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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수제자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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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자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 (눅 22:54~62)


며칠 전 어느 일간 신문을 봤더니 이런 헤드라인 기사제목이 있었습니다. 신용 잃은 국제신용평가사. 여러분도 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신용을 잃어버린 국제신용평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무디스’라던가, ‘피치’, ‘스탠더드’라는 세계적인 신용평가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가사들이 한국의 기업들과 은행들에 대한 평가를 내렸는데 한국의 기업들은 위험하다. 부도가 날 확률이 있다. 그래서 신용등급을 다 하향조정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가는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 회사를 더 신뢰하고 그 기업의 주식을 더 많이 사서 주식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에 대해서 자꾸 부정적인 등급을 내 놓는 것일까요? 무언가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을 믿을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의미 없는 것입니다. 신용을 잃어버린 신용평가사는 어디에 씁니까? 그들 스스로가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 더 신뢰를 받고 신용을 지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신용을 잃어버리고,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누굽니까? 12제자 중에 가장 수제자입니다. 으뜸 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신뢰했던 제자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렇게까지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시몬이라는 이름대신 베드로라는 아주 훌륭한 이름도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실 때 12명을 다 데리고 가지 않으십니다. 그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로 들어갑니다. 그만큼 그들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넘어진 사람이 누군가하면 바로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가 보기 좋게 넘어집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그 새벽에 대제사장의 종들에 의해서 체포를 당하시고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뜰까지 따라왔다가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나는 저 분 모른다고”, 아니 한 두 번 부인했다면 당황해서 그럴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보면 맹세코, 또한 저주까지 하면서 “나는 예수를 절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시간에 닭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고개를 돌리셔서 베드로의 얼굴을 바라보셨습니다. 닭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눈빛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제자인 베드로가 어찌 이렇게 쉽게 넘어질 수 있을까요? 어찌 이렇게 쉽게 부인할 수 있을까?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누가복음 22장 55절부터 57절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또 60절의 말씀을 한 번 읽어봅시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난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사람 절대 모른다.”고 세 번 말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베드로가 당황했을까요. 얼마나 베드로가 초라했을까요. 위대한 베드로가 왜 이렇게 쉽게 허물어져버렸을까요?

첫째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넘어질 수 있습니다. 무참히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앞으로 조금 넘겨서 읽어봅니다. 22장 39절,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을 이끌고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여기서 기도할 터인데 너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해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시간에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엄청난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기도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로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쿨쿨 자고 있습니다. 깨우셨습니다. “어찌하여 자느냐?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또 쿨쿨 자고 있습니다. 또 깨우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세 번 다 쿨쿨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마 몹시 피곤했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깨우십니다. “보라 나를 찾는 자들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은 무참하게 무너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비극적인 말씀의 하나가 마태복음 26장 56절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가니라.” 예수님이 체포되는 순간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전과 같이 읽히는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아주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실패의 원인은 기도 없음에 있다.” 우리가 인생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삶에 실패하면 우리는 핑계가 많습니다. 환경이 이랬고, 운이 없었고, 경제가 따라주지 않았고……. 백 마디 말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실패한 원인은 기도의 부재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기도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오르간들은 전자 모터가 있어서 바람이 들어오지만, 예전의 오르간들은 연주자가 있고, 뒤에서 부채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을 불어넣어줘야 오르간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능력을 공급받지 않으면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 없이 그리스도인은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도에 실패했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실패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좋은 기도의 습관을 갖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신문을 보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한 장이라도 읽는 습관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가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졌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늘 감람산에 가서 저녁에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9절에 보니까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습관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습니다. 어릴 때 나쁜 습관을 고쳐주지 않으면 그것이 일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을 길러주면 그 습관이 일생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습관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면, 기도하는 습관, 예배하는 습관을 길러주면 그것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습관이 나빠지면 그는 결국 그릇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도박에 빠지면, 그 도박을 좋아하는 습관은 못 고칩니다. 