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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님의 부활이 주신 선물 (욥 14:12~14, 요 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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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이 주신 선물 (욥 14:12~14, 요 20:19~22)


여러분,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었다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죽은 아이에게 “일어나라” 한마디만 하시니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자들이 “일어나라”는 말에 다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무덤 속에 들어가셨지만 그 무거운 돌문이 굴러가서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도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것처럼 개켜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도, 무덤에서 나오는 것도 예수님께는 쉬운 일이었습니다. 
  
욥기 14:14에는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인 청년, 장정을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살아날 수 없다고 하지만 살아납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났지만 “나사로야 나오라” 한 마디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다시 산다는 것도 모르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릅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에 현세의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공자도 알지 못하는 죽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 이후를 분명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제자들에게도 죽음 같은 비극이었습니다. 도저히 스승의 죽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을 예고했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다시 유대로 가려고 하셨을 때에 도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포자기한 말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19에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죽음이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포기였습니다. 지난 3년의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은 완전히 인생을 버린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그 자체가 제자들에게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은사 즉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가장 큰 선물입니다. 이제 다시 사셨으니 엄청난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좋은 선물을 뜻하는 라틴어 ‘보나 보나’(bona bona)를 자신의 저작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라지토’(largitor)라 했습니다.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선물을 많이 주시는 분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부활이 주는 두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로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쉬면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참 평강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성령이 없습니다. 평강과 성령은 부활로 주신 선물입니다. 부활과 더불어 주신 평강의 선물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선물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평강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21절에는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신 것은 진정한 평강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평강’은 헬라어로 ‘에이레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평화’, ‘화평’, ‘복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히브리어의 ‘샬롬’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인사말이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만났을 때, 헤어질 때, 이웃 방문할 때 ‘샬롬’이라고 인사하였습니다. 나아가서 환난이나 핍박에도 담대하게 용기를 가지라는 의미로 ‘샬롬’을 많이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히 좌절하고, 절망하고, 죽음 앞에 직면해 있던 이런 제자들에게 평강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8:9에는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평안하냐”라고 물으신 것은 “내가 준 평안을 잘 간직하고 있나?”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다락방강화에서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안입니다. 세상은 잠시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갈릴리바다는 세상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고요하던 바다가 갑작스런 돌풍으로 무서운 바다로 변합니다. 언제 이런 풍랑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은 평화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평안을 주었기 때문에 평안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강을 받으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받으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평안이든, 평강이든, 평화이든, 화평이든, 안녕이든 모두 같은 뜻으로 하나님 안에서 얻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 가운데도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 오 놀라운 주의 평화 하나님 선물일세”라고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참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날도 창조하셨습니다. 무엇을 창조하셨는지 아십니까? 랍비들은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고요, 평화, 안식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평화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곡’의 작가 단테가 너무 마음이 고통스러워 자신의 고향 피렌체의 한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수도사가 문을 열면서 “아들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평화, 오직 평화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단테는 ‘그 분의 뜻 안에 참 평화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마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고 봅니다. 예수님 안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갈릴리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배가 물에 잠기게 되었지만 예수님은 “잠잠하라”  한마디만 하시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풍랑 많은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내십니다.  
  
“세상은 평화 속에서도 재난을 만들어내지만 하나님은 재난 속에서도 능히 평화를 만들어내실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안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돈이나 건강이나 자식이나 지식이나 모든 것들이 다 유한하고 무능합니다. 인간에게 참 평화를 줄 수 있는 것이 인간계에는 없습니다. 
  
로마서 5:1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나와의 화평의 전제가 됩니다. 이것이 곧 세상과의 화평이 됩니다. 온전한 화평이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평화의 조건입니다. 
  
