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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획 (엡 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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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획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9-11). 

Ⅰ. 본문해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에베소교회를 향해 지극히 개인적인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사도가 복음을 아는 지식에서 얼마나 성숙해 왔는지 알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사도에게 복음을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 지식이 증가해서 이제 복음의 의미를 우주적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연결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고백하고, 우리 인생 최고의 자랑거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구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사건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Ⅱ. 목적 있는 세계의 창조 

먼저 사도는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만물의 창조는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영원한 계획 속에서, 작정하신 의지를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모르시는(?) 사이에 하나님의 어떠한 활동의 부산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의지를 가지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A. 영원한 지혜와 사랑 

영원한 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뒷받침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지하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지혜에는 창조에 대한 포괄적인 계획은 물론, 구체적인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곧 영원한 지혜와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피조물 가운데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무한한 사랑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창조 전부터 영원한 지혜와 사랑을 가지고 계셨고, 이제 영원한 능력으로 창조하신 세계가 만들어진 즉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혜와 사랑을 동기로 세계를 창조하셨다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를 하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B.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만약 이 세계가 하나님께 꼭 필요했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한 분이 되고 반대로 세계에 아무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세계는 단지 잉여의 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무언가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변하시는 당신의 성향의 자연스러운 효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다고 할 때 그것이 만약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마치 바윗덩어리와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 효과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놀라운 효과가 나타납니다. 봄마다 새싹이 움트고, 여름에는 탐스러운 과일이 열립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에는 썩어 다시 봄을 준비합니다. 결국 창조 세계의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 소멸은 하나님의 불변하신 성품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접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다스리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 창조 세계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계십니다. 우선 불연속성은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지혜와 사랑 안에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는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물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전적인 타자입니다. 그 구별이 바로 불연속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과 섞이지 않으심에도 친히 피조물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시지만, 어떠한 피조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말할 때 적잖은 혼란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있다’라는 동사가 사용될 때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있다’의 의미는 현저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그릇 하나가 있다고 해 보십시오. 이 그릇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른 사물들을 배척하며 존재합니다. 즉 그릇이 있는 곳에는 다른 종류의 물건들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있음’도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보십시오.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몸 안에 영혼을 담는 큰 구멍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물질은 아니지만 우리 몸 밖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물질의 ‘있음’과 다른 존재 양상을 띠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두 가지와 다른 ‘있음’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물질에 의해 존재가 방해되지도 않고, 그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물질을 배척할 필요도 없이 무한히 영원히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계시다고 할 때는 물질이나 영혼이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만물을 초월하시면서도 그 안에 계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 속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 친히 임재하심으로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십니다. 또한 당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영광 받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上)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은 틀림없지만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는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하신 것은 아닙니다. 즉 피조물의 아름다움 가운데 현재적인 것들도 부여하시고, 앞으로 드러날 잠재적인 아름다움도 주셨습니다. 곧 아직 흐드러지게 피어나지 않는 꽃이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만약 아직 피지 않는 꽃에 시간이 흐르고 햇빛과 물과 충분한 양분이 공급된다면 잠재된 아름다움이 시간과 공간을 타고 활짝 드러나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겠습니까?

물론 인간은 이 아름다움을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고 말씀하신 것은 현재적인 아름다움과 창조된 인간이 당신의 뜻을 알고 잘 가꾸면 드러날 잠재적인 세계의 아름다움까지 보시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일에 이바지 하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이 일이 매우 어렵고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십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실재인 영혼을 주시고,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피조 세계를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를 아는 제3의 지식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세계 안에 구현할 수 있도록 지성과 애성과 의지의 능력도 주셨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 위탁받은 본분을 따라 세계를 돌보고 가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고유한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인자로 만족하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범뵈하며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자 죄는 물밀듯이 밀려왔고, 세계에 가득 찼던 창조주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곧 만물의 상호교통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스스로와의 관계에서도 단절되어 비참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 수 있는 자원을 박탈당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계획: 작정 

인간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 곧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한 것이라” 하나님이 미리 의지를 가지고 작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A. '영원부터 정하신 뜻‘-신적 계획의 영원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홀로 계실 때 처음에는 만족스러우셨습니다. 그러다 심심하셔서 세상을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래도 나아지질 않아서 세상을 인간을 말동무삼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권한을 주었더니 예상치 못하게 타락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구원의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을 보고 마지막 수단으로 지옥을 만드시고 심판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해 설명한다면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하신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할 계획을 수립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논리적인 순서라면 여러분이 존재하고, 계획이 잇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지성 가운데 계획을 하는 것과 하나님이 영원하신 계획을 가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기기 때문에 영원한 계획이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시던 적은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지만,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 없이 계시던 때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부터 정하신 뜻 안에서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계획들이 모두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에게는 모두 무엇을 하든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에 관한 계획을 영원부터 작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계획이 하나씩 하나씩 시공간 안에 펼쳐 보이기 전까지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논리적 순서일 뿐이지 시간적 순서는 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의 이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는 장엄한 무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 영원하고 신적인 계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곧 예정된 것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실현 되어가는 역사의 전개과정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중심성 

이 모든 세계의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 영광의 찬란한 증진과 영원으로 향하는 자체를 하나님이 계획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가지신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공유된 계획이 있고, 그것이 시간 속에서 나타날 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 되시고, 영원한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며, 성도가 받는 완성된 세계의 영원한 영광도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교회가 성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었던 것들이 시간이 되자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교회는 단지 하나님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가지고 계신 영원한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경은 그 단서를 “교회로 말미암아”로 표현합니다. 

