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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살전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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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살전 4:14)

(살전 4: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합니다. 죽음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죽음은 사람의 노소빈부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달려듭니다. 죽음 앞에는 항의도 없고 면제도 없고 핑계도 없습니다. 죽음은 각 사람이 자기의 말로 알아듣는 말로 말하매 그 말에는 만대만계급 사람이 다 복종합니다. 죽음은 멈추어 하는 신적 명령이니 볼복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죽음과 함께 다시사는 부활이 약속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그릿 시냇가에 머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다가 이곳에도 가뭄의 영향으로 시내가 말라 마실 물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르밧은 이세벨의 고향인 두로와 시돈 중간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한 과부가 너를 공궤하리라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이방 지역인 사르밧에 가게 됩니다. 사르밧에 도착한 엘리야는 그 곳에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곳도 가뭄의 피해가 컸습니다. 따라서 가장 비천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과부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과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한번 먹을 분량의 가루와 기름만을 지닌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과부의 사정을 듣고선 그녀의 절박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먼저 자기에게 음식을 먹게 하면 가뭄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집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얼마 후에 사르밧 과부에게 비극이 닥쳤습니다. 곧,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명 이상의 존재였던 아들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로 하나님께 형벌을 받아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다고 탄식조로 엘리야에게 항의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고통은 말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과부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엘리야의 심정도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는 죽은 아들을 자신의 침상에 누이고 자신의 몸을 엎드려 아이의 몸에 닿게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는 간절하게 이 아이의 혼이 소생케 해 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간구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기적적으로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죽은 자의 소생을 기록한 첫번째 실례였습니다(왕상17).  

엘리사는 아합 때부터 요아스 때까지 근 55년간을 활동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는 당시의 관습대로 동굴이나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어느 날 몇 사람들이 엘리사의 무덤 근처에서 한 시체를 매장하려고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모압의 강도 떼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살기에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추수기가 되면 갑자기 나타나서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습니다. 따라서 시체를 매장하려던 사람들은 몸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 안으로 던지고 숨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리사의 시신에 닿은 그 시체가 즉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광경을 당시의 사람들이 목격하면서 이 놀라운 사실은 금방 널리 퍼졌습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이적은 요아스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사는 죽었지만 그가 선포했던 약속들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낳고 죽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성취될 것입니다.(왕하13)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의 일행에게 회당장의 집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알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이 세상에서 생멸 활동을 하던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생명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야이로의 딸은 이에 해당하며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자신이 데리고 온 자들과 함께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아이를 살리시면서 마치 잠자는 소녀를 깨우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굼이라고 하시자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므로 죽음을 명하여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권적 사역이며 창조주로서의 생명 사역입니다. 죽은 아이가 살아나자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나인 성은 갈릴리 지방의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머니의 독자요 그이 어머니는 과부라(눅7:12)합니다. 그 여인은 일찍이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어린 아들 하나 키우면서 그에게 온갖 기대와 소망을 걸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제는 장성해서 의지하고 살아갈 만한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의 장례 풍습을 기초로 상상해 보면 관을 운구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뚜껑이 없는 상여입니다. 아들의 싸늘해진 시신을 보면서, 차마 떠나보낼 수 없어 매달리다시피 하며 시신을 붙잡고 따라갑니다.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또 흐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같이 슬퍼하며 길게 늘어서서 따라갑니다. 당시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장례 때에 애가(哀歌)를 연주하는 피리장이 몇 사람을 불렀습니다. 처량한 장송곡을 연주하며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놀라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와 죽은 아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있는 겁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눅7:13)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십니다.(눅7:14) 관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상여입니다. 뚜껑이 없는 상여입니다. 시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겁니다. 그것은 손으로 만졌다는 뜻입니다. 율법(민수기 19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절대시신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만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나님 아들의 신적 권세와 능력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15절)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병 들어 죽게 되자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에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그의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는 예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던 자들이었으므로, 나사로의 병 든 소식을 들으면 금방 달려오실 것으로 마리아와 마르다는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이나 있던 곳에 더 유하셨습니다. 이는 나사로가 병으로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부활과 생명의 주이심을 증거하시려 했습니다. 

나사로의 질병 소식을 듣고 이틀을 지체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오해하여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을 때에 자신이 그 곳에 있지 아니했던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는 제자들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표적을 보여 주시겠다는 예고였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집에 이르렀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을 때입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 곳에 계셨더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주께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 되심을 밝히셨습니다. 즉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시는 모든 구속 사역의 핵심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을 때 그 곳에는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애곡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께서 그 곳에 계셨다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사람들은 예수께서 질병을 낫게 하실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와 사람들의 애곡함을 보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단순히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사망 권세 아래서 슬퍼 울며 애곡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시체는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게 하시고는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에 큰소리로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는 예수의 말씀대로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의 주인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미리 증명해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 소망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산 자와 함께 그리스도를 맞이하며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거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성도에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자다(코이마스다이)라는 말을 사용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죽으셨다가(아포드네스케인)란 말을 사용합니다. 이에 관해 혹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는 대속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고 하며(Thomas) 혹자는 그의 죽음의 실제성(reality)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Bruce).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죽음은 그의 부활이 기적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시 이 말씀을 분명히 선포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29-32]
그리스도의 보활은 신자들의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죽은 성도들을 데리고 오십니다(Morris).

그러므로 성도들은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자신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확실한 신앙적 이해 때문에 살아있는 것보다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음을 당하셨으나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주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이요 다른 사람들의 부활은 일시적인 부활로 차이가 납니다
"첫 열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면, 수입되는 곡식 전부를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의(意義)를 가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백성의 부활도 얻어진 것입니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머리가 부활하였은즉 몸된 교회도 부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에수님의 부활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게 되는 성도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림을 당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재림의 날에는 먼저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이 땅에서 핍박 중에도  주를 믿는 근거가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환난  중에서도 성도들끼리 서로 위로하라고 명했습니다. 이 땅에서 복음을 인하여 고통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과 재림 신앙은 궁극적인 소망인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으나 소망이 있는 자들은 그 소망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영원한 천국 소망을 함께 소유한 자들로서 서로를 위로하며 이 땅에서의 고난을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궁극적으로 재림과 부활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천국 시민 된 성도는 이 땅에서 그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였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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