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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누구를 찾느냐?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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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찾느냐? (요한복음 20:1-18)


오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감격적이고 소중한 날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시 사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능력과 은총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이 소중한 것은... 그것은 단지 한 개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를 지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그의 부활 속에는 그 어느 것보다 강한 하나님의 멧세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사랑을 이길 수는 없다고...., 세상의 그 어떤 강한 힘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누를 수는 없다고..., 아무리 작고 불안해 보이는 빛이라고 하여도... 그 빛은 결국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이기는 것이라고..., 지극히 작고 꺼져갈 듯한 생명이라도... 세상에 그 생명의 불꽃을 꺼뜨릴 세력은 없다는 것을..., 진리가 거짓에게... 정의가 불의에게... 생명이 죽음에게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새벽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은 그 한 개인의 부활로 국한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마치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지면 그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파장이 일어나고 거기서부터 한없이 동심원이 그려지게 되듯... 예수님의 부활도 바로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비롯해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을 넘어 서서 오늘 이 땅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오늘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며 십자가에 도전하려는 단 한가지 이유... 그 단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곧 옛날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 때 주님의 부활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입증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증거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체험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와 영향력을 가지고 왔나...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 장면은 안식일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 오면서 한 여자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무덤에 가보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순간적으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발길을 돌려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한 제자가 무덤에 가보았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던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무덤 속에 먼저 들어 간 것은 베드로였습니다. 들어가 보니 예수의 시신을 싸매었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각각 가지런히 개켜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 여자가 생각한대로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세마포나 수건을 그렇게 가지런히 놓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수의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첫 번째 장면입니다. 
 
문제는 처음에 예수의 무덤을 찾았던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는 그 여자에게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행방을 알게 될 때까지는 절대로 무덤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 결심이나 한 듯 울면서 무덤 밖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두 번째 장면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마리아가 가만히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누었던 머리와 발 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말을 건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한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그가 그렇게 찾던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동산의 관리인으로 알았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예수가 이렇게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몰랐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그 분의 시신을 치웠다면 어디 두었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하는 마리아의 열정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금 예수가 자기 앞에 서 있는데... '누구를 찾느냐?'고 묻고 있는데... 그러면서 예수는 그녀가 자기를 좀 알아보기를 바라시는데.... 그런데도 마리아는 아직도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다 못한 예수가 이번에는 '마리아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자기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이 달라진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두 번째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의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가 죽었지만... 죽은 예수라도 한번 더 보겠다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았습니다. 새벽잠을 설친 다른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 간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무덤 속에서 흰 옷을 입은 두 천사를 보았을 때.. 그 때에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건넬 때에도 그 분을 동산 관리인으로 알고 있지 예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리아의 무지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마치 신비와 궁금증으로 가득한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야기 속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가 직접 마리아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무덤 속에 있던 천사들도 이렇게 마리아에게 묻지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우리는 이 물음을 어떻게 읽을 수가 있을까요? '이제는 울지 않아도 되는데... 만약에 네가 모든 것을 제대로 알 수만 있다면 울기는커녕 좋다고 춤을 추면서 세상에 다니면서 전할텐데... 이제는 울 때가 아닌데.. 왜 아직도 울고 있느냐?' 우리는 천사들의 물음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진정 기뻐하며 경배하며 찬양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녀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이렇게 예수가 물으실 때 이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네가 지금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혹시 무덤 속에 묻혀 있어야하는... 온 몸에 십자가 위에서 얻은 상처를 지닌 채로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 하는... 죽어 있는 예수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냐?'
 
이렇게 생각해보면 문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예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는 이미 살아났는데 아직도 예수가 죽어 있거니... 그렇게 생각하면서 예수를 죽은 자들 속에서 찾으려 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안목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 앞에 서 있고, 말을 건네기까지 하여도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부활하신 예수가 마리이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처럼 무덤은 비어 있고, 예수를 싸맸던 수건과 세마포는 잘 정돈되어있다고 하더라도.. '아! 예수가 살아 나셨구나...' 우리같이 둔한 사람들이 이렇게 부활신앙에 이르는 데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어 오시는 주님 앞에서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누구를 찾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도 물론 예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수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슬퍼했고... 무덤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무덤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을 말하는 모든 복음서의 말씀이 하나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 속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28:5-6) 그녀들은 예수를 만나러 무덤으로 왔지만, 예수는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다는 것이지요. 
 
마가복음에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16:6)  예수는 이미 살아나셨고 무덤을 떠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 이미 살아나셨는데... 왜 죽음 속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하느냐? 이제 더 이상 예수를 이곳 무덤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들은 영영 예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여기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가 3년간의 사역 중에서 대부분을 보내신 곳입니다. 예수가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은 이전에 예수가 보여주신 역동적이고 능력 있는 삶! 예수는 이미 살아나셨고, 이러한 역동성 속에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가 찾아야 할 예수가 어떤 분인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만약에 예수가 '너는 지금 누구를 찾느냐?' 이렇게 물어 보신다면... 우리는 '예! 주님 저는 부활하신 예수... 무덤 속에 누워있는 예수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오늘도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힘을 주시는 그 예수님을 지금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까지도 이기시고 극복하신... 우리에게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감동을 주시는 부활의 예수! 그 분을 지금 저는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들이 직면한 현실은 우리가 기지고 있는 희미한 믿음조차도 흔들리게 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라든지... 실패에 대한 아픈 경험들... 우리를 두렵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삶의 정황들...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토록 무기력하고 참혹하게 운명하는 모습이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두려움과 상처가 되었던 것처럼...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던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 눈앞에 있는데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처럼...  오늘 현실에 부대끼며 사는 우리들의 마음은 당시에 무덤을 찾았던 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우리들의 연약하고 무지함까지도 헤아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리아가 여전히 주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하자...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 그리고 비로소 마리아는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자기 앞에서 말을 건네시는 분이 자기가 그토록 찾던 예수라는 것을... 그토록 참혹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짓누르던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감동과 능력이 마리아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과 절망을 떨쳐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도피하였던 현실로 돌아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이렇게 자기가 경험한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가진 믿음이 너무 미약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살다보니 마음이 약해지고 많이 흔들려서 '누구를 찾느냐?' 예수가 왜 내게 이렇게 묻는지... 그 물음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다시 한 걸음 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깊은 사랑과 담아서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감격스런 부활의 행렬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마리아처럼 여전히 예수님을 생각하는 열정을 가지고 절대로 하나님을 향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곤고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자신이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스스로 증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생명과 희망으로 가득 찬 부활의 세계로 초대하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믿으면 좋고.. 믿을 수 없으면 할 수 없고... 이러한 가벼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전 존재가 바로 부활신앙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부활신앙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전15:1)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서 전승 받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든 신앙에 대한 토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입니다.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 모두의 삶 속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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