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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향하여 (빌 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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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향하여 (빌 3:10~16)

빌립보서 3:10-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요즘 청소년들은 가수나 연예인들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슈퍼주니어입니다. 요즘은 가수들이 그룹으로 나오기 때문에 저는 누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슈퍼주니어도 떼를 지어 나오는데 저는 정확히 몇 명인지 매번 혼동됩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는 거의 야만인 취급을 합니다. 우리 아이는 열 몇 명 되는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책상 달력에 잔뜩 생일 표시를 한 것을 보게 되었는데 슈퍼주니어 멤버들의 각 생일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엄마와 아빠 생일 표시는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부부가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고 우상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이렇게 소중히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의 헤어 스타일이나 입는 옷과 신발까지 맞추려고 합니다. 최근에는 빅뱅 신발이라고 해서 제가 보기에는 무슨 탱크 같은 신발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면 따라 하게 되어 있고 그 모습까지도 닮으려고 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안 뒤 그의 생애의 유일한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사셨던 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10절에 등장하는 단어들이 그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닮기를 원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고 할 때의 ‘알다’라는 단어는 그냥 정보의 습득 정도가 아닙니다.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사랑한다. 경험한다’의 의미가 강합니다. ‘고난에 참여하여’ 할 때의 ‘참여’는 ‘코이노니아’입니다. 이는 동참한다는 의미이지만 인격적인 밀접한 교제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에서 ‘본받아’는 ‘쉼모르포우’로, ‘모르포’는 형상, 형체를 뜻합니다. 즉 이는 ‘동일한 형상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 그대로 본받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바울도 똑같이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에 바울도 똑같이 부활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도 이런 그리스도를 향한 열렬한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나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탔던 사람들입니다. 일제시대 유재헌 목사님이란 분이 1940년대에 작사했던 찬송가 가사가 있는데 저도 가끔 즐겨 부르는데 그 가사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제목은 “예수로 만족합니다.”입니다.

“예수 소유하여서 나는 부자되고 / 예수 한 분 잃어서 나는 거지되네
(후렴) 예수여 예수여 내중심에 오소서 /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예수 없는 천국은 내가 원치 않고 / 예수 있는 지옥도 나 싫지 않도다(후렴)
아침에는 예수로 눈뜨게 하시고 / 저녁에는 예수로 잠들게 하소서(후렴)
나의 혈관 그속에 주님 피부으시고 / 나의 심장 그속에 주님 힘 넣으소서(후렴)
사랑하는 예수로 나 아주 미치고 / 그 예수님 위하여 죽어 시원하네(후렴)” 

예수 한 분에 대한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을 단번에 읽을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정확히는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사로잡혔다, 붙잡혔다’는 뜻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예수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예루살렘으로, 다메섹으로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귀신들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못 말리는 사람, 예수에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제일 무서운 사람이 이렇게 사로잡힌 사람, 미친 사람입니다. 도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인생과 자기 가정까지 다 팔아먹고 맙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자 또한 자기 부모를 몰라 하고 자기 처지나 체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예수쟁이는 예수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이런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 다 적당히 세상과 예수 양 다리 걸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일을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건전한 의미에서 그 일에 미친 사람들입니다. 음악에 미치고 예술에 미치고 운동에 미치고 연구나 발명에 미친 사람들이 일을 냅니다. 적당히 해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에 미쳤기 때문에 세계사 2천년에 빛나는 위대한 사도로서 우뚝 서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닮기를 원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권능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기를 원합니다. 1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의 권능은 종말의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시는 그 부활의 현장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죽을 몸이나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내 흩어졌던 뼈마디가 붙고 허공에 사라졌던 내 몸의 구성 원소들이 다시 모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생명의 호흡이 불어 다시 온전한 내 몸을 회복하는 순간은 정말 장관이고 신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이미 첫 열매로 그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신도 부활하고 싶은 그 소망을 피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는 것 중 우리는 두 번째 것에 보다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죽으셨던 그 모습 그대로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활이 미래의 일이라면 고난은 현재의 일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처럼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협 가운데 사는 것을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동일화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5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하여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동일화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할 때 아마 강조점은 무엇보다 이 ‘고난’에 찍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부활의 권능은 닮고 싶은데 고난은 닮고 싶지 않지 않습니까? 축복은 받고 싶은데 십자가는 지고가기 싫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이시기도 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는 자는 고난의 잔도 함께 마셔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많아지고 목회자가 많아지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닮는다는 것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학교 경쟁률이 높은 것은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한쪽만 강조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 하면 인기가 있지만 “예수 믿고 십자가 지세요!” 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면 반쪽 예수가 아니라 온전한 예수를 믿고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이념이나 자기 욕심에 불과한 것이지 온전한 예수가 아닙니다.