참 어렵습니다. 한 번 어떤 사람은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았더니 수면제를 먹고 자라고 했습니다. 수면제를 먹으니 잠이 비교적 잘 왔습니다. 수면제를 안 먹으면 불안했습니다. ‘아이고, 새벽에 또 깨면 어떡하나?’ 그러나 수면제를 먹으면 푹 잘 잘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하고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기차여행을 하게 되는데 기차여행을 하고, 또 등산을 하고 다시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그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자다가 그만 벌떡 깨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뭐라고 하신 줄 알았습니까? “아이고! 큰 일 날 뻔했네. 수면제 안 먹고 잘 뻔했네.” 그러더니 수면제를 꺼내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잠을 잘 자고 있는데 수면제를 왜 찾을까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봉사하는 습관, 기도하는 습관, 예배드리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를 늘 하는 습관을 가지신 분들은 옆에 사람만 앉으면 늘 대화가 됩니다. “어디 교회 나가세요? 인상을 보니 꼭 교인 같네요.” 대화가 됩니다. 전도가 수월합니다. 말 걸기가 수월합니다. 그런데 전도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여행을 하다가 옆에 누가 앉으면 전도를 못 합니다. ‘이거 또 후회하지 않을까?’ 이것 참 어렵습니다. 한 시간 동안 갈등하다가 전도 못합니다. 한 마디도 못하고 괜히 남에게 폐 끼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습관입니다. 좋은 습관은 일생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습관을 물려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자들은 기도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를 습관화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만 하려면 조는 것입니다. 이것이 습관입니다. 기도하다 조는 분들은 늘 좁니다. 습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능하면 사순절 새벽기도에도 같이 나오셔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온 교회가 사순절을 맞이해 기도할 때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꼭 그런 데 빠지는 습관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습관은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예배 때에도 어떤 분들은 이상합니다. 찬송 안 부르는 습관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끝까지 찬송을 안 부릅니다. 은혜가 안 됩니다. 여러분! 신앙의 정말 좋은 습관을 가지고 날마다의 시험에서 승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찌하여 자고 있느냐? 깨어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가 무너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좀 큰 소리를 잘 쳤습니다. 허풍이 셉니다. 그래서 장담을 잘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언젠가 나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또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가 펄펄 뜁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떠나가도 나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만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이 죽음의 자리에 가면 죽음에 자리에 까지 따라갈 것이요. 옥에 들어가시면 옥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주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22장 32절, 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한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에이! 내가 이제 신앙생활이 10년이 넘었는데’, ‘내가 집사생활이 20년이 넘었는데 나는 끄떡없어.’ 아닙니다. 과신하지 마십시오. 저도 넘어질 수 있고, 장로님도 넘어질 수 있고, 권사님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과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입니다. 인간은 늘 연약한 존재입니다. 늘 실수할 수 있고, 늘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은혜의 삶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아이고! 나 오늘 저녁 예배 빠지면 안 돼. 언제 사탄이 틈탈지 모르지. 오늘 내가 기도자리에 빠지면 안 되지.’ 자기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교회 안 가도 괜찮아. 나는 믿음 잘 지킬 수 있으니까.’ 여러분! 장담하지 마십시오. 언제 넘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기도의 삶을 소홀히 할 때, 영적인 삶을 소홀히 할 때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계집종이 “당신! 예수라는 사람과 같이 다니던 사람 아니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고 다그칠 때 만약 그가 좀 깨어있더라면, 마태복음 10장 17절 이하의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때론 핍박 받을 때가 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붙들어서 공회 앞에 던져 놓을 것이고,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너희가 무슨 말을 할 지 걱정하지 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시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안다고 시인할 것이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가 아마 이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무참하게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쪽같이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떤 순간에 말씀이 번뜩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지 못한 베드로, 기도에 실패한 베드로는 그 말씀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곤 딴 짓하는 것입니다. 큰 소리만 치다가 딴 짓하는 사람이 얼마나 웃깁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바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 주셔서 제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 저를 지켜주십시오.”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집사님이 이런 분이 있었답니다. 10년 전에는 도박을 너무나 좋아했고, 술도 좋아했던 분입니다. 어떤 기회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집사가 되고 술도 도박도 다 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모인다고 해서 ‘전도도 하고 얼굴도 봐야겠다.’하고 나갔습니다. 그랬는데 먼저 온 친구들이 돈 내기 화투를 치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런데 관심이 없으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딴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배가 아프다고 설사가 났다고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제발 5분만 자리를 지키고 화투짝 잡고 지켜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래가지고 ‘5분이야 못 봐 주겠냐’고 앉아있다 보니 솔깃 재미가 났습니다. 그 사이에 돈을 좀 땄습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바꾸려고 하니 그 때부터는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린 돈만 찾고 그만 두려했는데 웬걸 왕창 잃어버렸습니다. 확 신경질이 났습니다. “야 술 한 잔만 줘.”하고 먹기 시작하고, 도박판에 아주 자리를 치고 앉았습니다. 

