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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의 은혜 (살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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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은혜 (살전 5:17)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신 당신님의 백성이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푸실 수단들을 제정하셨습니다. 말씀과 두 가지 성례(세례와 성찬)와 기도입니다. 오늘은 기도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은혜의 방편 중에서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당신님을 계시하시는 수단입니다. 반면 기도는 계시된 말씀에 대해 그분 백성이 반응하는 수단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 자녀들의 기도하지 않아도 그들의 형편을 낱낱이 아십니다. 기도가 없어도 얼마든지 당신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되 힘써 기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는 기도를 통해 현재 형편을 보고받으려 하심이 아니라, 당신님의 자녀와 인격적으로 대화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셨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엡 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명하셨습니다. 만일 기도를 하나의 종교 행위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이런 말씀들은 도무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쉬지도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말씀들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됩니다. 출생의 순간부터 아이가 부모와 필연적으로 쉼 없이 교통하는 것처럼 중생한 성도 역시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지며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의 친밀함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는 둘만의 (기도)시간이 구별되는 것이 대단히 유익합니다. 하지만 구별된 시간에만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시간에도 무시로 둘 사이에 교통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일상생활과 구별되는 종교 활동이 아닙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런 영적 생명의 활동입니다. 새벽 시간에 깊은 심호흡을 했다고 하루 종일 호흡 없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요. 기도 역시 구별된 기도시간으로만 끝낼 수 없고, 삶의 현장 속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성례처럼 말씀을 떠나서 독립적으로는 결코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떠난 성례가 미신적이 되듯이 말씀을 떠난 기도도 미신적이 됩니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했습니다.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는 기도라면, 무엇보다 영적인 눈을 열어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말씀이 현재 어떻게 적용되는지 깨닫는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는 형태가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겠지요.

기도가 은혜의 방편으로 바르게 작용할 때, 성도는 말씀을 분별하고 적용할 지혜를 얻고 말씀대로 성숙하게 자라갈 은혜를 얻습니다. 구약을 보면 다니엘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았으며,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었습니다. 에스라의 경우는 하나님 앞에 통회했던 기도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민족적인 회개 운동에 불을 붙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사도들은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며 각종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에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기도가 풍성한 곳은 언제나 말씀이 흥왕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는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흔히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를 자기 단련과 수양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맺힌 한을 푸는 수단으로 통성기도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듣는 자에게 감화를 주려하거나 가르치는 수단으로 대표기도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생활조건이나 인간 조건 개선하는 수단으로 기도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각종 신비한 기적을 체험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일반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악을 행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성경에서 명령된 기도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그 방향은 언제나 하나님만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방편으로 사용한 기도들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나 타인을 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증진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영적인 성숙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세계 어느 교회보다 기도회의 종류가 많고 많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성숙된 모습은커녕 사회의 지탄을 받는 모습이 된 것은 기도들이 은혜의 방편으로 정당하게 사용되지 않은 증거일 것입니다.

유창하게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일까요? 준비 없이 즉석에서 대표 기도하는 태도가 좋은 것일까요? 그런 생각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이 말씀은 기도할 때는 먼저 지금 누구 앞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의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며 경솔히 급하게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 내용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책임감을 느끼며 전존재가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대충 늘 하던 습관대로 말만 많이 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재품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동전을 많이 집어넣으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지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칫 이런 태도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내 기도에 응답하셔야 하고, 많이 기도하면 그만큼 더 좋은 응답을 주셔야 한다고 태도지요. 그런 태도를 가진 기도자는 하나님을 자판기, 혹은 소원을 빌면 들어주는 마술램프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한 셈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마음가짐도 옳지 않습니다. 정한수 떠놓고 조왕신께 빌던 그런 자세 역시 하나님을 온갖 잡신 중의 하나처럼 취급하는 아주 불경건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너는 그분의 백성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님이시며 너는 그분의 종이라 가르칩니다. 누가 누구의 뜻을 분별하고, 누가 누구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하겠습니까? 종이 주인의 뜻을 분별하고, 백성이 왕의 명에 따라 행해야 마땅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하시므로 이러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을 잘 분별하셔서 내가 원하는 뜻대로 행하시도록 기도한다면,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아버지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아무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마 16:24). 하지만 이 시대의 풍조는 자기 부인은커녕 오히려 자기를 강화시키는 이론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숨기고,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며 꿈꾸는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자기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은혜의 방편인 기도를 적극 활용하도록 부추깁니다. 병든 자를 위해서는 무조건 낫도록 기도하고, 사업하는 자는 무조건 잘되도록 기도하며, 자식들은 무조건 남보다 뛰어나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도록 기도합니다.

참 교회는 이런 시대의 악한 풍조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살면서 성공도 하고 뛰어나게 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성공을 탐하기보다 성경적으로 살기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남보다 빨리 가서 머리가 되도록 부추기기보다 늦어서 꼬리가 될지언정 바르게 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실패나 병에서 빨리 회복하도록 기도하기보다 그 속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의지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인내하며 기다리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슬쩍 말씀을 비켜서 사는 시대의 흐름에 속하지 않고,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을 힘써 걷도록 격려해야겠지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측면에서 기도를 살펴보아도, 우리의 기도는 회개부터 시작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깨너머로 타인을 모방하여 배운 우리의 기도를 성경에 비추어 꼼꼼히 점검하고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한편으로 나 스스로 과연 바른 기도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도 생깁니다. 조심스러워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지요.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바르게 기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조명하여 주시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자세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지금까지도 내 기도가 흠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기도를 자기의 공로로 생각하거나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열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때를 늦추시거나, 기도한 내용과는 다르게 응답하시거나, 오랫동안 응답하지 않으심으로 기도자로 하여금 자기 기도를 말씀에 비추어 점검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과 태도가 바른 것에 대해서는 응답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말씀과 기도와 삶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마다 새겨서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기도를 점검하며 잘못된 모습으로 습관화된 기도들을 고쳐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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