중세기 위대한 성자 성 프랜시스가 아마 가장 예수님을 많이 닮았던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고난을 닮고자 했던 분입니다. 예수님처럼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주님을 닮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었습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기적중 하나는 프랜시스가 그리스도의 오상, 즉 두 손, 두 발, 옆구리에 예수님처럼 상처가 생겼다는 기적입니다. 그는 죽기 전 1년 동안 다섯 곳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경험하였다고 합니다. 프랜시스야 말로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도 닮고자 했던 진정 예수에 붙들린 사람이었다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감화를 주는 사람들은 이처럼 예수의 고난을 닮고자 했던 분들입니다. 그의 영광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려 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한 종교인으로서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길을 갔던 사람들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만인에게서 존경을 받습니다. 성철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이 존경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청빈과 버림과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많았다면 사람들이 부러워했을망정 존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신앙 인생을 완성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과정 중에 있고 진행형이라 고백합니다. 12절입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예수를 닮고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목표를 이룬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달려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아직도 미완성이며, 달려가고 있다는 이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긴장감이나 도전의식도 없고 나태해지기 마련입니다. 다행인 것은 예수님을 닮는 이 일이 거의 불가능한 목표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거룩과 섬김과 고난과 십자가의 길은 평생 달려가야 할 목표입니다. 내가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회자가 되었다고 해서 멈출 일이 아닙니다. 내가 100명 교회, 1천 명 교회, 1만 명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서 완성된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다 되었다 하는 순간 우리는 유혹에 빠지고 넘어지고 맙니다.

다윗이 넘어졌던 때가 언제입니까? 정상에 올랐다고 안심할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성도로 세우고, 통일왕국을 이루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그 위를 견고케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난 후였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 군대가 적들과 맞서 싸우러 나갔을 때 다윗은 오후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다가 그만 밧세바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정상 가까이 갔다고 마음 놓을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정상은 없습니다. 계속 달려가지만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라는 정상에는 이르질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조그만 산을 정복하고 자만하고 있다가 우리는 앞에 놓인 더 목표를 놓치고 맙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은퇴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은퇴하고 할 일이 없어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지만 신앙의 세계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누구든 젊었을 때의 그 부지런함과 그 열정을 늙어서까지 이어간다면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고, 그리스도 앞에 충실히 자기 인생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꿈을 놓지 마세요. 미국의 전대통령 카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푯대로 향하야 달려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북한 미사일 발사 문제로 한반도가 시끄럽습니다. 이런 모습을 자주 보다보니 우리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괘씸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만 평화롭게 살면 그만인데 저렇게 복잡한 나라가 있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합니다. 국민들 통일 의식을 조사해 보아도 점점 더 통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남북간의 긴장이나 북한 미사일 문제를 통해서 감사한 것은 남북한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은 것입니다. 북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 또한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자만했습니다. 국민소득이 2만 불에 이르고, 세계 10위권에 근접하는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이번 경제위기는 우리 민족을 흔들어 깨우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정신 차리라는 뜻입니다. 나만 잘 살면 돼 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되며 나가서는 저 북한 땅까지 먹여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저 휴전선을 영원한 국경선인 것 마냥 우리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살았습니다. 근 반세기 또한 우리와 우리 신앙선배들은 얼마나 통일을 놓고 오랜 세월 기도해 왔습니까? 하나님은 이 기도를 받으셔서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 버렸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뜻은 진행중 입니다. 이제 우리도 깨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또 어떤 시련을 주실지 모릅니다. 민족이 비전을 놓고 계속 달려갈 때 발전도 있고 영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이면 되었다 하는 순간에 민족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우리에게 북한의 형제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로 항상 깨어 있게 하고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13절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의 태도입니다. 앞을 향해 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 태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에 의해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롯의 아내는 되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왜 뒤돌아보았을까?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자기 재물에 대한 미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갖는 상징성입니다.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를 소금기둥으로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할 때의 뒤의 것은 먼저는 자기 출신일 것입니다. 자기가 정통 이스라엘이라는 특권과 율법에 탁월했다는 의식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출신이나 모든 특권을 포기하였습니다. 과거의 내가 어떠했는지를 빨리 잊어야 미래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과거 자신의 출신을 잊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대학을 나오고,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느 위치에 있었고 하는 그런 출신들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발이 묶여 그 놈의 체면 때문에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는 잊고 지금 위치나 처지에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적응할 수 있고 새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항상 모든 것이 처음인 듯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쉬지 않고 달려갈 수 있습니다.

