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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일어서는 소망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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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서는 소망 (고전 15:50~58)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1:16).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고전15:2-4).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모슬렘의 경전 코란을 보면, 예수님에 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다. 

거기 나오는 기록들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죽은 자들과 살리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다시 재림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에 죽기 직전에 도망쳐,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한다. 이처럼 십자가가 없기에, 부활도 없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예수님이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며,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면서,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기준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기적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의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과 부활이 빠진다면, 헛된 예수, 헛된 복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면, 아무리 예수님을 치켜세우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해도 적그리스도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자로 인정한다. 예수님을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그 안에 구원이 없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구원은 결코 없다. 지금 강단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사라지고 있기에, 기독교가 변질되고 능력이 없다. 알맹이가 빠진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에 불과하다. 이단 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2종류가 있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산다고, 믿는 사람이다.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라고 했다. 수학자 파스칼은 계산을 해봤다. 

만일 인생이 죽음으로 끝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즐길 수 있는, 100여 년을 손해 본 인생이 된다. 그러나 부활이 있어, 영원한 천국이 있다면, 그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 100년은 영원에 비춰볼 때, 있으나 마나하다. 따라서 천국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불행과 행복은, 부활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는 믿음에 달려 있다. 부활(ἀνάστασις)은, ἀνά(다시) + ἵστημι(일어선다)는 뜻이다. 부활이 없다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부활을 믿어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간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부활의 능력은 무엇인가? 

1.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있다(50-53).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썩을 육체는, 천국을 이어 받을 수 없다. 반드시 사람은 죽으나, 부활이 있어야,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런데 부활은 2종류가 있다. 생명의 부활이 있고, 사망의 부활이 있다. 

생명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부활을 말한다. 생명의 부활을 하는 성도는, 천국을 이어받는다. 사망의 부활은, 불신자의 부활을 말한다. 사망의 부활을 하는 불신자들은, 안타깝지만 지옥을 이어받게 된다. 사망의 부활은, 마귀의 자녀들이 받는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미 죽어있던 상태다. 영혼은 살아있으나, 지옥에 갈 영혼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우리 영혼은 생명을 얻어, 이미 천국을 이어 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끝까지 믿음만 지키면, 천국을 이어 받게 된다. 

성도가 죽으면 영혼은 천국에 가고, 육체는 이 땅에서 썩어 없어진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썩은 육체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요, 희망이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길에서 직접 만났다. 

또한 부활의 주님을 이방에 전하는 사명을 받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부활에 대한 비밀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다. 바울은 부활을 비밀이라고 하며, 부활과 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한다. (1) 죽어 썩어질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다(50). 

(2)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잠에서 일어나듯, 다시 깨어나 계속된다(51). (3)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날 때, 썩지 아니하는 우리의 부활이 일어난다(52). 성경을 보면,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경우가 여럿이 있다.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이 다시 살아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났고, 욥바의 도르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유두고가 설교시간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이들은 모두 다, 생명의 부활을 가르쳐 주기 위한 사람들이다. 부활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다. 그런데 우리 부활은 이렇게,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반드시 살아나고 변화된다(53).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은 없다. 부활을 말할 수는 있지만, 부활은 없다. 그 이유는 종교들은, 인간의 소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만 부활의 종교이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사람들처럼, 다시 죽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죽은 성도들이, 다시 썩지 않을 몸으로 살리시고, 살아남은 성도들은, 죽지 않을 몸으로, 변화시키신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썩어지는 몸으로는, 물려받을 수 없다.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려면, 썩는 몸으로는 살 수 없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질병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인생들이,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어야 천국 간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으로, 부활을 바라고, 소망해야 한다. 

2. 부활은 사망과 죄를 이긴다(54-57). 
부활의 능력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사망을 정복한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빠져 살 수 밖에 없기에, 절망하고 슬퍼했다. 그런데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정복하셨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었다. 

여기 (54)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말씀은,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할 것이라”와, (호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니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서 숨으리라.”는 예언의 성취다. 

사단은 죄를 가지고, 인간을 유혹해서 넘어지게 했고, 사망으로 인간을 두렵게 만들었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로 넘어졌을 때 승리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승리했다고 승전가를 불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사단은 패배했고, 그리스도는 승리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꿨다. (56-57)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다. 사망과 쏘는 것이, 부활에게 정복되었다. 부활이 승리의 주역이다.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찾아왔고, 우리가 죄를 죄로 알게 됨은, 율법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은 완성되었다. 율법은 그림자와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실체였다. 구약에서 짐승의 피는, 일시적으로 죄를 덮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죄를 완전히 용서받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해주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율법과 죄가 가져다 준, 사망을 정복하고, 사망이 쏘는 것들을 제거하여 승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여 깨끗하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가 가져 준 사망을 정복하여, 이기게 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용서를 받았다면,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부활의 생명력이 공급되기 시작하면, 죄에 대한 관심이 작동을 멈춘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하는 일에 덤덤해지고, 심지어 부정한 일로 여기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몸을 죄에게 드리지 않게 된다. 