C. '교회로 말미암아‘-신적 계획의 중심 

이 구절은 교회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계획을 시간 속에 펼치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며 당신의 몸에 접붙이시는 영적인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지상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편적인 몸으로서의 영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적인 몸이 교회라면 보이는 지역의 교회들은 영적인 몸을 잠시 가꾸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같이 육체가 단지 영혼을 보관하는 창고나 그릇이 아니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활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 훌륭한 섬김의 도구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지역의 교회를 세상에 두신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는 성도의 연합과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들을 뒤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의 경륜 속에서 껍질을 벗고 완전한 영적인 교회로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몸으로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전까지 이 지역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창조와 타락, 구원, 완성과 영원의 위대한 계시들을 섬김을 통해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반포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시간 속에 즉시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인물, 사건과 사람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의 전달과 해석의 사역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계시를 풍부하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시와 행동에 대한 기록들은 성경의 내용을 구성했고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행동과 역사의 전개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안은 지식을 전달하는 훌륭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데서 기인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서 인간은 모든 노예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의 어떠함을 아는 것과,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앎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계시의 내용들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실행되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곧 개인적 경험, 공동체의 지평,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증진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직접 관상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잇다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구원의 계획을 전개시키심으로써 당신의 속성의 어떠함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보이셨고 그것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구원의 길을 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시대로 갈수록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결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가 차매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계획의 절정을 인간에게 보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Ⅳ. 결론: 우리의 자랑, 예수 

예전에는 듣기만 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아들을 통해 생생히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예수님의 몸은 참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33년을 사셨고 특히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진리를 가르치셨으니 그 진리는 이제 성경을 통해, 선지자를 통해, 예언을 통해, 구원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았던 진리보다 훨T니 아름답고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신 주님은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지식을 전달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현실적인 사건으로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셨지만, 그 떡을 먹고, 병고침을 받은 자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것들도 이 후에 일어날 단 한가지의 정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예고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부활을 통해 십자가 사건은 의미가 명백해졌고,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당연한 귀결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8-10). 

하나님께서는 또한 부활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마치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선명한 빛줄기가 높이 치솟아 온갖 새깔을 드러내며 강렬하게 작렬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의 빛줄기를 보았고 그보다 강렬하게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나타남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성육신하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 중에는 그래서 예수님을 져버린 사람들이 있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잠시 미끄러진 사람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눈으로 봤지만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령에 의해 증거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우리가 훨씬 예수님을 잘 만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작렬한 불꽃을 다시 해부해 보고자 합니다. 너무나도 찬란하여 눈부시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죄인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사랑한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고 당신의 공의로서 분노를 퍼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쓰셨고, 손과 다리는 못 박혔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창에 허리를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죄를 향한 하나님의 무선운 진노입니다. 피흘림이 없이 사함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당신의 아들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아니라 창조 세계안에서 당신께 반역하는 모든 죄를 짊어진 것으로 죄를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지 “ 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나의 죄도 어떻게든 되겠지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요.”라고 말합니다. 어디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기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의 문제는 그렇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할 때, 믿음의 본질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죄는 너무 크지만 예수가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 때문에 나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죄로부터 구원한 것입니다. 만약 이 속죄적인 죽으심의 신앙을 단순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운명론자의 생각과 대치한다면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까? 우리는 신앙을 속죄적인 죽음에 기초하여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예수에 의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측면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쏟아 부으심이었지만 왜 흠이 없으신 그분의 희생을 허락하셨습니까? 우리는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왜 그리하셨는지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거역하실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각 사람을 구원해주신 방법일 뿐만 아니라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을 통틀어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우리는 이 영원한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가 그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 교회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이해하고, 교회를 통해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셨던 작정의 위대한 계획과 세상을 보고, 그 너머에 창조의 원대한 계획,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까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따라 시공간 안에 그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를 그렇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 하나의 자랑이 아닌, 교회 전체의 자랑이고, 모든 인류가 고대하는 영광스러운 자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영혼이 없는 피조물들에게까지 영광스러운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下). 

사도 바울은 감히 시간과 공간 속에 하나님의 경륜이 전개되는 과정과 자기의 회심이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5-27). 

곧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사도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공간 속에 나타났다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질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는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는 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운 일입니까? 인생의 의미는 길이와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는 데 얼마나 이바지 했는가 하는 구원사적인 의미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높은 지위나 뛰어난 재능과 지식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깊이 알고 십자가 때문에 주님을 두려워하며 그 십자가 때문에 사랑으로 이끌리며 경건하게 산다면 들풀과 같은 인생을 통해 비밀로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다가 그 계획 속으로 다시 헤엄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복음이 세속적인 사상과 뒤섞여 혼탁해진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역사 속에서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가슴 벅차는 감격을 십자가에서 맛볼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분명 우리의 최대의 자랑거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깨달음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육체에 채우며 살아가는 삶, 그 안에서 인간은 무한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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