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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알지못하는 사람들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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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못하는 사람들 (막 10:35~45)


‘기도란 무엇인가?’ 여러 정의들이 있고 시중에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정의가 다양한데 이렇게 정의가 다양한 까닭은 여러 각도에서 기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기도자의 자세에 대해서 아주 잘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란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나의 양식과 내 힘으로 삼겠습니다.’ 라는 고백이고 요청입니다. 참 좋은 정의입니다. 

간구란 무엇을 간절하게 요청하는 것인데 기독교 기도에는 간구가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 이것은 기독교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어느 종교이든지 원시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 안에는 간절하게 간구하는 것은 다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여러 신들을 모시는 샤머니즘에도 간절하게 구하는 것이 아주 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간구는 같은 간구라도 다른 종교의 간구와는 아주 다릅니다. 보통 간구라고 하면 무엇을 달라고 간절하게 요구하고, 이것은 꼭 이루어 달라고 조르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간구는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꼭 알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하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결혼을 예로 들면 이 사람하고 꼭 결혼시켜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나에게 적합한 아내인지 또는 남편인지 꼭 알게 해달라는 것이 간구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뜻에 꼭 순종하게 해달라는 것이 간구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하나님 뜻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 뜻을 이루어나가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간구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소원, 내가 바라는 것, 내 욕심은 여기에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 뜻이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간구입니다. 

성경에 간구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예레미야 33장 3절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약에서 유명한 간구에 대한 말씀은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입니다. 이 말씀들은 간구에 관한 아주 중심적인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아주 어려운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들을 잘못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33장 3절 말씀의 경우 뒷부분은 빼고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라는 이 말씀만 기억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기만 하면 응답하겠다는 말씀만 기억하게 되는 것이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의 경우에는 앞의 말씀은 빼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라는 뒤에 것만 기억합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간절히 졸라대기만 하면, 부르짖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꼭 생각해야할 것은 네가 내게 나와 부르짖게 되면 크고 은밀한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 같이 보아야합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라는 이 조항을 잘 보아야합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여러분들이 내게 와서 부르짖으면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 내 뜻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찾아온, 나에게 부르짖는 너희들에게만은 가르쳐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여러분들이 내 뜻을 알고 내가 원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혹은 내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기도하면 그런 기도는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기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지 그렇지 아니하는지 생각하지 아니하는 간구는 은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하여 절박하게 하나님께 꼭 들어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좋아하시는 것은 그것 때문에라도 기도하는 자체가 귀한 것이지 그 내용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라도 하나님을 찾아오는 그 자체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가운데 내가 이 소원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이루지 못하는 기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셋인데 물건이 하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가 그 물건을 꼭 자기에게 달라고 간절히 이야기 하면 부모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소원을 이루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씁쓸하고 버림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있게 되는 기도를 받으시면 하나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가리켜서 배타적인 기도 혹은 독점적적인 기도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배타적인 기도, 독점적인 기도는 더더욱 기독교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저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떼를 쓰는 것이고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고 잠시 돌보와 주시는 것이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닙니다. 

참으로 딱하게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수제자 군에 들어가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요구를 우리 예수님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마 두 형제가 의논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둘은 친형제입니다. 야고보가 형이고 요한이 동생인데 그들은 내일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드디어 예수님께서 왕 자리를 차지할 때가 왔으므로 다른 친구들이 부탁하기 전에 얼른 부탁하여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이 부탁할 때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니 그렇게 부탁하자고 작정했든지 그들은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하나는 왼쪽에 하나는 오른쪽에 앉혀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하나는 우의정에 하나는 좌의정에 앉혀달라고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야고보와 요한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너무도 몰랐습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 배웠던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모르는데 야고보와 요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모릅니다. 수십 년을 믿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우리들이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지 그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지만 늘 함께 했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그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 올라가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정말로 원하시고 정말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너무 자주 모릅니다. 우리들에게, 내 가정에게, 우리 교회에게, 이 나라에 원하시는 것을 너무도 모릅니다. 

또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소원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아닌지도 몰랐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른쪽 자리, 왼쪽 자리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고 예수를 얼마만큼 믿었다고 해도 잘 알지 모르는데 우리는 본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모르는 사람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고 안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면 괜찮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즘 계속해서 결혼식이 있는데 주례를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몰라서 그렇게 했으니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이야기하면 끝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남자들이 군대 가면 훈련소에서 맨 처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압니다. 군대 가서 상관이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소위만 되어도 겁이 나는데 대위나 소령이 와서 물으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이때 ‘모릅니다.’ 라고 말하면 안 되고 ‘잊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괜찮습니다. 중간의 관리들은 다 가르쳐 주었지만 잊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본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회개하고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데 여러분도 들어보면 매번 같은 회개를 하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를 짓고도, 모르면서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자꾸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알만한 직분에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 충분히 배워놓고서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배우고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괜찮습니다. 그런 사람은 나와서 앉아있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배워도 배워도 모르면 또 배우면 됩니다. 끄덕끄덕 졸다가 마지막에 ‘아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도 괜찮습니다. 배워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알 만한 사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만한 사람이 모르는 것은 문제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더 열심히 나와서 기도하고, 자꾸 배우려고 하는 자세가 있어야지 그런 자리에 있으면서도 알지도 못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어른인 스승이 ‘자네가 잘못 알았어, 자네가 틀렸어. 그것은 아니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네.’ 라고 말씀해주심에도 불구하고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대드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부리는 것인데 이것은 참 문제입니다. 

