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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능력 (행 10: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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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 (행 10:34~43)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부활의 뒷면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뒷면은 어둠과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역사 속에 사라져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는 통곡을 합니다. 우리 가슴이 매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죽음은 우리를 아프고 슬프게 합니다. 그러나 슬프고 아픈 죽음도 다시 일상생활로 되돌아오면 금방 잊어버립니다. 죽음은 나와 상관없이 뒤편에 있기에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려고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영성 신학자이자 인생의 마지막을 정신장애아들과 함께 살았던 헨리 나우웬이 ‘죽음’에 대한 묵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노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내가 살아온 햇수만큼 또 살 수 있는지 곧잘 계산하곤 했다.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나는 적어도 또 한 번의 스무해를 더 살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서른이 되었을 때에도, 예순까지는 무난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마흔이 되자 여든까지 살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쉰이 넘었을 때는 백살까지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순이 된 지금, 나는 내가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아주 멀리 와 있으며, 내가 태어난 때보다는 죽을 때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는 예순이 넘어서 이 글을 썼고 예순 다섯에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온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갈 때는 언제 갈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온 순서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홀로 고독하게 가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면 왜 그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지 모릅니다.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죽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죽음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어쩌면 가장 잘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얼마나 통탄스러운지 알아야 살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젊은 청소년들에게 죽음을 준비시키고 유언장을 쓰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먼저 시신이 들어갈 관을 나무로 만들고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저기에 누군가 누워있는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면 처음에는 젊은 학생들이 ‘도대체 누가 누워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관 앞에 가서 들여다보면 너무나 낯익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관 밑에 큰 거울을 갖다 놓아 자기 얼굴이 비칩니다. 언젠가는 이 관에 누워있을 것이라고 말하면 청소년들은 쇼크를 받습니다. 자신이 죽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합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온 땅이 황토 빛의 죽은 색이였습니다. 그러나 곳곳마다 꽃이 반발하게 피었습니다. 개나리, 벚나무, 진달래가 피어 세상의 색깔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봄철 새 생명의 푸르름이 아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겨울에는 나뭇잎의 생명의 빛깔을 상상하려 해도 안 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저것을 보라고 하면 한 번 힐끗 보고 말아 버립니다. 자기가 이미 꽃이고 푸르른 나무와 같으니까 꽃의 아름다움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 더 드신 분들은 꽃을 보면 예쁘고 아름다운 생명의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금방 깨닫곤 합니다. 

겨울만 아는 사람이 봄의 찬란한 아름다운 푸름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우린 때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가 돈을 좀 벌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별 볼일 없다가 명예를 얻어 출세를 했습니다. 그래서 뽐을 내면 옆에서 금방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옵니다. “저 친구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모르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가만히 더듬으면 기억이 날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오. 올챙이는 자신이 장차 개구리로 변화될 것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부활의 영원한 세계가 주어진다고 할 때는 상상이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지금의 삶과 비교할 수 없는 마지막 세계가 있습니다. 

이란성 쌍둥이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서로 대화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합니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그랬더니 쌍둥이 오빠가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이것이 전부라니까. 여기는 어두워도 따뜻하잖아. 우리를 먹여주고 살려주는 탯줄만 잘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안전할 거야.” 여동생도 굽히지 않습니다. “아니 이 캄캄한 곳보다는 더 좋은 곳이 있을 거야. 어딘가 다른 곳 말이야.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그런 환한 빛이 비치는 곳이 있을 거야.” 

여동생은 고정관념에 빠져있는 오빠를 설득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말합니다. “오빠 말해 줄게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나는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그랬더니 쌍둥이 오빠는 아주 화가 나서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라구?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본 적이 없어. 너도 엄마를 본 적이 없잖아. 도대체 어떤 녀석이 너에게 이상한 생각을 집어넣은 거니?”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것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니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 여기 있잖아. 여기서 만족해.” 