참 평화는 죄 사함에서 옵니다. 구원에서 얻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면 평강이 있습니다. 죄가 그대로 있으면 절대로 평강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9:6에는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하나님이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평강의 왕’이란 이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을 전하기 위하여 오신 왕이십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이름의 뜻은 화평한 자(peaceful one)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 있나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화평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그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됩니다. 부활로 우리가 화평한 자가 됩니다. 화평하게 하는 이 선물은 전쟁과 갈등이 심한 이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야말로 화평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부활로 이 선물을 모두가 받고 이 세상이 평강의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없으면 진정한 평화가 없습니다. 부활은 내 마음, 가정, 사회, 교회, 국가, 세계에 평화를 공급합니다. 아론의 축도는 백성들에게 한 축복의 기도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축복합니다. 부활과 함께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부활이 주시는 평강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성령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22절에는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주신 축복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이 모습은 흙으로 창조하실 때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흡사합니다. 흙덩이가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듯이 절망과 무기력에 제자다운 모습을 잃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숨 쉬게 하십니다. 
  
에스겔 37장에는 에스겔이 골짜기에 흩어진 뼈들이 다시 살아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서로 만나 살이 붙고, 가죽이 생겨 사람의 모습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생기가 없어 살지 못하고 군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어보시며 “이 뼈들이 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뼈들에게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게 하라”고 하셨을 때에 살아서 강한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숨을 내쉬셨습니다. 숨은 바람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나 헬라어의 ‘프뉴마’라는 말은 바람이란 뜻도 있지만 영이란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람으로 묘사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도 예수님은 성령을 설명하실 때에 바람을 가지고 성령을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4:26에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설명하십니다. 16:7에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성령을 주시는데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 선물인 성령은 예수님의 부활로 주십니다. 부활은 선물입니다. 
  
“받으라”란 말은 헬라어로 ‘라베테’입니다. 이 말은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아주 강한 명령입니다. 반드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평강은 이미 주었으니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아직 주신 적이 없기에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마음을 열고 받는 자가 충만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 2:38에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에는 선물로 주신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충만하게 주어집니다.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는 자에게 아무 대가가 없는 공짜입니다. 
  
성령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부활 후에 주신 선물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하였고, 성령은 모든 기도하는 자에게,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부활 후에 성령은 쏟아졌습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행적입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나를 기록한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세워졌습니다. 부활의 선물인 성령이 없었다면 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역사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로마서 8:32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 아들을 내어 주신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아들도 주셨는데 평강도, 성령도 다 선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들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시고, 이제 살리셨는데 평강이나 성령은 말할 것도 없이 풍성하게 주십니다. 
  
세상에 평화가 없고, 전쟁이나 갈등이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고, 가질 것은 적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하나이고 남자는 여럿일 때에 문제가 발생하고 싸움이 생깁니다. 땅은 하나이고 가질 사람은 많을 때에 땅을 빼앗으려고 싸웁니다. 선물은 하나이고 받고 싶은 사람은 많을 때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거나 한계적일 때 투쟁은 끝없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의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어집니다. 부활의 선물은 모두에게 허락된 선물입니다. 절대로 모자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풍성합니다. 
  
사도행전 2:17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영성시대입니다. 누구나 영을 가지고 있고, 누구나 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언이 필요하고, 환상이 필요하고, 꿈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영을 받아야 할 시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을 선물로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신앙, 부활의 소망이 이 시대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이 시대에 필요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이 시대를 바르게 살고 이 시대를 바르게 이끄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코카콜라비밀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단 2명뿐이라고 합니다. 원래 7명이 알고 있었는데 그 중에 5명 죽고 2명이 남아 있습니다. 설탕, 탄산수, 캐러멜, 인산, 카페인, 코카 잎과 콜라 콩을 혼합한 것이 원료인데 그 원료 가운데 1%가 밝혀지지 않아 수많은 화학자들이 80년 이상 노력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 2사람이 죽거나 비밀을 잊어버리면 조지아 신탁은행은 연구 비밀문서를 개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약물관리국은 특정한 주원료제품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전수하지 않아 영원히 잊어지는 비밀도 많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신 평강과 성령의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신 공평하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특정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그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 신앙의 고백이 부활로 더욱 확고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나의 부활과 영생을 확실히 믿고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선물인 평강과 
늘 충만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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