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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벧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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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벧전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 아침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사망권세를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아침이 옴으로 두려움과 공포의 아침이 아닌, 평화의 아침이 왔습니다. 실패의 아침이 아니라 승리의 아침이 온 것입니다. 사단은 패배하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된 것입니다.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선이 악을 이겼습니다.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빛이 어두움을 이기며 진리가 거짓을 이긴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 시켜 주시기 위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다시 살아나신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8)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첫째로, 부활의 증거들을「충분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다루면서 그 증거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미리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둘째는, 증거들을 충분히 살펴보았다 하더라도「정직하게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부활의 진리」자체 보다는 자신의 어떤 편견과 주장을 충족시키려고 하거나 또는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에 부활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생명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죄와 모든 악과 불의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사망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해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부활하셨다” 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이고 복음의 내용 입니다.이것은 기독교의 자랑이며, 힘이고, 비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믿음의 역사를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럼 그 은혜와 축복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자신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으므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기독교의 비밀이고 신비이며 능력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새로워 질수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믿는 데서 참된 새로움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데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육과 교양과 수련과 훈련을 통하여 인간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본질이 새로워 질수 없는 의식적이고 외적인 변화일 뿐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부활의 주님을 믿는 데서,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정통적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율법학자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음.”(요3:3,5)을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씻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흘려주심이며,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이 보내주셔서 함께하시는 거룩한 영이십니다. 인간의 새로운 거듭남, 곧 인간의 본질적인 참된 변화는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변화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선생으로 이 거듭남의 진리를 알 수도 없었고 이해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없지 않습니까?”(새번역/요3:4)고 답답함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바람이 불어오되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거듭남의 역사도 이와 같음을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거듭남을 체험할 뿐 아니라 거듭난 인생의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산 소망은 살아 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 다른 현대번역 성서에서는 ‘죽지 아니하는 소망의 새 생명이 있게 하시며’로 표현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죽지 아니하는 소망의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심으로 소망의 생명이 있기에 어떤 시련이나 환란 중에도 크게 기뻐하며 살아가는 큰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소망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벧전 1:6)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죽지 아니하는 소망의 새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새 번역에서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환상으로 본 환영이 아닙니다. 주님의 의식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의식적 부활이 아니며, 주님의 삶이 내안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부활만이 아닙니다. 실제적 몸의 부활로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17:17-24)과 수넵 여인의 아들(왕하4:32-35), 그리고 야이로의 딸(막5:35-43)과 나사로의 살아남(요11:39-44)과 같이 다시 죽을 육의 몸으로 살아나는 소생이 아닙니다. 또한, 영으로 만의 살아남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몸이었지만 닫힌 공간에도 들어가시고 홀연히 사라지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활이전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고전 15:50)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막16:19) 이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몸은 그 이전의 몸보다 신령하며 영광스러웠습니다. 
  
성경은 우리도 부활 할 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는 자로 참여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15:42-430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7-49)
  
이 유업 곧 유산은 주님이 재림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에 간직하신 영원한 천국뿐만 아니라 지금 나의 영혼으로 누리는 유산이기도 하고 우리가 생활가운데서 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의 영혼과 생활가운데서 누리는 유업이 될 때에 그 유업은 구원과 영생과 약속과 축복을 말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믿고 함께함으로 하늘에 간직하신 이 유업을 물려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 하늘의 유업을 물려받게 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그의 많으신 긍휼’ 때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3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새 번역 성서에서는 이 긍휼을 자비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은혜로 넘쳐납니다. 자비로움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는 이 하나님의 긍휼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딸들이 늦게 귀가할 때에 마중을 나갑니다. 때로 학교나 회사에서 늦게 돌아올 때는 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딸들에 대한 염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나의 자식의 피곤이 나의 피곤이고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으로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경험되는 사랑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즐거움입니다. 그것이 아빠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은 이런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향한 그의 많으신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의 많으신 긍휼하심 안에서 우리로 거듭남의 인생과 산 소망의 생명을 가지게 하셨고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살아가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그 주님과 함께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드러내는 증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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