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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시 118: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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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 (시 118:19~29)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놀라움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호산나’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할 것을 기대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종려주일의 기쁨을 주신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사랑하는 아들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양손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리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을 잠시 위로해 주고 싶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하신 깜짝 이벤트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 하나님의 침묵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환호했던 수많은 민중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정치 권력자들과 부딪히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장면이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고 위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보면서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네가 곧 죽음의 길로 가는데 잠시 죽음을 잊어버려라. 네가 고난의 길을 가는데 잠시 고난을 내버려 두어라. 지금은 내가 너를 위로하고 싶구나. 너는 나의 아들, 나의 사랑이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렇게 칭찬하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배려하고 싶었던 사건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이란 약속의 땅, 회복의 땅입니다. 메시아가 올 시온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주된 활동장소는 팔레스타인 북쪽에 있던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와서 마지막 사역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과거 행했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제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억울함을 예수님께서 해방시켜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메시아이자 왕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하나님의 깜짝 이벤트였습니다. 

종려나무는 아름다움과 번성, 번영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칸느영화제의 최고 대상을 ‘황금종려상’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이 종려나무는 풍요와 아름다움의 상징을 뜻하는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서히 죽음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경험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깜짝 이벤트와 같은 사건으로 사랑과 위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인생길이 거대한 벽에 막힐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갈 길이 없고 안개 낀 것처럼 앞길이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단절되고 홀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다시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깜짝 이벤트로 나를 사랑하는 역사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러 교회 나올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고통 받을 때 그보다 큰 위로를 주시고, 절망하고 낙심할 때 그보다 더 큰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은총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못 봤어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역사를 보면서 가슴속에 깊은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은 우리가 보기에도 아주 기이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기가 죽어서 움츠린 사람들에게 기를 펴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 졸이며 안타깝게 사는 사람들에게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가슴에 맺혔던 것들이 풀어졌습니다. 어두운 것이 밝아졌고 차디찬 것이 따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 중에는 먹고 마실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난하면 자격지심을 갖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 스스로 위축되고 주눅 드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너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축복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루도 제시간에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만나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건강한 인생을 살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한 비천한 평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그러면 너도 하나님의 사람이다. 네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들을 만나셔서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소통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납해주셨다는 뜻입니다. 함께 길을 갈 수 있다는 자격증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식탁에 앉으셔서 함께 밥을 나누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당시 인간 존재로 취급받지 못했던 여성들에게도 다가가셨습니다. 그 중에는 남자들에게 버림 받은 창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용서의 특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살아갈 희망을 부여하셨습니다. 구원의 대상, 생명을 얻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편파적으로 가난한 자만을 만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 중에는 부자와 권력자도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과 같이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 앞에서 가슴을 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나 부자, 있는 자나 없는 자,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겸손하게 받는 모든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존중하시며 꿈을 통해 변화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셨던 모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남녀가 차별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분 때문에 구분되었습니다. 자유자가 있었고 종과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버려진 사람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을 값진 사람이라고 높이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사람들 속에 있는 잠재력을 끄집어 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인생을 새롭게 살 수 있다. 인생을 도전하면서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꿈을 통해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함과 고통, 환경의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인 박노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삶이 변화되어 이런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올 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어진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 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더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투정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가면 금방 저 길로 가는데요. 하나님, 한 단계만 점프하면 바로 저것을 붙잡을 수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내 눈에 바로 보이는 곳이 아닌 골짜기로 내려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돌보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린 돌을 머릿돌로 바꾸시는 놀라운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보시면서 바로 “너희의 죄가 다 용서받았다.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선언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긴 세월을 참으시며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고난의 외로운 길 그것도 죽음의 길,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으신 십자가의 길을 혼자 가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인간의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복주기를 원하시는지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편 118:22-23)

버린 돌이 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머릿돌로 바꾸셨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건축자는 건물을 짓는 전문가입니다. 어떤 것이 쓸모 있고 쓸모없는 돌인지 금방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건축자가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집을 연결하는 중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반대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필요치 않다고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몰고 갔습니다. 전문가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버림받은 예수님을 다시 세우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기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세워주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편 118:23)

예수 믿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나를 발견하는 놀라움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귀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로 나를 세워주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때로는 위기와 어려움, 고난과 비난, 외로움과 고독으로 억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버린 돌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그를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주님께서 주신 이 은총 때문에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소중한 머릿돌이 되고, 또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소중한 머릿돌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놀라며 인생의 어려움들을 털어버리고 다시 미래를 향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경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경탄하게 하시면서 어린 아이처럼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은 늘 경탄합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에는 경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앙드레 지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에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지혜로운 사람)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어제와는 다른 것, 하늘과 땅, 내 환경,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일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임을 기대하면서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순간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하루하루를 경탄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깨닫는 축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삶에 경탄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성숙이 멈추고 기대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때부터 미래를 향해 가지 않고 과거를 붙잡고 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기이한 눈과 놀라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앙이란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매일 매일 삶의 사건 속에서 놀라움과 경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놀라운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하면서 우리의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 우리의 슬픔보다 더 큰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너무 자주 무너지고 너무 자주 낙담하며 너무 자주 포기합니다. 예수님이 버린 돌이었지만 머릿돌이 된 것을 기억하며 다시 용기를 갖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서 새롭게 일어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순간순간마다 경탄하며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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