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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요 1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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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 (요 11:38~44) 
 

1.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미국의 유명한 내과의사인 ‘모리스 콜링즈’ 박사는 죽었다가 살아난 환자들을 병상에서 인터뷰하여 그것을 『죽음의 문 넘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즉 의학적으로 죽음이 선언된 사람들의 죽음 경험담을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죽음이 임박하여 의식이 흐려져 가던 그 어느 순간, 자신이 누운 방안 전체의 모습이 보이면서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육체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형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를 맛보았고, 그 평화 가운데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그 어딘가로 자신이 옮겨져 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잠시 경험한 “새로운 차원”이란 “빛의 천사들이 자신을 둘러 서 있고, 사랑이 넘치는 그 누군가에게 이끌려 황금 빌딩 숲 사이로 난 수정같이 맑은 도로를 지나 아름다운 동산으로 인도된 후, 어떤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환자들은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이끌려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자신이 생전에 했던 모든 일들과 말들이 천사들과 심판자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체험을 한 후에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 너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도 혹시 여러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못하실까봐, 오늘 본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그가 죽는 순간이나 죽음 이후에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우리 예수님도 다시 살아나셨고, 장차 주안에서 죽은 이들과 우리 모두도 다시 살아날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2. 죽었으나 다시 사는 진리

❶ 어느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로서,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빠였습니다. 3남매 중 셋째인 마리아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은 이 마리아가 사람들에게 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2절에서 마리아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님께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여인이었으며, 병이 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였습니다. 이것을 보아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이 들게 되자, 그녀들은 즉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오빠가 병이 든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이 소식을 전하면서 오빠 나사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불렀습니다(3). 이것으로 보아 이 삼 남매는 예수님과 꽤 친밀한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이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주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면 당연히 오셔서 오빠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 주님은 이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나사로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그 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어진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나사로에게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후에야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8)” 제자들은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주님을 돌려 치려고 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요 10:31).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유대로 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가야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나 세상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요! 아무튼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 지방으로 가야했고,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도 방문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후였고, 그것도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을 때였습니다(17). 나사로가 죽기까지 얼마 동안이나 병을 앓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후 내용을 읽어 보면 병이 걸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로가 죽자, 베다니가 예루살렘에서 불과 2km 밖에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며칠 동안 유족과 함께 하면서 유족을 위로하는 미풍양속 때문이었지요. 장례는 다 끝이 났지만 그들은 아직 베다니를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렇게 나흘이 흐른 후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❷ 마르다가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나갔습니다(20). 마르다는 활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당시에 집안의 안주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마르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아마 마르다는 사람을 주님께 보내면서 주님께서 언제쯤 도착할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계산보다 훨씬 늦게 도착하셨습니다. 나흘 전에만 오셨더라도 오빠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과 함께 주님께 한 말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전혀 뜻밖의 말을 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 그러나 그녀는 이 말을 먼 미래에 나사로가 부활할 것이라는 말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 마르다는 세상 끝 날에 자기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자기 오빠를 살려주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나사로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25,26)!”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자신을 “나는 … 이다!”라고 표현하신 사례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선언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주님은 장차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죽음을 당하지만, 그들이 주님 안에 있는 한 그들은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이미 영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게 될 것입니다.

❸ 부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은 ‘향유의 여인’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자기를 찾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갔습니다(29). 그녀는 주님을 보고 즉시 그 발 앞에 엎드려서 주님께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언니 마르다와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기만 했어도 나사로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상의 고백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치유 능력은 확신했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은 마리아에게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사로가 묻힌 장소를 말하지 않고 “주여, 와서 보옵소서”하며 앞장서서 갔습니다(34). 마침내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❹ 유대인의 무덤은 여러 종류였습니다. 어떤 무덤은 수직으로 굴을 뚫어서 시신을 넣고 그 위를 돌로 막았고, 어떤 것은 수평으로 굴을 뚫어서 시신을 넣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묘사하는 나사로의 무덤은 옆으로 뚫린 동굴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걸어 나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44). 이것은 옆으로 뚫린 무덤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렇게 수평으로 만들어진 무덤은 당시 가장 흔한 무덤이었습니다. 

주님은 무덤 앞에 이르자,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39). 그러자 마르다는 주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는 냄새 날 정도로 부패한 시체를 위해서 무덤 문을 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 주님은 지금이라도 믿기만 하면 마르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41). 주님은 먼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후에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43)!” 주님은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나사로를 부르셨는데요. 죽어서 나흘이나 된 시체에게 마치 산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명령하셨습니다. 이 장면에 대해 어느 분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만일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고, “나오라”고만 하셨다면, 묘지에 묻혔던 모든 시체들이 일어나서 걸어 나왔을 것이라고요!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즉시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죽은 자의 얼굴은 천으로 가립니다. 그리고 그의 팔과 손, 발과 다리 등 온 몸은 수십 번 동여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그런 모습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나사로가 살아난 것도 기적이지만, 그렇게 온 몸이 묶인 채로 걸어 나온 일도 기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온 몸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걸을 수 있으며, 또 수건으로 얼굴을 싸고 있는데 어떻게 앞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나사로가 스스로 걸어 나왔다기보다는, 강한 능력에 의해 끌려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명령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자 주님은 사람들에게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44). 사람들은 죽었던 나사로의 몸을 묶었던 베를 풀면서 놀라고 크게 흥분했을 것입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던 시체가 꿈틀거리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이 다 풀어졌을 때에 나사로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열어 하늘을 보라보면서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즉시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감사를 드렸겠지요.

❺ 그때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를 따라 나사로의 무덤에 왔던 유대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이로 인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45). 그러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46).”고 하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을 현장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서 드러나는 반응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고, 자신도 장차 다시 살게 될 것은 믿는 자와,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장차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의 그 엄청난 차이를요!

3. 다시 살아난 주님, 다시 살아날 우리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선수 조니 에릭슨은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충동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에 휩싸였습니다. 하지만 재활훈련과 치료를 통해, 그리고 부모와 가족들과 친구들의 사랑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입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제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제가 저의 발로 춤을 출 것입니다. 지금 제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지만, 그 날이 되면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조니 에릭슨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그 부활 신앙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미국의 어느 부부가 성지순례 차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에 부인을 묻을 경우 비용이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 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해가는 것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시신을 미국으로 옮기겠습니다.” 장의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여기에 묻으면 비용도 적게 들고 또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에 묻히는 것이니 더 좋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아, 여기 묻으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내 아내도 부활할지 모르는데, 그러면 곤란하지…”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의 배신자도 부활을 믿었다는 말은 다시금 새겨봐야 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만났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곧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날 일은 그 역순이 될 것입니다. 즉 주님이 먼저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다시 살 것을 믿습니까? 

4. 다음이 아니라 지금!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주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사로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부활은 장차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보여 제자들과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믿게 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죽은 지 상당기간이 흐른 사람을 살리신 일이 더 큰 이적입니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살아났습니다. 죽은 자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이 오늘 여러분의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역사할 지 기대 되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혹시 무덤과도 같은 깊고 깊은 어둠과 절망의 자리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돈 때문에, 혹 질병 때문에 고통스러우십니까?

부활은 앞으로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바로 지금 이 순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초상집이 기쁨으로 변하고, 깊고 어두운 무덤 같은 인생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삶의 모든 문제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라는 것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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