여러분! 10년 동안 도박을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느 순간에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10년 동안 술을 입에도 안 댔는데 어느 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보니까 ‘추 아무개’라는 청와대 홍보부 비서관을 하던 분이 구속되었습니다. ‘박 아무개’의 돈을 받았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제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20년 전에 가정 사역 세미나에 갔는데 그 분이 어느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 거기에 와서 같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후에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되었다고 하고, 가정사역 강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대통령의 비서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집사든 목사든 정말 목사면 목사답게 살아야 좋습니다. 왜 그 정치판에 들어가서 거기서 자신을 더럽히고 혐의를 쓰고 왜 그럴까요? 여러분! 누구도 과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늘 우리는 유혹 앞에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심하는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은혜의 자리에 열심히 나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늘 말씀의 인도를 받으셔야 합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장담했습니다. 과신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떠나도 나는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것이다.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두 번째 넘어진 이유입니다.

마지막 베드로가 넘어진 이유는 예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 54절 말씀을 읽습니다.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이 멀찍이란 말이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마태복음에도 이 멀찍이 라는 말이 똑같이 소개됩니다.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 예수님은 체포되어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는데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갑니다. 무엇입니까?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너무 가까이 가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가까이 못 갑니다. 너무 멀찍이 가면 자기 양심에, 예수님께 뭔가 잘못하는 것 같아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바꿔 말하면 도망가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의 거리이든 심리적인 거리이든 이미 그는 주님으로부터 마음이 점점 떠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한 약속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다가갔어야 됐습니다. “주님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나이다.” 마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하는 룻의 고백처럼 주님이 가는 곳이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죽는 자리라면 그 자리까지, 옥이라면 그 자리까지. 베드로는 이미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미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체면 때문에 그는 도망가지는 못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걷지만, 주님과는 이미 영적인 거리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정쩡한 상태에 계신 비교적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라오디게야 교회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면 내가 토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봉사에도 적당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도생활도 적당히 합니다. 너무 열심히 나오면 남들이 욕할까봐. 또 너무 멀리가면 안 될까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것이 문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와의 이 영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에 나오셔도 좀 가능하면, 이왕 버스타고 전철타고 힘들게 오셨는데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앞의 두 자리는 꼭 비워놓습니다. 가능하면 뒷자리는 꼭 비워놓으시기 바랍니다. 늦게 오는 분이 편하게 들어오실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앞에부터 앉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좀 더 강단 앞에, 말씀 앞에 가까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가까이 오시기 바랍니다. 이사 할 때도 이사하는 기준이 교회에 가까운 곳이라면 좋은 것입니다. 강단 가까운 곳, 말씀이 가까이 있는 곳, 또 목사와도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난로에서 멀어지면 열을 못 받습니다. 등잔에서 멀어지면 책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가까이 오십시오. 예수님의 무릎 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 얼마나 칭찬을 듣습니까? 여러분의 삶은 늘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이제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회복되게 됩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닭이 울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닭 울음소리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설교입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베드로의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 앞에서 장담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 예수님의 눈빛은 베드로를 비난하는, 책망하는, 분노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는 눈을 들어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연민의 눈길이었습니다. “베드로야! 걱정하지 마. 네가 넘어진다고 내가 말했잖아. 넌 다시 일어날 수 있어. 너는 좋은 제자가 될 수 있어. 예수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위로하고 계신 눈빛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주님의 눈길과 부딪혔을 때 너무 마음이 아파 밖으로 뛰쳐나와 통곡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닭 울음소리를 통해서 회개함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주님 안에서 훌륭한 제자로 거듭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것이나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나 죄로 보면 똑같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우리 삶 속에 주님을 부인하며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때로 내 삶 속에서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모습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가까이 나오십시오.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의 아름다운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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