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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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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누가복음 24:1-12)


예수께서 죽으시고 사흘째가 되는 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천사를 만났습니다.   예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살아계셨을 때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라.  그가 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께서 생전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몇 차례 말씀했지만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께서 왜 죽어야 한다고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과 죽음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던 그 신뢰감이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죽음 다음에 오는 부활의 영광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께서 정말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로마 군병의 손에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대하여 너무도 자신만만했던 희망이 한 순간에 무너지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사랑하는 아들이 비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둘러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어 다만 멀리서 아들의 시신이 안장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던 날, 유대인의 안식일이 막 시작되는 시간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빠져 깊은 골방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몇몇 여인들만이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안식일이 지나고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여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간다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기는 이미 로마 군병들이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명을 따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여인들이 그들을 밀치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거기다 그 무거운 굴 무덤 돌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갈 재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무덤 앞에 가서 울다가 오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가봐야 마음에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거나, 혹시라도 무슨 좋은 일이 생기기를 막연하게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아들이 가는 마지막 길에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주도록 허락해달라고 로마 군병들에게 애원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그 새벽에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큰 지진이 나고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으니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이 혼비백산되어 달아나버렸고 여인들은 열린 무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아 놀라던 차에 갑작스레 나타난 흰 옷 입은 두 사람을 보고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천사가 하는 말이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지 않았느냐?’  여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그제서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고 들은 대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엉뚱한 소리로 무시하고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 직접 확인을 하고 이상하게 여기고 근심스런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아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또 다른 제자에게 알리자 두 사람이 무덤을 향해 달렸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는 요한을 의미하였을 것입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을 하는데 아무래도 한살이라도 더 젊은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을 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요한이 굴 밖에서 몸을 굽혀 세마포가 놓인 곳을 쳐다보고 들어가지는 않고 있을 때 나중에 도착한 베드로는 냅다 달려온 속도로 즉시 굴 안으로 들어가 확인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보니 분명히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남았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 확인을 하는 것을 본 요한은 그제서야 따라 들어와 확인을 하고 마리아가 한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에서 요한이 하는 말은 ‘그들이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믿었지만 그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은 아직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행동 빠른 두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온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주님을 뵈러 온 것이 아니라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는 여인들의 황당한 말이 사실인가 확인하려고 한 것 뿐이었습니다.    

행동이 빠르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두 사람을 통해 봅니다. 베드로처럼 용감하다고 믿음 좋은 것도 아니고 요한처럼 행동이 빠르다고 믿음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을 향해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은 행동하면서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눈으로 확인하고도 ‘이상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돌아오는 행동파들이라면, 여자들의 말을 엉뚱한 소리로 듣고 믿지 못하던 나머지 제자들은 집에 들어앉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고민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좋은 믿음인가요?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민첩하게 일을 잘 해치우는 나의 능력, 추진력이 아닙니다.  남들이 쪼그리고 앉아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우선 저질러 놓고 보는 순발력도 좋은 믿음은 아닙니다. 믿지 않고 자리에 앉아 머리로만 오래 생각만 하는 것도 불신앙이고, 믿음도 없으면서 우선 달리고 보는 것도 불신앙입니다.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든지 내 눈으로 확인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 믿겠다는 자세는 둘 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지 않고 초라한 자신의 이해력에 근거를 두려는 불신앙일 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를 어디에 돕니까?  남들은 미지근할 때 화끈하게 느껴지는 내 감정도 아니고, 뚜렷하게 체험한 내 경험도 아니고, 더구나 명철하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내 이성적인 판단에서 오는 확신도 아닙니니다. 물론 건강한 믿음은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그 말씀을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기억하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장8절, 9절)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예수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은 이 축복과 즐거움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지만 우리 믿음이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최소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두고 보였던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좋은 믿음을 가진 분들입니다.   눈으로 직접 뵙고 손으로 만지고 그 목소리를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를 믿는 분들이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는 분들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몇 차례 만나보고서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점차 현실로 받아들이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손으로 직접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인내심을 가지고 제자들을 대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의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미련하거나 둔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예수님의 죽으심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상황에서 제자들과 다를 바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디 믿고 머뭇거림은 어찌되었든 불신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믿는 믿음입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고 하는 불신앙으로부터 깨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앞이 캄캄하고 내 힘과 지식과 사람의 생각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돌보시고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살기 바랍니다.   