오늘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했습니다. 38절에 주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질문입니까? 나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너희들은 너무너무 고통스러워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나이다(39절) 라고 고집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고 배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정도 살았으면 알지, 내가 이 정도 예수를 믿었으면 알지’ 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그것이 아닙니다.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또 배우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잊어 버렸습니다. 지난번에 알듯 했는데 잊었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새벽에도 나오고 틈만 나오면 나와서 ‘제가 모자라는 사람이니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정말로 좋아하십니다. 잘 아는 사람보다 훨씬 더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딱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 옳지 않은 것, 틀린 것을 보고 좋다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시험 답안지를 쓸 때 그냥 틀린 것보다 틀린 답을 보고 거기에 덧붙인 사람을 채점자가 더 많이 감점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다. 틀린 답을 보고 그것이 맞는 답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지금 다른 열 제자들이 그러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그들이 먼저 말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 줄 알고 따라하는 것이었습니다. 배변도 가리고 밥도 혼자 잘 먹을 줄 아는 대여섯 살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동생이 누워서 젖병을 빨고 오줌을 싸는 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오줌을 잘 가리던 아이가 누워서 오줌을 싸기도 하고 젖병을 물려달라고 우는 일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가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고 다시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쓰는 것도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돈을 바르게 썼는데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을 위해서 혹은 기껏해야 몇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을 보고 그렇게 고상하게 살던 사람이 바뀌는 바보 같은 일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돈을 잘 써보면 정말로 좋습니다. 인생이 사는 목적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겉으로 보기에 힘든 것 같지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캄보디아에 의료봉사를 갔는데 그 곳에 있다 보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서 옷이 금방 축축하게 젖습니다. 그런데 내 돈과 내 시간을 들여서 생고생을 하고 왔지만 갔다 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에디오피아에 가는데 가보면 너무나 더럽고 사람 몸에서 냄새가 나서 견디기 힘들지만 갔다 오면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를 생각하게 되고, 너무나 좋습니다. 

여러분, 돈을 제대로 쓸 줄 알면 따라오는 복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돈을 제대로 쓸 줄 알면 돈을 벌 때도 신이 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돈을 더 잘 벌게 되고 사업을 더 잘하게 됩니다. 머리가 명석해지고 지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낭비하고 허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것을 알게 되면 허비하지 않게 됩니다. 최근의 언론 보도를 보면 국회의원이나 공직자 가운데 돈을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 중 2조의 재산이 없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하게 되면 이런 일이 잘 없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돈을 잘 관리하게 되고, 사업도 잘하고 돈을 잘 관리하게 됩니다.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까닭이 이런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곳들에 쓰는 부끄러운 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자주 연출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할 때는 이 교회가 정말로 하나님의 교회로, 정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했지만 다른 교회가 인간이 좋아하고 사람이 좋아하는 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좋게 보여 따라가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것들을 참 조심해야합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이야기하고 모이는 것을 보고, 좋은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피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또 세우시지 않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그 소원을 하니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고 화를 내는 다른 열 제자들을 보십시오. 여러분, 참으로 악한 일이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우리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일들이 참으로 자주 있습니다. 내가 주님처럼 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이용하여, 예수의 이름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이용해서 내 소원을 이루고 내 욕심, 탐욕을 이루려고 하는 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가 결정적인 일에 있어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잘 따르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내일이면 예루살렘으로 출발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혹시라도 예수님의 왼쪽, 오른쪽 자리를 빼앗길까봐 여지없이 탐욕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런 일들이 우리들 속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주님의 형상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뒤를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해야 하는데, 이 좋은 일들을 두고 결국 내 욕심 내 탐욕 이루려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연출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 또 열 제자들을 통해서 바로 우리 모습을 주님께서 지적해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열 두 제자들은 다 순교하여 힘들게 고통당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제자들의 죽음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이 한사람을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두 형제 중에서 형 야고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순교하신 후, 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39절)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과 꼭 연관이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말씀을 보고 야고보의 그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꼭 고집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원이 있다고 너무 강하게 주님, 이것만큼은 꼭 이루어달라고 간구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원은 얼마든지 많이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것만은 꼭 이루어달라고 주님께 이야기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다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가? 내 모든 소원, 내 모든 지식, 내 모든 경험을 뒤로 하고 이것만큼은 내가 갖고 싶은 것, 우리가 얻어야 할 것, 취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진짜 좋은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오늘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그런 힘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돈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도, 능력이 있어도, 돈이 있어도 그렇게 권세를 부리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부리지 말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제일 좋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 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소원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소원보다도 이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그 길로 가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모든 수치를 받으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기어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마침내 인류의 최고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최고의 길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아무리 아니라고 보여도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길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이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들으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절).. 우리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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