우리는 살면서 이 땅에 있는 것에 집착하며 하나님께 미래의 영원한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 그 따위 소릴 해? 여기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붙잡고 살면 되지.”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드리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친히 표징을 보여주신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저 하늘의 세계, 이 생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생의 마지막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받는 것으로 인생을 연습하고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궁극적인 세계로 나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사도행전 10:4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책임지면서 살아갈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천국에 꼭 올 것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 사람은 굉장히 열정이 있었는데, 저 사람은 헌신하는 것 같이 보였는데, 그런데 안보이네!’ 두 번째 놀라는 것은 절대로 천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서 보여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와 같은 죄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마 한 가지 더 놀랄 것이 있다면 지상세계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던 놀라운 사실이 천국에서 전개되기에 또 한 번 놀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 세상의 세계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받아야 할 것을 미리 맛보라고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부터 생명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에게 선포하는 복음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보았고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기에 자기 전 생애를 바쳐도 괜찮다고 고백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깨달은 인생의 귀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심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이 예수님을 죽였고 올바른 정의를 부숴버렸다고 합니다. 어둠의 세계 속에서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거짓을 진리로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반대의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죽이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미움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사람을 끌어내리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시기와 질투 속에서 사람을 좌절하게 한다면 
하나님은 소망을 주고 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참으로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생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믿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38) 

성령이란 생명의 영입니다. 
성령이란 자유의 영입니다. 
성령이란 기쁨의 영입니다. 
성령이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이란 사람을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준 것이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으셔서 선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 사람을 위로하는 일, 사람을 기대하게 하는 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을 억압하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기 손아귀에 두고 자율성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삶의 자유의 특권을 빼앗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억눌린 모든 자를 풀어놓으셨습니다. “너는 자유자다.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은 자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임을 보여주셨던 내용이 복음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더 이상 마귀의 자녀가 아니다. 너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주님은 우리의 상하고 아픈 영혼을 만져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질병에 들린 육체를 만지며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고쳐주세요. 내 못된 성품을 고쳐주세요. 내 속에 있는 미움 고쳐주세요. 내 속에 있는 연약함과 질병을 고쳐주세요. 내속에 있는 무절제함을 고쳐주세요. 내 속에 있는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못된 모습을 고쳐주세요. 내 교만을 고쳐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절을 기쁜 마음으로 맞습니다. 부활절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런 축복을 받으며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생명을 향해서 가라. 이제는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여 자유케한 사랑의 역사를 이 땅에서 실천하라.”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내 속에 생명이 없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사랑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축복을 예비로 연습하고 맛보는 것입니다. 하늘의 세계에 있는 생명의 역사, 사랑의 역사를 이 땅위에서 마음껏 누리라고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부활의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내 모습 이대로, 가난한 모습 이대로, 낙심하는 모습 그대로, 상처 난 모습 그대로, 좌절하고 포기하려는 모습 그대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 

여러분, 더 이상 미움을 향해서 가지 말고 사랑을 향해서 가십시오. 자신도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세요. 어둠을 향해서 가지 말고 빛을 향해가세요. 예수를 믿고 나도 빛나고 다른 사람도 빛이 나게 하세요. 

부활의 능력에 감사하며 생명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툼을 향해서 가지 말고 평화를 향해 가세요. 나도 하나님이 주신 평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심어주세요. 죽임을 향해서 가지 말고 살 일을 향해서 가세요.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하세요. 부활의 아침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맞이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돈과 재물을 많이 벌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명예를 얻어서 권력을 좌지우지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돈과 재물, 명예와 권력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일 뿐입니다. 

부활절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우리 마음에 주신 축복의 역사를 확인하며 기도합시다. “하나님, 미움에서 사랑으로 바꾸겠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바꾸겠습니다. 다툼에서 평화로 바꾸겠습니다. 죽음을 넘어뜨리고 인생을 세우고 살리는 것으로 바꾸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봄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사랑의 역사를 이루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하며 인생을 새롭게 꾸며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축복을 주시고 죽음이 아니라 삶의 역사를 주님과 더불어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영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살아가는 복된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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