어떤 스승과 제자가 강을 건너려 하는 데 배가 없습니다. 어렵게 배를 구해서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보니 제자가 그 배를 끌고 가려 합니다. 그래서 스승이 물었습니다. “왜 그 배를 끌고 가려하느냐?” 제자가 “힘들게 구했고, 강을 건너게 해 준 고마운 배인데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럽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이 말을 듣고 스승이 점잖게 제자에게 한마디 합니다. “아서라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려야지. 짊어지고 가면 고생만 할 뿐이다.” 우리 모습이 그렇습니다. 과거는 현재의 나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여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방해가 된다면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자기 성공도 또한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내가 교회를 얼마나 개척했고 주님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고생했는지에 대한 의식을 버렸습니다. 과거의 성공에 연연해하고 만족해하다가는 그것이 자기 자랑거리가 되고 말지 그리스도를 닮는 데는 백해무익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전반기를 성공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조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어떤 분들은 과거의 은혜와 헌신만을 자랑하며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큰 헌신을 하였고 큰 은혜를 받았는가 하는 자랑입니다. 그것은 과거일 뿐입니다. 고장 난 레코드가 제자리를 계속 돌듯이 흘러간 옛노래만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의 은혜입니다. 내가 지금 받는 은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 실패 또한 잊어버리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중 괴수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다는 과거 또한 잊어버렸습니다. 이 실패의 경험을 늘상 가지고 있다면 괴롭기도 하려니와 부담이 되어 사역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실패의 경험 때문에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패뿐만 아니라 자기 실수도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현재 주어진 인생은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베드로가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상처로만 가슴 아파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과거의 실수를 되돌아보지 않고 달려갔기 때문에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약한 인생으로서 실패와 실수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일단 실패했으면 빨리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실수를 했습니다. 일단 실패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라도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잡혀서 그만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인생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는 뒤에 것은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뒤에 것을 잊는 것은 현명한 삶의 태도일 뿐만 아니라 모든 되어진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라 인정하는 올바른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두 번째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 나가야 합니다. 13절에서는 ‘오직 한 일’ 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단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한 우물을 파는 데 있습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팔방미인은 복이 없습니다. 재주가 많으면 큰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좀 부족하더라도 한 방향으로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고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진 다음에는 그 방향을 향해 전력질주 해야 합니다.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저는 운동경기 중 육상경기를 좋아합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되어서 결승점을 향해서 달리는 선수들의 표정과 근육의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정말 결승점을 향하여 모든 근육과 세포 하나하나가 긴장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 곧 달려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그리스도 한 방향만을 향하여 달려 나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목표지점을 향해서 달려 나가는 집중력입니다. 송곳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집중력에서 나옵니다. 한 곳에 힘이 집중될 때 구멍을 냅니다. 남극의 태양은 적도의 태양에 비할 데 없이 차갑습니다. 그러나 그런 남극의 태양일지라도 돋보기를 가지고 한 초점에 태양빛을 모을 때 불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 달란트나 능력은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적은 능력일지라도 한 곳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결정이 됩니다.

바울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단 한 가지 예수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단 한 가지 푯대만을 바라보며 달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현재 모습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만족해하며 나태해져 있지 않습니까? 목표가 분산되어 바쁘기만 하지 열매가 없는 인생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아예 인생의 목표도 없이 무료하게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 번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 나가는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과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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