부활 생명을 공급받기 전,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별 흥미도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친구 만나는 재미, 계모임처럼, 친목을 도모하는 재미로, 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갔다면, 이제 거듭나서 부활의 생명을 공급받아 성령이 되었으니,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과 죄와 사망을 이기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율법과 죄와 사망을 다 이길 수 있다. 가장 큰 불행인, 죄와 사망을 정복하고 이기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감사하는 부활절이 되기 바란다. 

3. 현실의 문제를 이기게 한다(57하-58).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긴 시점부터 바울은, 미래의 부활에서 현재의 부활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재 이김을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비로소 이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도, 사망과 죄의 세력을 이긴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김의 질서에 참여한 사람이다. 장래에 이기지 않고, 현재 이긴다. 최고 강자 사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기셨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이긴 힘을,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 베풀어 주셔서, 이기게 하신다. 

고린도 교회는 능력이 많고, 은사가 많은 교회였다. 하지만 교회 내에는, 문제도 많았다. (1) 교회 내에 파당이 있었다(1:11,12). (2) 음행도 있었다(5:1). (3) 성도들 간에 민사상 문제로, 세상 법정까지 가져갔다(6:1). (4)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여,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9:1,2). 

은사문제가 일어나, 은사 대결 양상으로, 혼탁해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12:30,31). 이때 바울이 문제들에 내린 처방이 무엇인가? 그 답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처방한다. 이런 여러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말이다. 부활은 영광의 질서다. 

이렇게 말해보자. 어떤 부인이 목사에게 상담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자신도 맞바람을 피웠고, 남편이 신용카드를 마음대로 쓰기에, 자신도 마이너스통장을 만들어, 팍팍 쓰고 살았고, 남편이 밤늦도록 술집을 순례하며 여흥을 즐기기에, 자신도 춤바람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이 “자매여!, 자매는 부활을 믿느냐고?” 말했다. 부활의 질서에 참여한 자라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했다면, 상담에 대한 답변이 되는가? 안 되는가? 부활은 그 대답이 된다. 이런 면에서 이야기를 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이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부활은 모든 문제를 이기는 힘과 능력을 공급한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있으면, 현실의 모든 문제를, 넉넉히 이겨 나갈 수 있다. 

직장에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도, 부활을 믿는 사람은, 장차 이기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이긴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절대 이기는 삶을 살 수 없다. 부활 신앙을 믿는 사람의 증상은, 문제 앞에서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된다. 다윗의 눈에 거인 골리앗은 작아 보이고, 하나님은 커 보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는, 하나님은 작게 보이고 골리앗은 크게 보이는 법이다. 문제 앞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되기 바란다. 내가 깊이 좌절했을 때에도, 실직하고 사업에 실패했더라도, 아프고 죽을병에 걸려도, 부활신앙은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능력이다. 

부활의 능력을 기반으로, 현실 문제와 어려움을 이겨 나가고, 죄와 사망의 세력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귀한 능력인지 잊지 말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부활로 믿는다면,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활이다. 

내가 아플 때 힘을 주지 못하는 부활이요,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부활이다. 침체된 직장생활의 위기를, 돌파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부활을 왜 믿는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실연의 상처를 받았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부활을 왜 믿는가? 실직했을 때에도, 부활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의 모습이 똑같다면, 그가 믿는 부활이,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인생의 위기 앞에,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달리 은혜를 받을 곳이 없다. 위기와 난관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이 발언하지 못한다면, 그런 기독교는 믿지 말라.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문제는 작게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크게 보이게 만든다. 아무리 자기 긍정의 메시지로, 주문을 외우듯 외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은혜를 받기 원한다면, 십자가 부활에 깊이 빠져들라.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곳이다. 

만일 영어회화 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영어회화를 가르쳐주지 않고, 꽃꽂이를 가르치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면, 그 학원을 계속 다니겠는가? 당연히 다니지 않는다. 영어학원에서는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 그 시간에 영어회화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당장 항의하고, 환불까지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성공 학을 듣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는 타락이다. 다시 돌아가자. 이것이 부흥이다. 부활신앙을 붙들고, 현실의 문제를 이기기 바란다. 

세상 문화에 기죽지 말고 당당하자. 병마와 죽음 앞에 겁을 내지 말자. 사람들의 배반에 연연하지 말자. 성도들이여 일어나자. 우리 함께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며, 다시 일어서는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힘든 이 모든 상황을 이기시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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