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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체를 보시는 사랑 (고전 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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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보시는 사랑 (고전 13:9~13)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사람은 우주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전부를 지배하려고 하고 또 전부를 알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은 자연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을 발달시켰고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할 때 인류의 역사는 평화로운 발전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한계를 넘어서려 할 때 지구와 우주에 엄청난 재앙이 닥쳐왔고 또 올 것입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배아 줄기 세포 연구입니다. 이 배아 줄기세포는 불치병의 치료에 엄청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인간복제에 이르는 윤리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인간의 생명과 죽음 문제에 접근할 때 그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인간에게 안겨다 줄지 모릅니다. 그 동안도 자연 개발에 손을 대면서 인류는 엄청난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자연 질서 속에서 자연계가 골고루 나누어야 할 자연의 이익들을 인간이 독단적으로 취하여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연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 일로 인한 세계기후 변동은 앞으로 지구에 일어날 대재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이 곧 인간의 한계를 인정치 않은 인간들의 탐욕의 결과입니다.        

이런 탐욕은 사회와 개인의 윤리부분에서도 나타나면서 개인이나 혹은 사회공동체 간에 갈등과 다툼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부분적인데 다 아는 것 같이 말할 때, 그래서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할 때 미움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김 용규씨는 오랫동안 산과 숲 그리고 나무를 관찰하면서 쓴 책 ⌜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나무와 풀의 지혜를 이렇게 말하고 잇습니다. 

나무는 숲의 전부를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들풀은 제자리가 아닌 곳을 탐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자연이 그 신비스러움을 간직하는 길이며 그로써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도 우리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9-10절)

여기서 온전한 것이란 곧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함께 하지 않은 지식과 예언은 부분적으로 밖에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밖에 예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관계 전환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 15:15)

종에서 사랑의 관계인 친구라 칭하시면서 다 너희에게 알게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과 종 혹은 다른 사회적인 관계로써는 상대에게 자기의 전체를 다 노출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 알려줍니다. 또  사랑하면 다 알게 됩니다. 사랑하기 전에는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사랑하면서 마음의 눈이 열려 말하지 않아도 듣고 보지 않아도 그 마음의 눈에 상대의 전체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입니다. 특히 예수님과 동시대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의 예언과 경고는 정확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의만 있었지 사랑이 함께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눈이 온 세상을 다 보고 아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그렇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 특히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모든 정보를 의미하기보다는 처지와 형편을 뜻합니다. 우리의 약함, 부족함, 고통, 눈물 등 그것들의 이유와 원인까지도 다 아십니다. 사랑하면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정의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잘못, 실수, 범죄 등만 보일 것입니다. 도무지 용서 할 수 없는 괘심한 존재로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시기에 우리를 이해하시어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까지 우리 위해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밖엔 인생들을 구원할 길이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의 성찬 상 앞에 둘러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이 상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먼저 두렵고 떨리는 경외심으로 이 성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다 아시는 그 분의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 아시고도 아직도 살려두시는 주님의 자비로우심을 의지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믿음으로 이 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과 십자가의 사랑의 길은 곧 희생과 고통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이해했을 때는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이 눈을 멀게 합니다. 동시에 사랑이 눈을 다시 뜨게 합니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랑이 상대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감히 자기를 희생할 수 있게 만듭니다.       

조폭을 남편으로 둔 아내가 그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보복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그 남자에게서 남이 보지 못한 것을 그 여자는 보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하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인간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말할 때 그 여자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내가 아니면 저 남자를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남편 곁에 남아 있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사한 이유로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신랄하게 손가락질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곧 세리 창기 병 환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에 그들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3. 어린이는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어느 부분만을 봅니다. 그래서 호불호가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어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면만 보지 않고 여러 면을 살펴봅니다. 그것이 성숙한 인격의 징표입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이 부분적 지식과 부분적 이해를 의미합니다. 그 부분적이라 함은 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의 지혜서인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한 거지가 부잣집 대문에 기대서서 등을 긁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부자는 거지를 데려다 목욕을 시키고 입히고 먹여 보냈다. 

이튿날 두 명의 다른 거지가 이 소문을 듣고 와서 대문에 등을 긁고 있었다. 
이 때 부자는 그들을 실컷 때린 후 쫓아버렸다. 

쫓겨 가는 거지: "어제의 호의와 다르잖소?"
야단 친 부자: "혼자서는 등을 긁을 수 없다. 하지만 둘이서는 서로 긁어 줄 수 있느니라."

거지가 그렇게 사는 이유는 게으르고 나태할 뿐 아니라 자기밖에 없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이 결여된 것임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4.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

우리는 잊지 맙시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우리의 지식은 평면적이란 것을 염두에 둡시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할 때 곧 사랑이 충만할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됩니다. 이 표현은 곧 입체적이며 전체적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 때에는 내가 온전히 알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이 없으면 부분적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에 사랑이 들어와 온전한 신앙 생활이 되길 축원합니다.  


<결단의 선언>

1.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2. 어린 아이 같은 나 중심의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겠습니다
3.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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