너도 나도 힘겨운 시절을 살아가느라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접고 마지 못해 살고 있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죽음의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지고 있고 사업가들도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다가 생명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인천의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을 한탄하고 고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비관하다 자기 혼자 죽는 것도 아니고 자기 가족들을 살해하거나 애매한 사람들에게 칼부림을 하고 총질을 하여 함께 죽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조금만 더 어려움을 견디고 참고 기다렸다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기만 합니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고 외롭고 두려울 때,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더 비참한 죽음을 맛보신 주님께 찾아와 주님은 죽음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진지하게 상담을 하였더라면…  주님은 어떻게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셨는지 여쭤볼 기회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던진 사람들 중에는 교회를 출석하던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심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단 한 번의 기회뿐인 인생을 그런 죽음으로 마무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처럼 나 홀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버리면 모든 문제는 덮어지고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은 십자가로 끝난 분이 아니라 부활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는가 하면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에게는 영생이요 주님 없이 죽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시작이지 마침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만 다시 사는 부활도 있고 부활이 있어야만 우리의 구원도 완성되는 것이기에 주님은 그 두려운 십자가의 길을 말 없이 홀로 걸어가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만사는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어주셔야 비로소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분이 죽었을 때 나의 옛 사람도 함께 죽었고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분 안에서 나의 새 사람이 태어났다는 믿음이 나를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알고 믿습니까?  아직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만 압니다.   부조리한 세상 권력과 불의에 맞서 정의를 부르짖고 용감하게 투쟁하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은 정의의 투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일생을 마치고 죽은 자로서 무덤을 남기고 갔다면 그는 위대한 스승, 선각자,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경할만한 분이지만 우리의 구세주는 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빈 무덤을 보이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구주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사람들에게 찾아온 형벌입니다. 그리고 그 형벌을 예수께서 우리 대신 받아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으니 곧 죽음을 극복하신 분이요 죽음이 지배하던 세상에 생명을 주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지만, 동정심이나 애석한 마음을 가지고 슬퍼하며 그의 무덤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도대체 죽은 사람의 시체가 어떻게 저절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흥분하여 잃어버린 시신을 되찾으려고 무덤으로 달려가 확인할 필요는 더욱 없습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온 세계 각국에서 성지순례를 하러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 예수 무덤교회를 방문합니다. 다른 장소도 순례객들로 늘 복잡하지만 유독 무덤교회는 언제나 방문객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무슨 대단한 볼거리가 있나 기대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무덤에 들어가 보면 어둡고 비좁은 동굴 속에 사람들이 켜 놓은 양초 타는 냄새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시신이 누워있던 자리는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 윤기가 납니다. 말 그대로 텅 빈 무덤입니다. 화려하게 장식한 유리관에 누운 시신을 참배하러 왔다거나 유골이 되어버린 고인 앞에서 묵념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을 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독교는 교주 혹은 창시자의 납골당이나 무덤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자랑하는 종교가 아니라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누구나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만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심으로 우리도 주님 안에서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썩을 몸이 더 이상 썩지 않는 변화된 몸으로 다시 일어나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일마다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부활신앙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역시 부활의 소망은 애당초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처음 열매가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의 열매로 다시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아름답고 싱싱한 꽃들이 피어나는 봄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우울하고 칙칙함을 벗어 던지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마음의 고민과 삶의 문제로 인생의 겨울을 지나는 분들에게도 새 생명이 돋아나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이 찾아와 주십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고 나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으니 기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부활로 찾아오신 주님도 먼저 죽음이 있었고 희생과 인내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어두움이고 절망이지만 생명은 빛과 희망입니다. 내 안에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십니까?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오늘 슬픔과 고난의 자리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 복된 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개인과 가정과 우리 교회 그리고 온 세상에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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