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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 : 안디옥(2)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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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한 비전 매핑 : 안디옥(2) (행 13:1~3) 


유명한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하던 중 깊은 좌절에 빠져 사흘간 몸져누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Katharina, Katie)가 남편 앞에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고 합니다. 루터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누가 죽었오?” 아내가 대답합니다. “예, 하나님이요” “아니 당신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돌아가신단 말이오”하자, 아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신이 실망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걸요” 아내의 이 말을 듣고 루터는 깊이 깨닫고 다시 일어나 거룩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두 사람이 온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한 지역 교회가 온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다 같이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해 도피해온 성도들이 소아시아에서 만든 아직도 어린 교회, 안디옥 교회와 그리고 이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한 바나바와 바울이 바로 본문의 주인공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안디옥 교회는 그들 중에 지도자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세계 선교를 위해 열방으로 파송했고 그들 특히 바울은 당시의 알려진 세상(오늘의 터키,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유럽대륙)을 세 차례 이상 여행하여 세계 도처에 교회를 개척했고 그리고 1세기의 세상은 복음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요? 대답은 결코 ‘아니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오늘도 살아계신 주님이 원하신다면 여러분과 저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 오늘의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이 이 안디옥 교회와 함께 하신 증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들은 무엇입니까?

1.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함입니다.

여러분은 주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오늘 우리가 참여하여 드리는 이 주일 예배라는 것을 인지하십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유대인들의 회당예배는 안식일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본래 토요일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전통을 고수하고 지키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 중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처음 그리스도인들은 거의가 유대인들이었음)이 안식 후 첫날(토요일 다음날), 그러니까 지금의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주를 경배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에 주께서 부활하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의 본질은 안식일이 아닌 주 부활의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 모여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를 통해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과의 만남을 갖는 것입니다.

마태18:20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모임은 단순한 모임의 자리가 아니라 예배의 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진지하게 모이는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최고의 약속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고 하신 그분과의 만남)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가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은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본래 더 엄격하게 번역하면 “주를 금식하며 예배할 때에-”(While they are worshipping the Lord and fastingNIV)라고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금식까지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2000년전에 돌아가신 분이라면 어떻게 그분과의 만남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러나 예배의 자리는 2000년전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지한 예배는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주 부활의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 부활의 날인 주일에 진지하게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고 있음이 바로 주 부활의 증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그 날의 예배의 자리에서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다시 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요한복음에서 주께서는 일찍 주께서 제자들의 곁을 떠나셔야 성령이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강림과 사역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요16:7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러므로 지금 사도행전에서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이 바로 주 부활의 또 하나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부활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음성을 성령을 통해 듣는 것을 기대할수 있겠습니까? 만일 주 부활이 없었다면 지금도 전 세계에서 수 많은 성도들이 예배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고대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감사한 것은 주 정녕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주가 보내시는 일터로 나아갑니다. 본문에서 안디옥 교인들도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세계 선교를 위해 시킬 일이 있으니 바나바와 사울을 그 일을 위해 보내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6년전 미 동부 지역에 사는 20대 초의 두 청년이 거의 동시에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883년 미국 커네티컷의 하트포드라는 곳에서 전국 신학생 대회가 열렸을 때 한 청년은 뉴 부른스위크(New Brunswick)신학교 대표로, 또 한 사람은 드류(Drew)신학교 대표로 참석했다가 하나님께서 저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극동지방 조선에 선교의 문을 여신다는 선교보고를 듣고 조선 선교사로 가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1885년(124년전) 부활절 오후 3시경 이 두 사람은 조선 반도 제물포항에 입항합니다. 한 사람은 26살, 또 한 사람은 27살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땅을 바라보며 입항 직전 갑판에 엎디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부활절 아침 이 곳에 왔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소서” 그래서 그 결과로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녕 주님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3.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함입니다.

자, 주께서 안디옥 교인들에게 ‘시키실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미숀, 소명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이제 그들의 순종입니다. 순종에는 언제나 값 지불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도 세계 선교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 그들이 사랑하는 지도자 바나바와 바울을 내어 드림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은 그들의 응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그러나 만일 주께서 살아 계시지 못하신 분이라면 이 순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죽은 자에 대한 순종을 명하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지막으로 이 지상에서 주신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28:18이하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예수께서(부활하신)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그래서 기꺼이 지금도 대가를 지불하며 선교지로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이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지불하는 고난을 두려워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만일 주께서 살아 계시지 않으시다면 있을 법한 일이겠습니까?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증인들그들이 바로 주 부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아니면 주님의 소명에 순종하기 위해 희생의 값을 기쁘게 지불하는 모든 성도들의 존재와 삶그보다 더 강력한 부활의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인 그리스도인으로 ‘스키하라 치우네’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예수를 믿게 된 그는 기도 중에 외국 대사가 되어 복음을 열방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1930년 그는 러시아 근처 리투아니아의 총 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1940년 7월 어느 아침 그는 인생의 큰 반전을 맞게 됩니다. 그 아침 그의 집무실 뜰에는 폴란드에서 나치 게슈타포의 체포를 면하기 위해 도망치는 유대인들 2-3백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던 그들은 모두 일본 비자를 발급 받기를 원했습니다. 일본 비자만 받으면 그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키하라가 총영사가 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의 인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즉시 동경에 전문을 보내서 발급 허가를 요청했지만 세 번 씩이나 중앙 정부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잠시 기도하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날 아침 펼쳐진 말씀은 사도행전 5:29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유대인들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습니다. 사무라이 출신의 그리스도인 스키하라는 그가 비겁하지 않고 주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한 다음 비자 발급을 시작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몇 동료들은 중앙 정부 관리들이 출동해서 그들을 해직하고 끌어내기까지 약 28일간 무려 6,000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그와 그의 가족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후일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근교에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받셈을 건립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은인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초청받아 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하여 후회가 없었느냐는 한 유대인 기자의 질문이 있었을 때 가족을 대신하여 스키하라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하셨고, 저의 아버지와 저희들은 기꺼이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들(유대인들)을 인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남은 날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한 두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이 바뀔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스키하라는 무슨 대답을 할까요? 아펜셀러 언더우드는 무슨 대답을 할까요? 저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 오늘의 한국 교회가 그 증거가 아닙니까? 불과 124년 전 불과 한 줌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던 이 땅에서 지금 처처에 도시마다 거리마다 농촌마다 크고 작은 수 많은 교회당에서 부활절 예배가 진행되는 것을 보는 아펜셀라와 언더우드는 천국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124년 전 저희로 주님의 소명에 순종하게 하신 것을 감사한다고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땅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기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들의 인생을 그 고귀한 목적으로 사용하신 주께 감사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여기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고, 우리가 순종할 시간입니다. 자, 누가 주의 보내심을 따라 주의 음성을 듣고 저 열방을 향하여 가시겠습니까? 누가 지금 순종하시겠습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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