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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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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부활 주일의 말씀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하신 ‘울지마라’ 는 말씀과 죽어서 관에 누워있는 아들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 고 하신 말씀이 계속해서 제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나인성이라는 이름은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나인성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외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 행렬을 뒤따르는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에게도 한때는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 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럽게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과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과 가난으로 찌든 생활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하루 하루를 살았을까요? 그래도 여인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잘 자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설상가상으로 아들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더 흘릴 눈물이 없어서 흘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 중에는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팔자가 사나운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아들까지 죽으니 이게 무슨 흉한 일이냐’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불쌍한 처지를 알고 장례식을 도왔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장례식은 기후 문제로 당일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갈대로 만든 관에 시체를 누이고 오후 5시나 6시쯤 되면 죽은 자를 메고 나갔습니다. 아들을 잃은 여인은 아들의 관 앞에서 통곡을 하며 걸어갔습니다. 남자들이 관을 메고 뒤를 따라갔습니다. 관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뒤를 따랐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나인성을 향해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마침 통곡하는 여인과 함께 장례 행렬이 성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관으로 다가 가셔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장례식에는 뚜껑이 없는 관을 사용합니다. 그러기에 관에 손을 댔다는 말은 시신에 손을 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손을 싸늘한 시신에 대시고는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이 일어나 앉아서 두리번 거리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슬피 우는 과부에게 아들을 건네주며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통곡의 행렬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환호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이 부활주일 아침에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두 가지의 변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삶이 죽음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며 ‘청년아 일어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체야, 일어서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이라고 말했습니다. 청년이라는 단어에는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청년은 조금 어렵다고, 한번 실패했다고, 병들었다고,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운명주의 관속에 드러 누워 절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무주의 관속에 드러 누워 허우적 거리며 절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청년은 열등의식의 관속에 드러 누워 무기력하게 허송세월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청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청년이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누워있습니다. 청년으로서의 가능성과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청년의 희망을 잃고 죽어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슬퍼하며 통곡합니다. 그 죽은 청년은 어머니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절망을 주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의 원인이 되는 죽은 청년 위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생명력 없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절망 가운데 통곡을 하던 어머니와 주변의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찾았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생명의 행렬을 만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행렬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5장 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죽은 청년이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일본 사람 중에 도모다까 시모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형수였습니다. 일본 정부가 사형수를 일본 북해도 탄광에 보내 일하게 하였습니다. 탄광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절망적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탄광에서 일하는 자신을 면회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된 어머니였습니다. 시모지는 어머니를 보고 짜증을 냈습니다. 아들이 구박을 하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래 내가 돌아가마, 그러나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 하고는 보따리를 놓고 갔습니다. 시모지는 그 보따리를 들고 숙소로 돌아와서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없는 동안에 예수쟁이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재수 없다는 듯이 성경책을 방구석에 던져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보니 함께 지내고 있던 사람들이 성경을 한장 한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삼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전해 주고 간 성경책인데 이놈들이 담배를 말아 피우게 놔둘 수는 없다’ 는 생각에 동료들을 야단치고는 성경을 챙겼습니다. 시모지는 어머니가 가져다 준 성경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석에 이끌리 듯이 눈을 성경에서 뗄 수가 없었습니다. 시모지는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다른 갱도로 옮겨갔습니다. 그 곳에서 조용히 성경을 읽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갱도로 가서 성경을 읽는데 갑자가 벼락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바로 자기가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 갱도에서 함께 일하던 37명이 무너진 갱도에 묻혀 모두 죽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다른 갱도로 옮긴 시모지만 그 참사에서 살아났습니다. 시모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위험에서 살려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모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감형이 되고 또 감형이 되어 결국은 살아서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시모지는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썩였던 것을 후회하면서 양로원을 세웠습니다. 그는 양로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대로 모아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나 세웠습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 사업가에게 주는 대상도 받았습니다. 시모지는 일흔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든 일본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도했습니다. 마지막 사형수로서 탄광 생활을 하는 인생의 막장이었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죽음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의 아침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한 행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으면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생명의 행렬로 바뀌게 됩니다. 죽음의 행렬을 따라가는 사람과 영원한 생명의 행렬을 따라가는 사람의 생애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의 행렬의 결론은 절망과 고통입니다. 그곳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행렬은 희망과 감사가 있습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우리의 삶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생명의 행렬에 서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는 우리의 삶이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장례 행렬을 따르며 슬피 우는 여인은 이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장례를 치르면 이제는 아들을 이 땅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살아야 할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죽은 아들의 장례 행렬은 사실은 여인 자신의 장례 행렬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례 행렬은 여인에게는 절망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절망의 울부짖음을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같이 울어주고 슬퍼하며 장례를 치러 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절망의 울음은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아들의 장례는 치뤄줄 수는 있었으나 그녀의 절망의 문제는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슬피우는 여인을 향해 ‘울지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절망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의 죽음으로 슬피우는 여인을 향해 ‘울지마라’ 고 선포하시며 절망의 행렬을 희망의 행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절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스토트는 ‘크리스찬의 주된 적은 절망과 실망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믿는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날 때 절망을 하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의 삶의 자리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절망감에 슬피 우는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감 속에서 탄식하는 모든 분들에게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자리로 옮겨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절망의 행렬에 서 있는 그들을 다시 희망의 행렬로 돌아서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가 있습니다. 나에게 짐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의 소문 내는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습니다.

 '대지(大地)'의 작가인 펄 벅 여사가 자폐증을 앓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가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절망적인 삶을 통해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인생의 삶과 죽음, 그리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하는 가운데 그녀의 위대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좌절의 순간을, 절망의 순간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희망의 순간으로 바꾸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부활주일 아침에 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여인에게 ‘울지마라’ 라고 선포하시며 그녀의 절망의 행렬을 희망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품고 일어나 삶의 현장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는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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