘어만 갑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사
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증인들이 계속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확
실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모두가 거짓증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역사가 부활의 사실을 증명합니다.  제자들
과 바울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앞서간 성도들의 신앙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건
이 모두 사실이고, 성경은 가짜가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거짓증인이 될 수 없습니
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거짓증인이 아니기에 계속해서 부활을 증거하며, 확신을 
갖고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가 불쌍한 자입니다. 
19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
한 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부활을 확신했는데 만약 부활이 없다고 생각해 보
십시오.  눈물과 땀과 피로 부활의 신앙을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헛되게 믿
은 것이고, 헛되게 산 것이고, 지금까지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불쌍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에 결코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고, 축복을 받고, 은혜를 누리며 삽니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사는 은혜가 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산다는 것
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죽지만 
다시 삽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날에 다시 삽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우
리는 종종 장례식에 참여합니다.  거기에서 유족들과 부활의 소망을 위로로 함께 나눕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에 장례식을 ‘영결식’(永訣式)이라고 부르며 죽
음을 슬퍼합니다.  그래서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과 부활을 
믿습니다.  먼저 죽은 자는 천국에 가고 우리 또한 언젠가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
을 믿습니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천국에서 만나보자’입니다.  천국에서 만
나고, 죽은 자가 살고, 우리도 영원히 살기에 불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안에서 사는 것이 복
이 있고, 주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복된 자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다시 산다는 것은 저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도 살아납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때론 죽은 것처럼 누워있고, 절망처럼 침체하고, 고통처럼 낙심할 상황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
다.  주님이 살아나셨기에 우리도 살아납니다.  이것이 1세기를 살던 성도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큰 핍박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보아도 그들은 불쌍한 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일어났
습니다.  결국 모진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기독교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성도들은 지하에서 지상
으로, 하늘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당대에 다시 일어났고, 후대에도 일어났습니다.  
이 믿음이 그들을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앉아 있고, 때론 누워 
있고, 어느 때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일어납니다.  반드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일
으켜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성령이 능력으로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이사
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
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61:3)  하나님이 이렇게 우
리를 세워주십니다.  화관으로 재를 대신해 주실 것입니다.  분명 기쁨으로 슬픔을 대신해 주십니
다.  찬송의 옷으로 근심을 대신해 주시고, 의의 나무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는 
일어납니다.  확실히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하지 않고, 슬퍼보여도 슬픈 자가 아닙니다.  
힘들어 보여도 궁극적으로 우리는 결코 힘들지 않습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여러분의 모든 삶에 충만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만약 부활이 없다면, 믿음의 의미가 없고, 우리는 거짓 증언자이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믿음은 분명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
리는 확실한 진리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쌍한 자가 아니라 가장 행복한 자입니
다.  이 믿음으로 한주간도 부활의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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